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266화 (266/530)

266화. 기회의 땅

강 총관이 운현을 데리고 간 곳은 그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에 도착한 강 총관은 운현에게 깨끗한 새 옷 한 벌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요?”

“광주는 기회의 땅입니다.”

대답 대신 강 총관은 말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상품성이 있어야 합니다. 광주는 기회의 땅이자, 상인의 도시이기도 하니까요.”

“상품성…….”

“그렇습니다.”

강 총관은 운현을 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도련님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요?”

강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전시(殿試)의 합격자가 아닙니까?”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 총관은 말했다.

“도련님은 자그마치 전시의 합격자입니다. 과거를 준비하는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사람이지요. 그리고 요즘은 너 나 할 것 없이 과거를 준비하는 세상입니다.”

“하, 하지만 저는…….”

전시의 합격자라고 해도 이 꼴로 돌아온 형편이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도련님의 능력을 인정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도련님을 겪어 보기도 전에요. 바로 그것이 상품성이지요.”

운현은 강 총관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은 운현이 대단히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걸 내세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강 총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광주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만일 도련님이 그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전시의 합격자라는 사실은 더 큰 비난과 조롱이 되어 날아올 겁니다.”

그의 말은 옳았다. 사람들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특히 계산에 밝은 광주 상인들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도련님이 가진 또 하나의 상품성은 바로 오랜 학문으로 자연스럽게 몸에 밴 학자적 품성입니다.”

“네?”

학자적 품성이라니, 전혀 생각도 못 하던 말이었다.

“광주는 상인의 도시입니다. 상인들은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련님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풀기 마련이지요.”

마치 품평을 하듯 강 총관은 말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고 깔보기도 하지만 상인들은 학자들에게 막연한 선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학자적 품성을 가진 도련님이야말로 광주 상인들의 신뢰를 얻기 쉽다는 것입니다.”

운현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의 말은 모두 옳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내용이 아닌가?

강 총관이 나지막이 되물었다.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운현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어도 좋습니다. 상인의 기본은, 자신이 팔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파는 것이니까요.”

강 총관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팔리는 것을 파는 것. 그것이 상인의 출발점입니다.”

탁.

강 총관은 한 아름의 책을 들어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수북이 쌓인 그 책들은 오래된 장부들이었다.

운가상단이 이제껏 지내온 날들이 낱낱이 기록된, 숫자로 적힌 역사책.

“광주의 상단은 대단히 전문적이면서도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상단들은 정확한 업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똑똑한 사람들 말입니다.”

강 총관은 서탁 위에 놓인 책들 위에 손을 얹었다.

“이제부터 이 책들을 읽으십시오. 읽는 건 특기라고 하셨지요?”

“그, 그렇긴 하지만…….”

“대단히 전문적이고 복잡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별거 아닙니다. 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도련님도 분명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만들어 놓은 체계다. 그것도 특별한 천재들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상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강 총관의 말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사실 제가 보기에 도련님께 가장 좋은 일은 서원을 차리는 것입니다.”

생각에 잠긴 운현의 귀에 강 총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원은 상당한 자본이 필요합니다. 한 푼도 없는 지금의 도련님께는 사실상 불가능하지요.”

강 총관은 판단은 냉정했다. 그리고 현실적이었다.

“그러니 지금 도련님께 급한 것은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입니다. 괜찮은 상단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 돈을 모으고 투자를 받는다면, 서원을 세우는 것도 허황된 일이 아닙니다.”

말하는 강 총관의 심정은 내심 착잡했다.

운가상단이 지금처럼 어렵지만 않았더라도 작은 서원을 시작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일도 틈틈이 계속하도록 하십시오. 망가진 상품은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태가 나기 마련이니까요. 닳고 닳은 광주 상인들의 눈을 속이는 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망가진 상품이라.’

강 총관의 말이 맞았다.

운가상단을 찾아올 당시의 자신은 정말로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지금은 망가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는 도련님 하기에 달렸습니다.”

강 총관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강 총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운현으로선 처음 보는 미소였다.

“아, 그리고.”

운현이 옷과 책을 한 아름 안고 집무실을 나가려는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강 총관이 불렀다.

“네?”

손에 짐을 든 상태라 어정쩡한 모습으로 운현이 돌아보자 강 총관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혹시, 밤에 뭐……. 따로 하시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운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밤에요? 없는데요?”

“그렇습니까?”

마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강 총관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운현의 눈동자는 그의 대답만큼이나 맑았다.

‘괜한 걱정이었나 보군.’

운현의 침소를 담당한 하녀가, 매일 침구가 더러워지는 데다 역한 냄새가 난다고 불평을 했기에 물어본 것이다.

“알겠습니다.”

강 총관은 운현의 말을 믿었다.

운현은 말의 무게를 충분히 증명한 사람이니까.

달칵.

운현은 집무실을 나와 숙소로 발을 옮겼다.

손에는 새 옷 한 벌과 오래된 장부가 가득했다.

‘상품이라…….’

