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재활(再活)
강 총관은 운현에게 말했다.
“우선 그 총관님이라는 호칭부터 거두시지요. 그저 강 총관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강 총관.”
사뭇 열의마저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강 총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 총관이 말했다.
“도련님은 몸을 추스르십시오. 그런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강 총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의 성격이 그러하듯이.
“몸을 추스르라면 어떻게…….”
“다행히 도련님은 어디가 아프거나 병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몸을 움직여 일을 하세요.”
“일요?”
“네. 물을 길어도 좋고, 마당을 쓸어도 좋고, 청소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장작을 패도 괜찮겠지요. 무엇이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강 총관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곳은 상단입니다. 도련님이 일을 한다고 해서 수군거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하지 않으면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선 간단한 일을 하며 건강을 추스르도록 하십시오.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눈살을 찌푸리며 강 총관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동안은 술이든 도박이든 절대 손대면 안 됩니다.”
“그, 그런 건 해 본 적 없습니다.”
운현이 얼른 손을 내저었지만 강 총관은 믿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강 총관의 매서운 눈초리가 운현을 똑바로 향했다.
“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습니다. 지금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듯, 강 총관은 고개를 숙여 다시 서류를 손에 쥐었다.
“감사합니다. 강 총관.”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강 총관의 집무실을 나왔다.
탁.
문이 닫히고, 강 총관은 고개를 들어 닫힌 문을 보았다.
운현의 진지한 눈빛이 눈앞에 생생했다.
하지만 강 총관의 표정은 썩 탐탁지 않았다.
“글쎄, 어떨지…….”
진지한 눈빛은 많이 겪어 보았다.
옳은 말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그 말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도, 강 총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운현이 강 총관이 도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운현의 말이나 눈빛이 아니라, 그의 삶이 그것을 곧 증거 해 줄 테니까.
‘그다지 기대는 되지 않지만.’
강 총관은 회의적이었다.
그런 굳건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저런 꼴이 되지도 않을 테니까.
사락.
고개를 돌린 강 총관은 다시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
운현은 강 총관의 충고를 즉시 실천에 옮겼다.
우선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방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사락, 사락.
쓸고 닦는 본격적인 청소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어려운 일이라서가 아니라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였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인지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삐그덕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무 쉽게 지쳤다.
“후우.”
운현은 허리를 펴며 벽에 몸을 기댔다.
‘겨우 이 정도로…….’
아무래도 자신의 몸 상태는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각한 듯했다.
강 총관이 먼저 몸부터 추스르라고 한 것도 당연했다.
이래서야 무엇을 하겠는가?
‘정말 한심하군.’
운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절망하거나 좌절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 따위…….’
새벽에 꾼 악몽의 한 자락이 문득 운현을 엄습했다.
운현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마치 달라붙는 악몽을 털어 내기라도 할 듯이.
‘움직여야 돼.’
운현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청소를 할 때마다 몸 이곳저곳이 삐걱거리고 고통이 찾아왔지만 운현은 오히려 계속 쉬지 않고 움직였다.
‘……힘들긴 해도.’
운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른 생각이 안 나는 건 좋군.’
몸을 움직이니 좋은 점은 바로 딴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앞날에 대한 것이건, 혹은 악몽이건, 아니면 이제는 완전히 끝장난 것 같은 자신의 몸 상태건 말이다.
“으챠.”
운현은 힘을 내 청소를 계속했다.
근육과 관절이 여기저기서 고통을 호소했지만 묵살했다.
‘이 정도쯤…….’
자신이 받아야 할 죄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운현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청소를 계속했다.
숙소 청소가 끝난 후에는 주변을 정리했고, 오후에는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었다.
몇 번이고 어지러워서 주저앉아야 했지만 운현은 결코 빗자루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날 밤, 아주 오랜만에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운현은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금방 찾아왔다.
그러나 안식은 그렇지 않았다.
“헉!”
운현은 다시 악몽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지독한 꿈, 똑같은 악몽.
초저녁에는 그렇게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는데 악몽은 또다시 운현을 찾아왔다.
“허억. 허억.”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옷도 침상도 온통 땀이다.
피비린내가 날 것만 같은, 유난히 기분 나쁘고 질척한 땀.
결코 정상이 아니었지만 운현은 개의치 않았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추스르겠다는 결심과는 전혀 동떨어진 생각이었지만 운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저 외면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바스락.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들이켰다.
창밖을 보니 아직 어둠이 짙다. 그러나 운현은 다시 잠들 수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후우.”
운현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더러워진 잠옷과 침구를 정리한 후에, 운현은 긴 빗자루를 꺼내 들었다.
달칵.
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깨를 웅크리고 운현은 마당으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사락. 사락.
커다란 빗자루가 지날 때마다 바닥에 긴 빗살 무늬가 생겼다. 마치 커다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넓은 마당에 빗살 무늬가 하나 둘 아로새겨진다.
사락. 사락.
한 번, 또 한 번. 운현은 힘을 주어 빗자루를 움직였다.
새벽의 쌀쌀한 느낌은 어느새 사라지고 운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마치 빗자루질에 목숨을 건 사람 같았다.
“후우.”
새벽이 밝아올 무렵 운현의 빗자루질은 끝이 났다.
