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뭐에 빠져서 폐인이 된 거예요?
그날 밤, 운현은 밤새도록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랜 여행으로 지쳤으니 금방 잠이 들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잠자리 때문일까? 아니면 덥고 습한 광주의 기후 때문일까?
밤새 뒤척이던 운현이 결국 더 이상 잠들기를 포기한 것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스륵.
운현은 침상에서 일어나 잠옷을 벗고 숙부가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랜만에 입어 보는 깨끗하고 단정한 옷이었지만 어쩐지 남의 옷처럼 어색했다.
책도 없는 서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운현은 문득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끼익.
문을 열자 시원한 새벽 공기가 운현을 휘감아 들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어둠은 완연히 그 기운을 잃어 가고 있었다.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운가상단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자박.
조심스럽게 운현은 걸음을 옮겼다.
예전에는 그렇게 커 보이던 저택이었는데, 십여 년 만에 다시 보는 운가상단은 아담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작아 보였다.
사실 운가상단은 실제로도 그리 큰 저택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거닐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운현은 발길을 돌려 뒤뜰로 향했다.
“후우.”
뒤뜰에 도착한 운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숨이 가빠 왔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운현은 정원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오래된 저택답게 운가상단의 뒤뜰은 꽤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십여 년 전에도 이 저택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바로 이 뒤뜰이었다.
정원 한쪽 구석에 놓인 투박한 나무 의자에 운현은 몸을 기댔다. 그리고 멍하니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짹, 짹짹.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주변이 환하고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꽤 시간이 흐른 듯싶었다.
운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있다가 혹 다른 사람이라도 만날까 두려운 마음에, 운현은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여 뒤뜰을 떠났다.
운가상단의 아침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
이른 아침, 운현은 숙부 운일평에게 아침 문안을 갔다.
숙부는 운현에게 불편한 것이 없는지 물어보고, 앞으로는 따로 문안을 오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너도 생각해야 할 것이 많을 테니 말이다.”
그 말이 어서 몸을 추스르고 앞날을 결정하라는 뜻임을 운현은 모르지 않았다.
운현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 나왔다.
하인이 가져다준 식사를 한 후, 운현은 숙소에서 그날 내내 서성거렸다.
둘째 날, 여전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운현은 새벽부터 뒤뜰에 나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랜 여행에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피곤할 법도 했지만 잠들 수가 없었다.
해가 뜨고 뒤뜰에서 나온 운현은 하루 종일 숙소 부근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셋째 날, 오전 내내 숙소에 있던 운현은 결국 방을 나섰다.
조심스레 운가상단을 거닐던 운현은 하인들에게 무엇인가 시키고 있던 강 총관을 만났다.
“도련님?”
“아, 총관님.”
운현은 그가 어려웠다. 생각해 보니 십여 년 전에도 그를 어려워했던 것 같다.
“어디 나가십니까?”
식객은 할 일이 없다. 운현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닙니다. 그저, 여기도 꽤 오랜만이라서…….”
그러니까 하릴없이 서성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기, 그럼 저는 이만…….”
운현은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강 총관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도련님, 잠시만요.”
강 총관은 하인에게 시키던 것을 마무리하고 돌아섰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단호한 그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강 총관이 운현을 데리고 간 곳은 새벽에 운현이 갔던 뒤뜰이었다.
작은 연못과 꽃나무가 우거진 뒤뜰은 화창한 볕 아래에서 마음껏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강 총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그러나 강 총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언뜻 보기에도 운현의 모습은 과히 좋지 않았다.
어두운 눈빛에 핼쑥한 얼굴, 심하게 마른 운현의 모습은 그의 몸 상태가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 여기저기에 희미한 검은 반점들까지 보였다.
‘어려운 일을 겪었거나, 아니면 술에 찌든 탓이겠군.’
강 총관은 이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대도시 광주에서 갑자기 재물을 얻고, 이리저리 향락에 휩쓸려 다니다가 결국은 재산과 건강까지 모조리 잃어버린 사람들 말이다.
