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귀향
중년인은 문사 청년을 향해 물었다.
“보아하니 장사꾼 같지는 않은데, 집이 광주인가?”
잠시 주저하던 청년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향입니다만 하도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뭐, 나도 자주 오지만 광주는 늘 새롭지. 사람 많고, 물건 많고, 일도 많고. 저 멀리 서역에서 배가 올 정도니까 말이야.”
편하게 등을 기대며 중년인이 말했다.
자리가 좁아진 양쪽 사람들이 눈치를 주는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회도 많은 곳이라네. 나도 이번 건만 제대로 터지면 한몫 단단히 잡을 걸세. 자그마치 호암상단과 하는 거래거든.”
그는 사뭇 과시하듯 말했다.
상인의 뻔한 허세에 질린 다른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호암상단요?”
맞은편에 있던 아가씨가 눈을 빛냈다.
덕분에 두 사람은 문사 청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 보지 못했다.
“광주라면 화남상단과 진가상단 아닌가요?”
“어이쿠, 이 아가씨가 언제 적 얘기를…….”
중년인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지금은 호암상단이지. 물론 화남상단이나 진가상단도 무시할 순 없지만, 자그마치 천하삼대상단 아니오?”
상계에서 호암상단의 평가는 크게 변해 있었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던 것은 옛말이 되고, 이제는 천하삼대상단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광주에 진출한 지 일 년도 채 안 되었는데, 돈을 아예 쓸어담고 있다오. 약재에 철광석에 곡식까지, 사재기가 아주 말도 아니라니까?”
“그런데도 다른 상단에서 가만히 있어요?”
“물론 크게 반발했지. 하지만 어쩌겠소? 비싸게 산다는데. 덕분에 중소 상단이 많이들 망했소. 공급 계약은 했는데 물건을 못 구해서 말이오.”
“관에서는요?”
중년인은 씨익 웃었다.
“기름칠이라면 호암상단도 만만찮거든. 물론 진가상단이나 화남상단도 마찬가지지만.”
그가 말한 기름칠은 뇌물이 분명했다. 아가씨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데 중년인이 말을 이었다.
“하여간 그 지경이 되다 보니 호암상단과 기존 상단들의 갈등이 아주 극에 달했소. 결국 일이 터지더라고.”
아가씨의 눈이 반짝였다. 중년인은 사뭇 낮은 어조로 말했다.
“호암상단의 상행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은 거요. 아까 지나온 청원 부근에서 말이오.”
‘정체불명의 괴한’이라는 말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아가씨도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설마 다른 상단이 사주했나요?”
중년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모르지. 어디까지나 정체불명이니까. 여하튼 그 습격으로 자그마치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소. 하지만 호암상단의 물자는 온전했다오. 왜 그런지 알겠소?”
그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몇번 눈을 깜빡이더니 곧 답을 알아차렸다.
“설마 죽은 사람들이…….”
중년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죽은 건 괴한들이었소. 상행을 지키던 호위들이 엄청난 고수였던 거요. 서른이 넘는 괴한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호암상단 사람들은 상처 하나 안 났다고 하더군.”
따각, 따각.
사람이 죽었다는 말 때문일까? 마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호암상단의 호위를 맡은 문파가 어디였지요?”
아가씨가 문득 물었다.
그녀의 질문은 예리한 데가 있었다.
그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상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파 소속일 것이 분명했다.
“그건 모르겠소. 어쨌든 그 일 이후로는 아무도 호암상단을 건드리지 못한다오. 덕분에 죽을 지경이 된 건 중소 상단들이지. 화남상단이나 진가상단이야 워낙에 기반이 튼튼하니까.”
그사이, 마차는 어느새 광주 시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중년인은 아가씨를 은근히 쳐다보며 말했다.
“시간 있으면 같이 차라도 하지 않겠소? 내가 호암상단에 대해서라면 아주…….”
빙긋 웃으며 아가씨가 말했다.
“싫어요.”
똑 부러지게 대답한 그녀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어이쿠, 이거 본전도 못 찾았군. 하하하.”
다른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중년인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하지만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도 얼굴 두꺼운 장사꾼이 분명했다.
따각, 따각.
마차 안에 있는 다른 승객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자네도 너무 걱정 말게.”
창밖을 보는 청년에게 중년인이 툭 던지듯 말했다.
“요즘 다들 과거를 보겠다고 난리들이니, 서당이라도 하나 열면 굶지는 않을 걸세.”
정작 청년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중년인은 이미 그를 낙척 서생으로 여기고 있었다.
“광주입니다! 광주우!”
마차가 역참에 도착하고 마부가 소리를 높였다.
승객들은 우르르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짐꾼들은 마차가 실어 온 화물을 분주히 옮기고, 사람들은 각자의 길로 사라졌다.
중년인은 아가씨에게 한 번 더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역참을 떠났다.
저벅.
청년은 가장 마지막으로 역참을 벗어났다.
아까 그 아가씨가 긴 여행 내내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던 것을 청년은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호암상단도, 고수도, 문파도, 그리고 무공도.
낯설게 변해 버린 거리가 두려운 듯,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웅크린 채 힘없이 발길을 옮겼다.
***
운가상단은 광주의 토박이 상단이었다.
비교적 고지식한 가풍 탓에, 운가상단은 결코 부당한 거래나 손가락질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 탓인지 큰 이득을 보는 일도 없었지만, 상단의 신용만큼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였다.