운현은 자신이 공들여 이루어 놓은 일을 바라보았다.
마당 전체에 마치 여인의 머릿결 같은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그 모습이 마치 무언가 대단한 일이라도 끝낸 것처럼 뿌듯했다.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 아주 멋지네요.”
문득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사촌동생 운희연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결코 감탄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아니 한쪽 눈살을 찌푸린 그녀의 모습은 어이없다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설마 밤새도록 빗자루질을 한 건가요?”
조롱하는 듯한 말투가 분명했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한 건 아니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운현이 대답했다.
“그냥 하고 싶어서.”
운희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로 한 일이 이건가요? 청소요?”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응. 먼저 내 정신 상태를 좀 가다듬어야 할 것 같길래.”
“빗자루질로요?”
“해 보니까 의외로 꽤 좋아. 딴생각도 안 나고.”
담담한 운현의 대답에 운희연은 기분이 상했다.
“그래요? 잘해 보세요.”
새침하게 한마디를 던지고 운희연은 발걸음을 돌렸다.
사박, 사박.
그녀는 보란 듯 운현이 쓸어 놓은 마당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애써 만든 빗살 무늬에 발자국이 찍혔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운희연이 자신을 빈정대듯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음은 물 긷기라도 해 볼까?”
지금 몸으로는 물동이를 들 수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못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니까.
저벅.
운현은 빗자루를 들고 발길을 옮겼다.
마당 가득한 빗살 무늬를 망치기 싫어 주변으로 빙 둘러가는 수고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짹짹.
지저귀는 새소리 속에, 어느새 환하게 떠오른 아침 해가 마당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
영웅맹은 장강 일대의 모든 이권에 개입했다.
문파 간의 분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웅맹은 원칙이나 옳고 그름 따윈 따지지 않았다. 심지어 정사파조차도 가리지 않았고, 돈만 주면 그 어느 문파에라도 기꺼이 힘을 보태 주었다.
물론 그 힘이라는 건 대부분 이름만 빌려주거나, 혹은 산채 채주급 두셋을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대부분의 경우라면 말이다.
장강에서 수백 리 떨어진 귀주성 지방 도시, 준위.
관도를 거침없이 달려온 커다란 마차는 쌍검문이라는 현판 앞에 멈춰 섰다.
“워어!”
사십여 문도들과 함께 정문 앞에 서 있던 쌍검문 문주 장열해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벌컥.
“쯧, 아주 시골 촌구석이구만.”
문이 열리자마자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험한 인상의 중년인이 눈을 부라리며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대체 뭐 먹을 게 있다고 우리가 여기까지 와야 하는 거야?”
“형님, 어서 나가시오. 갑갑해 죽겠소.”
뒤에서 들려온 걸죽한 목소리에 중년인이 땅에 내려섰다.
그 뒤로 뒤룩뒤룩 살찐 비대한 사내가 힘든 몸짓으로 마차를 내렸다.
“에이, 씨벌. 마차 좀 큰 걸로 하라니까!”
그가 화를 내자 문주 장열해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이 마차도 만만찮게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체통을 지켜라.”
마차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셋 중 가장 무인다운 모습이었다.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인상은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서 오십시오! 영웅맹의 호걸 여러분!”
쌍검문 문주 장열해가 짐짓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쌍검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함께 서 있던 쌍검문 문도 사십여 명이 일제히 소리치자 험악한 인상의 중년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 수고가 많다.”
그는 짐짓 대범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세 사람은 바로 영웅맹에서 보내 준 ‘고수’들이었다.
화려한 비단옷과 값비싼 장신구를 걸친 그들의 모습은 무림의 고수와는 사뭇 거리가 멀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영웅맹 사람들이라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저벅.
쌍검문 문주 장열해는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예를 표했다.
“말로만 듣던 호걸분들을 뵈니 이 장열해, 평생의 영광이외다. 하하하.”
“평생의 영광치고는 대접이 그리 좋지 않군.”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이 말했다.
문주 장열해는 움찔했다.
“그, 그럴 리가요. 본래 세 분을 위해 화려한 주연을 준비했었습니다만, 오시기로 한 날짜는 사흘 전이었던지라……. 하하.”
온갖 요리를 쌓아 놓고 기녀까지 불렀었다.
하지만 영웅맹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그날 장열해가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문도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봐, 우리가 할 일 없이 노는 사람들인 줄 알아?”
험악한 인상의 중년인이 윽박지르듯 말했다.
“우리도 아주 바쁘다고. 이 먼 곳까지 와 줬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거 아냐? 엉?”
“무, 물론 감사합니다.”
장열해는 얼른 말을 이었다.
“송가장의 일만 끝내 주시면 근사한 자리에서 멋들어지게 대접해 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하하하.”
“흥,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근사해 봤자지.”
뒤룩뒤룩 살이 오른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이 온 대도시 중경에 비한다면 사실인지라 장열해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때 쌍검문 총관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곳은 본래 소수 부족이 많은 곳입니다.”
빙긋 웃으며 총관은 말했다.
“중경의 화사한 꽃들보다야 부족하겠지만 나름 색다른 멋이 있지요. 헤헤헤.”
두 중년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매서운 눈초리의 사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