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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61화 (261/530)

261화. 그날 이후

무림맹이 불타올랐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커다란 도시는 물론이고 한적한 관도변의 작은 객점까지,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항주에서 생긴 참변, 항주 혈사에 대한 것뿐이었다.

“흑도회 회주 진무량 대협이 죽었다고?”

“이 사람아, 진무량뿐인가? 혁련세가의 가주도 큰 부상을 당했다고 하네. 신흥오대세가라던 단목세가와 남해검문의 가주들도 무사하지 못하다는군.”

“아니, 대체 누가?”

점심 식사에 곁들인 한 잔의 술 때문이었을까?

두 상인의 대화는 유난히 수다스러웠다.

“그게, 철혈사왕 염중부라네.”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은은한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철혈사왕!”

듣던 상인도 놀랐다.

그는 급히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니, 그 노괴가 어찌하여…….”

“그뿐인 줄 아나?”

앞에 앉은 상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소림과 무당, 아미, 화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더군. 일류급 제자들도 숱하게 목숨을 잃었고. 단 하룻밤 만에 말일세.”

“세상에…….”

“그 고고한 거대 문파의 장문인과 가주 들이, 제자들이 죽어 가는 걸 뒤로하고 밤새 도망쳤다니 말 다한 거지.”

평범한 사람들에게 혁련세가나 흑도회는 구름 위의 존재들이다.

소림이나 무당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체면을 버리고 도망쳤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맙소사…….”

무림맹을 탈출한 거대 문파들의 상황은 괴멸적이었다.

소림과 무당, 화산, 아미의 피해는 소문보다 특히 심각했다.

흑창기마대와 황천대에 포위되고 철혈사왕 염중부의 습격을 받은 그들은, 비록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함께 있던 정예 제자들의 대부분을 잃었다.

그야말로 치욕이었다.

“그, 그럼 무림맹이 정말로 졌단 말인가?”

“이 사람, 언제 적 이야기를…….”

상인은 호기롭게 술잔을 들이키고 말했다.

“무림맹은 진작에 불타 없어졌네. 지금 항주엔 영웅맹이 들어섰어. 무림맹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말일세.”

“영웅맹?”

“그래, 영웅맹.”

항주에는 새로운 무력 단체가 들어섰다.

무림맹의 전횡을 타파하고 강호 무림을 구해 냈다 하여 스스로를 영웅으로 자처하는 그들은 바로 장강수로채 연합과 신녹림, 그리고 철혈사왕 염중부였다.

“덕분에 수로채의 이무심이 살판났지.”

“이무심? 그럼 영웅맹 맹주가…….”

“어허, 이 사람.”

눈살을 찌푸리며 상인이 말했다.

“철혈사왕이 있는데 어디 이무심이 나서겠나?”

“그럼 영웅맹 맹주가 철혈사왕인가?”

“그렇긴 하네만…….”

상인은 은근히 목소리 낮췄다.

“영웅맹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고 하더군.”

“그, 그게 누군데?”

듣는 상인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혈공자 문왕.”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지만 소문은 말하고 있었다.

피의 귀공자, 혈공자 문왕.

그림처럼 빼어난 용모와 잔혹한 심성을 가진 문왕이야말로 무림맹을 불태운 장본인이자 영웅맹의 숨은 주인이라고 말이다.

“소문으로는 암천무제도 혈공자의 수하라더군. 하긴 그러니 혈공자가 황천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겠지.”

달칵.

문득 들린 소리에 두 상인의 대화가 끊어졌다.

옆자리에서 밥을 먹던 청년이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이다.

‘뭐야?’

상인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허름한 옷에 잔뜩 움츠린 어깨, 지저분한 머리카락과 제대로 씻지 않은 얼굴에다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위축된 모습.

전형적인 낙척 서생의 모습이었다.

“쯧.”

두 상인은 관심을 거두고 대화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인이 문득 말했다.

“아, 그럼 무림맹은 이제 어떻게 한다던가?”

“무림맹은 없네.”