그 신용이 가장 큰 자산이 되어, 운가상단은 광주의 수많은 중소 상단들 중에서도 제법 탄탄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옛날 이야기였다.
‘이, 이게 무슨…….’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청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운가상단의 정문은 사람 한 명 없이 쓸쓸했다.
북적이고 활기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휑하니 열린 문 너머로 텅 빈 마당만이 있을 뿐이었다.
낡고 쇠락해 가는 오래된 상단.
운가상단은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청년이 고개를 들자 긴 빗자루를 손에 든 하인이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시오?”
청년은 순간 당황했다.
“저기, 어르신께서는 지금 어디…….”
하인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허름한 차림의 낯선 사람이 다짜고짜 어르신을 찾으니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다.
“당신 누구요? 누군데 어르신을 함부로 찾소? 시답잖은 일이면 아주 경을 칠…….”
하인이 거친 목소리로 윽박지르듯 말할 때였다.
“무슨 일이냐?”
묵직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하인은 급히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초, 총관님.”
“무슨 일이기에 대문 앞에서 소란이냐?”
저벅, 저벅.
안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 운가상단의 강 총관이었다.
노년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그는 사뭇 매서운 눈매에 차가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매사에 엄하고 무뚝뚝한 편이라 운가상단의 하인들이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 그게 이 사람이 다짜고짜 어르신을 뵙겠다고…….”
강 총관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허름한 차림의 낯선 서생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이보게, 젊은이.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마디 해 주려던 강 총관은 문득 서생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오래된 이름 하나를 떠올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운현 도련님?”
놀란 표정으로 강 총관이 말했다.
서생은 머뭇거리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총관님.”
어색하게 웃는 그 서생은 바로 운현이었다.
고향을 떠난 지 십여 년만에, 그가 운가상단으로 돌아온 것이다.
***
운가상단의 단주, 운일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십여년 만에 찾아온 조카 앞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운현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어찌 된 게냐?”
한동안 운현을 쳐다보던 운일평이 물었다.
분명 운현은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고 했다.
학사의 직임을 받아 북경에 머물며 생활에 부족함이 없다고도 했다.
그 후로 십 년이 넘게 지났으니 이젠 혼인 소식이 들려올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이 꼴이 어쩐 일이란 말인가?
“너, 혹시…….”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트린 운현의 모습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운일평의 머리를 스쳤다.
“무슨 큰 사건에라도 연루된 것 아니냐?”
줄을 잘못 서서 형(刑)을 받고 하루아침에 삭탈관직을 당하는 것은 조정에서 드문 일도 아니다.
잘 나가던 벼슬아치도 한순간의 실수로 순식간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곳이 바로 조정이다.
문제는 그런 일들이 가문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해진다.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심 안도한 운일평은 다시 운현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순간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주저하던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그 목소리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운일평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있긴 있었나 본데…….’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운현은 말을 하지 않는다.
행색으로 보아 모진 고초를 당한 것 같기도 한데,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운일평은 착잡한 마음으로 조카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한 조카는 남에게 폐를 끼칠 사람이 아니다.
이런 꼴이 되어 찾아온 것은, 여기 말고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뜻이리라.
“……그래, 알았다.”
운일평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돌아가신 형님의 하나뿐인 자식이니까.
“가서 좀 쉬도록 해라.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고.”
“감사합니다. 숙부님.”
운현은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궁색해 보이는 조카의 모습에 운일평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달칵.
운현이 방을 나갔지만 운일평은 착잡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하필 요즘 같은 상황에…….’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단의 형편에 궁색한 꼴로 나타난 조카의 모습은 운일평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했다.
그때였다.
덜컥.
말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운일평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부인.”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딱딱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방에 들어온 그녀는 말도 없이 운일평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쩐 일이시오?”
“어쩐 일이겠어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가 말했다.
그 의미를 운일평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찾아온 아이요.”
운일평은 나지막이 말했다.
“몸도 멀쩡하지 않아 보이는데 어찌 내칠 수 있단 말이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고요?”
“부인.”
운일평이 말했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십 년 만에 저 꼴을 하고 나타난 사람을, 대체 뭘 믿고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혹시 역모에라도 연루되었다면 나중에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그럴 리 없소.”
운일평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사람을 받아들일 형편인가요? 수년간 과거 시험 뒷바라지를 해 줬으면 충분하잖아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을 대체 왜…….”
“부인!”
정색한 운일평의 목소리에 그녀는 말을 멈췄다.
“저래도 내 형님의 아들이오. 내게는 조카이고, 당신에게도 역시 조카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결코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다.
운일평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라고 어찌 생각이 없겠소? 지금은 비록 저런 모습이지만 본래 총명한 아이였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지 않겠소?”
그의 말은 곧 자신의 소망이기도 했다.
운일평은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당분간은 탐탁지 않더라도 참아 주시오.”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래 성격이 거침없고 기가 센 그녀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에게만은 그녀도 고집을 굽혔다.
바로 자신의 남편, 운가상단의 주인인 운일평이었다.
“……알았어요.”
한참 만에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제가 그 아이에게 잘 대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탁.
문이 닫히고 운일평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에 또 다른 곤란이 더해지니 이래저래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견뎌 내는 수밖에.’
착잡한 표정으로 운일평은 입을 다물었다.
결의를 다지듯 주먹을 쥐었지만 그 손조차 어쩐지 허전하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