사람을 상품처럼 평가하는 건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도 옛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실제로 사회의 기득권은 언제나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상인의 도시 광주다.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이 자리는 바로 상단이고.

“……그래, 그렇구나.”

한 달 만에 처음으로 운현은 이곳이 광주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리고 여러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이 숲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던 그 세계와 전혀 다른 곳에 말이다.

“나는, 아주 멀리 왔구나.”

운현은 탄식처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쩐지 이제는 정말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모두 흘러가 버렸으니까.

저벅, 저벅.

이런저런 상념 속에 운현은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오늘 새벽에도 악몽 속에서 잠을 깨었다는 것을, 그는 잠시 잊고 있었다.

***

황금색 이중 지붕을 얹은 거대한 전각들, 깊은 해자와 붉은빛 담장으로 둘린 대륙의 심장, 자금성의 깊은 밤.

천하의 모든 부귀와 권세가 모여드는 자금성의 한 대전에서, 화려한 관복을 차려입은 노인의 흰 수염이 파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너 이노오오옴!”

그것은 누구라도 엎드리게 할 정도로 기백이 넘치는 호통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치욕스럽게 무릎 꿇린 채 결박당한 사람은 바로 노인 자신이었다.

중무장한 금의위가 뒤에서 그를 찍어 누르고 있었고, 검을 빼어 든 금위위들이 철통같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천한 내시 따위가아! 감히 어디서어어!”

백발이 성성한 노익장의 호통은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그것은 공허히 울리는 외침이 되고 말았다.

“과연 사대삼공을 지낸 명문가의 어르신다운 기백이군요. 후후훗.”

작은 부채로 뒤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붉은빛 태감의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는 바로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이었다.

“네가 이런 짓을 하고도 하늘이 두렵지 않더냐!”

노인의 서슬 퍼런 호통이 다시금 대전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박 공공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하늘이라고요? 그 하늘의 노여움을 산 분이,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것을 어찌 아직 모르신단 말입니까?”

부드럽고 가는 목소리로 박 공공은 말했다.

“역천(逆天)의 무리와 손을 잡고 무수한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한 당신의 죄를, 천자께서 정녕 모르시리라 생각했단 말입니까?”

사락.

부채를 거둔 박 공공은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수천의 군세가 움직이는 것을 의도적으로 은폐했습니다. 만일 그곳이 항주가 아니라 이곳 북경이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박 공공의 눈빛은 싸늘했다.

수천의 무장 병력이 움직이는 것은 그 어느 왕조라도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위협이다.

아무리 그곳이 지방 도시 항주라 해도, 그 사실을 은폐한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다.

“너, 너 이노옴!”

노인의 흰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박 공공은 작은 부채를 들어 입을 가렸다.

“물론 그 때문에 당신의 목을 취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로서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지만요. 후훗.”

노인은 이를 갈았다.

항주 무림의 일에 협조한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그러나 더욱 큰 실수는 박 공공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이다.

죄도, 벌도 자신이 정한다 여겼다.

아무도 자신의 권력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박 공공이 이토록 신속하고도 과감하게 행동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자칫하면 박 공공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내, 내 너를 진작 쳐 죽였어야 했거늘!”

노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원독이 가득한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박 공공을 죽일 듯했다.

그러나 박 공공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가시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박 공공은 품에 손을 넣어 붉은 비단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한쪽을 잡고 아래로 가볍게 떨어트렸다.

펄럭.

날아갈 듯한 서체로 빽빽하게 쓰여진 이름들이 펼쳐졌다.

노인은 눈을 부릅떴다.

자신과 계파의 핵심 인물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모든 이름이 빠짐없이 그 두루마리를 채우고 있었다.

“함께 영화를 누렸으니 함께 고초를 받아야 공평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늘은 진정 누구에게나 편벽됨이 없으니까요. 후후훗.”

으득.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노인은 줄기줄기 원한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쯧쯧. 사대삼공의 명문가 어르신께서 뒷골목 협잡배 같은 뻔한 협박을 하시다니요.”

박 공공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는 멋들어지게 시라도 한 수 읊어야지요. 그래야 사람들이 한 번쯤 읽어 주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사락.

박 공공은 손을 들었다.

중무장한 금의위가 즉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끌고 가세요.”

“네.”

명령을 받은 금의위가 눈짓을 보내자, 노인은 금의위 무사들에게 개처럼 끌려 대전 밖으로 사라졌다.

“장군.”

“네, 공공.”

병필태감 박 공공은 들고 있던 붉은 비단 두루마리를 금의위에게 건넸다.

금의위는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손을 내밀어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역적들의 명단입니다.”

박 공공은 말했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갈 무서운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어지고 있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전부 반드시 잡아들여야 할 것이에요.”

사대삼공의 명문가다.

관계를 맺은 가문들도, 세력도 결코 작지 않았다. 박 공공의 명이 서슬 퍼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반항하는 자들은 그 누구라도 즉시 참살하세요. 알겠습니까?”

“존명!”

금의위는 즉시 그의 명을 받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