“뭐?”

상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그렇게 당했으면 당연히 복수를…….”

“모르는 소리 말게.”

핀잔을 주던 상인은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태평맹을 세웠다네.”

“태평맹?”

“가만있어 보자. 그러니까 당문하고 제갈세가가 중심이라고 했고…….”

상인은 곰곰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혁련세가, 공손세가, 단목세가, 남해검문. 아, 그렇지 모용세가.”

손가락까지 접어 가며 확인한 상인이 말했다.

“이렇게 칠대세가가 모여서 태평맹을 만들었다네.”

“태평맹이라니……. 그럼 그들이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피식.

상인은 실소를 흘렸다.

“이름을 보게. 복수하게 생겼는지.”

태평맹은 무림맹을 불태운 영웅맹에 전면전을 선포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맹은 장강과 그 유역의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혼란한 강호 무림에 더 이상 쓸데없는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영웅맹과의 충돌을 피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태평맹은 마치 무림맹이 무너진 사실도, 영웅맹이 장강을 장악한 현실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무림맹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건가? 문파들이 전부 전멸을 당한 것도 아닐 텐데…….”

상인의 물음은 당연했다.

가주가 다치고 정예 제자들이 죽었다지만 거대 문파들의 힘은 여전히 크다.

그런데 어떻게 순식간에 무림맹이 사라질 수 있을까?

“결국 밥그릇 싸움이었다는 거지.”

비웃음을 흘리며 상인이 답했다.

“복수? 하면야 좋지. 하지만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판국에 누가 먼저 나서겠나? 게다가 생각해 보게. 자네 같으면 열여덟 개 중에 하나 가지는 거하고, 여덟 개는 뺏겼지만 나머지 열 개 중에 두 개 가지는 거하고 어느 쪽이 좋겠나?”

이야기를 듣던 상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열여덟 개? 열 개? 그게 뭔 소린가?”

“쯧쯧, 이리 계산이 느려서야…….”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던 상인은 말을 이었다.

“무림맹이 무너졌지만 태평맹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자기 몫이 더 커졌다, 이 말일세.”

“그런가?”

귀를 기울이던 상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거대 문파들의 계산이야 어찌 되건 그가 알 바가 아니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어쨌거나 장강은 그럼…….”

“그래.”

상인은 말했다.

“이제 장강은 영웅맹의 세상일세.”

대륙을 관통하는 장강은 이제 영웅맹의 영역이 되었다.

장강을 오가는 배들은 빠짐없이 영웅맹에 보호비를 냈고, 장강과 연계된 관도를 오가는 마차들 역시 통행세를 내야 했다.

장강 유역에 있는 수많은 무관과 중소 문파들도 영웅맹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영웅맹의 세상이 된 것이다.

“자네도 장강 부근은 가급적 가지 말게나. 영웅맹은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일세. 본래 도적 떼들이라 그런지 아주 막무가내라니까.”

“젠장. 처가가 그쪽이라 매년 가야 되는데…….”

“그러게 장가를 잘 들었어야지.”

두 상인의 대화는 이제 시시한 신변잡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달칵.

옆자리에 앉아 있던 청년이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객점 주인에게 다가갔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던 객점 주인은 청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자신 없는 표정에 위축된 어깨, 허름한 문사 차림의 옷에 낡은 등짐 하나.

과거에 낙방하고 낙향하는 서생이 분명했다.

음식값을 선불로 받아 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객점 주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요? 일자리라면 없소.”

해마다 몇 명씩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없는 형편에 공부한답시고 있는 재산 다 말아먹고, 정작 과거에는 떨어져서 집에 돌아갈 염치조차 없는 사람들 말이다.

“그게 아니라, 혹시 여기서 광주 가는 마차가 있는지 해서…….”

청년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우물쭈물한 어조에 죄 지은 듯 자신 없는 말투 역시 낙방 서생의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거 참 답답한 양반일세 그려.”

객점 주인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광주 가는 마차를 이런 데서 찾으면 어쩌겠다는 거요? 그런 건 큰 도시에 가서 찾아야지.”