“도련님은 모르시겠지만 지금 상단의 형편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강 총관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 어쩌면 상단을 정리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주제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강 총관은 운현이 아는 한 아주 오래 전부터 운가상단을 지켜 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어떤 결정이든 빨리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어차피 도련님도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이 없던 운현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 운현을 쳐다보던 강 총관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난 다음에도 운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후우.”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강 총관의 말이 옳았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무슨 결정을 내리란 말인가?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후우우.”
또 한 번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땅이 꺼지겠네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에 운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비단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됨 직한 그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운현에게 말했다.
“그렇게 한숨 쉴 시간이 있으면 상단의 일이라도 돕는 게 어때요?”
당돌한 그 아가씨는 어딘지 숙부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운현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 희연 누이.”
그녀는 운일평의 딸, 운희연이었다.
운현에겐 사촌동생이 되지만 기억나는 건 아주 어릴 적 모습뿐인 데다 이야기를 나눈 적도 별로 없었다.
자박, 자박.
운희연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추궁하듯 그녀가 물었다.
“전시에 합격하고 북경에서 학사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운현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몸이 멀쩡한 걸 보니 형(刑)을 당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뭐에 빠져서 그렇게 폐인이 된 거예요? 술? 도박? 아니면 여자?”
“누, 누이.”
당황한 운현이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운희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
“뭐, 됐어요. 어차피 시답잖은 이유 때문이겠지.”
운희연은 운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린 놀고먹는 한량을 돌봐 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이 아니에요. 이 집에서 밥을 먹겠다면 무엇이라도 하세요.”
사락.
몸을 돌리던 운희연은 문득 생각난 듯 발을 멈췄다.
“아, 그리고 새벽마다 여기서 청승맞은 모습으로 앉아 있지 말아요. 여기는 내 자리라고요. 알았어요?”
그 말을 끝으로 운희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외모는 숙부를 닮았지만 성격만큼은 젊었을 때의 숙모 그대로였다. 물론 운현은 알지 못했지만.
“후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광주에 오면 모든 것을 잊고 조용히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겠지.”
운현은 중얼거렸다.
숙부도 숙모도, 강 총관이나 운희연의 말도 모두 옳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배운 재주라곤 그저 글 읽는 것뿐이니.”
자조적인 음성으로 운현은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리고 검(劍)인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듣는 순간 운현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났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
“허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운현은 잠에서 깼다. 동시에 그를 괴롭히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꿈이었다.
“허어, 허억.”
운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꿈이었다.
정신을 차린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자신의 숙소였다. 광주의 운가상단에 있는 자신의 방.
바스락.
운현은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로 갔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운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제야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지독한 악몽의 감정이 조금씩 퇴색해 가면서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그뿐이랴? 침상에 있던 침구도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운현은 천천히 침구와 잠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땀에 젖은 잠옷과 침구는 냄새가 유난히 지독했다. 다른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하는 운현으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악몽이었다.
일충현이 사라지고 북해의 소궁주가 떠나간 후에, 피에 젖은 독고랑이 나타나 운현을 향해 피눈물을 떨어뜨리는 꿈.
그 지독한 악몽이 오늘도 변함없이 운현을 찾아왔던 것이다.
“……이러다 미치는 건 아닐까?”
운현은 바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이 들면 언제나 악몽을 꿨다.
신음과 함께 깨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묻어날 것 같은 지독한 느낌으로.
“후우우.”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느는 것이라곤 오로지 한숨뿐이다.
―땅이 꺼지겠군요.
운현은 문득 희연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땅이 꺼지겠군.”
씁쓸한 목소리로 운현은 중얼거렸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침구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은 운현은 창문을 열었다.
달칵.
밖은 아직도 캄캄했다.
하지만 운현은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아침, 운현은 날이 밝자마자 강 총관을 찾아갔다.
강 총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그날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강 총관님.”
“도련님?”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운현을 강 총관은 의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요?”
강 총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운현은 진지했다.
“강 총관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니 무얼 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그저…….”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저 글 읽는 것뿐이니까요.”
잠시 침묵하던 운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강 총관님이라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강 총관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강렬한 눈매로 운현을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제 조언을 청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네.”
운현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 총관은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은 단순한 조언 이상의 것이다. 책임감이 강한 강 총관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상대는 주인인 운일평의 조카다. 게다가 그 눈빛이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국 강 총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감사합니다. 총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