여기는 한적한 관도변의 싸구려 객점이다.

아무리 광주가 광동성의 성도이자 화남 지방 최대의 무역도시라 해도, 이런 곳에 광주 가는 마차가 있을 리 없지 않는가?

“그, 그렇군요.”

자신의 한마디에 기 죽은 청년의 모습이 왠지 딱해서 객점 주인은 헛기침을 했다.

“좀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마차에 부탁해서 요 앞 마을까지 가 보시오. 거기서도 광주로 곧장 가는 건 없을 거고 더 큰 성읍으로 나가야 할 거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청년을 보며 객점 주인은 혀를 찼다.

‘쯧쯧. 보아하니 고생깨나 한 모양인데, 그러게 진작 정신 차리고 땅이라도 팔 것이지.’

객점 주인은 손부채를 부치며 중얼거렸다.

“에이, 요즘 젊은것들은 그저…….”

주인의 핀잔을 뒤로하고 청년은 객점을 나왔다.

한낮의 눈부신 햇빛과 달아오른 관도의 열기가 훅 하고 몰려들었다.

쏴아아아.

빈 관도에 바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한적한 이곳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세상은 너무나 조용하고 적막했다.

털썩.

청년은 나무 그늘 밑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힘 없이 주저앉았다.

방금 식사를 마치고 나왔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슥.

청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 마치 노인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쥐어 보지만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후우.”

땅이 꺼질 듯한 긴 한숨을 내쉬고 청년은 고개를 들어 관도를 바라보았다.

눈에 초점이 잘 맞지 않는지 그리 멀지 않은 곳도 흐릿하게만 보였다.

사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니까.

“후우우.”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청년은 어깨를 떨궜다.

어깨에 내리앉는 오후의 햇살조차 그에겐 그저 버겁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청년은 그렇게 힘없이 앉아 있었다.

턱.

술잔을 내려놓으며 상인이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까 내 깜박했는데 말일세.”

그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되어 있었다. 비운 술병이 여섯을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주 혈사 때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

“항주 혈사?”

역시 얼굴이 붉어진 맞은편의 상인이 반문했다.

“아, 거참. 무림맹이 싸그리 불탄 그거 있잖은가, 그거.”

“아까 얘기하던 그거? 근데 그게 왜?”

“그때 말이야. 글쎄 철혈사왕을 막아 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뭐? 누가?”

“누구라더라…….”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상인은 기억을 떠올렸다.

“영웅맹과 맞설 자는……, 맞설 자는……. 아, 맞다.”

그는 말했다.

“영웅맹과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다.”

“창룡검주?”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철혈사왕을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는……. 꺼어억.”

길게 트림을 하고 상인은 말했다.

“항주 인근에 있는 중소 문파의 무인들을 숱하게 구해 냈다고 하던데?”

“그래? 그럼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 아닌가?”

“그르치.”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상인은 말했다.

“그래서 장강에 이런 말이 돈다는 거 아닌가? 영웅맹과 맞설 자는! 창룡검주뿐이다아아. 이런 말.”

“그래? 그럼 그 창룡검주는. 끄윽, 지금 어디 있나?”

“어디이?”

잠시 생각을 더듬던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웃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이.”

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씨익 웃으며 상인은 그렇게 말했다.

***

덜컹.

마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졸고 있던 중년인은 눈을 떴다.

“아함.”

중년인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창밖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이쿠, 어느새 청원이니 광주도 금방이겠네. 으하하암.”

중년인은 찌뿌드드한 듯 이리저리 몸을 틀었다.

좁은 마차 안에서 그런 행동이 다른 승객들에게 반가울 리 없다.

중년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가씨는 인상을 찌푸리며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했다.

하지만 중년인은 본체만체하며 다른 승객들을 살폈다.

그리고 곧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발견했다.

“자넨 광주에 무슨 일로 가나?”

그가 말을 건 상대는 바로 허름한 문사 차림의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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