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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60화 (260/530)
  • 260화. 이탈

    운현은 신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놈 말이 맞다.”

    신승 불영이 말했다.

    콰앙!

    운현의 뺨으로 커다란 폭음이 스쳐 지났다.

    부서져 날아오르는 나무들의 파편과 흙더미 사이로 신승은 어둠 속을 쉬지 않고 뻗어 나갔다.

    “내 아집과 집착은 모두 무림맹에 있었다.”

    휙휙.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속에서 신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 무림맹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저놈은 그래도 인간의 도리를 지키겠다고 꾸역꾸역 돌아오는데, 나는 무림맹을 끌어안고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 말에 운현은 오히려 심한 자책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자신이야말로 아집과 교만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고집스레 돌아오지 않았던가?

    “저,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라 이 말이냐? 걱정 마라. 네놈이 그렇게 의도했건 않았건 간에 나는 네 행동에서 내가 보아야 할 것을 보았으니까.”

    신승 불영은 웃었다.

    휘릭.

    운현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신승이 갑자기 크게 방향을 꺾은 탓이다. 그리고 곧, 그들이 향하던 그 자리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콰아앙!

    “나는 중이다. 무림맹이니 어쩌니 하기 이전에 나는 중이란 말이다.”

    신승이 말했다.

    “그런데 내가 무림맹을 끌어안고 추잡한 짓을 하고 있었다. 마치 무림 맹주라도 된 양 뒤에서 일을 꾸미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그리고 너를 끌어들였다. 강호 무림을 위해서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주름진 신승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실은 앞으로 삼십 년간 네놈을 써먹을 계책도 이미 세워 뒀었느니라. 헐헐헐.”

    사뭇 즐거운 목소리로 불영은 말했다.

    “아주 재미있었지. 네놈으로 이런저런 강호 무림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은 말이다. 어떤 여아들과 엮어 볼까 생각할 때에는 아주 흐뭇하더구나. 아, 혹시 아홉 명이라도 감당할 수 있냐?”

    음담패설이라도 하는 양, 신승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흘러갔다.

    그 웃음소리는 곧 허탈하게 변했다.

    “하지만 꿈은 깨어야 하고, 재미있는 놀이도 끝낼 때가 있는 법이지.”

    어둠 속을 내달리며 신승은 운현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은 더 이상 무림맹의 신승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승려 불영일 뿐이었다.

    ***

    두 사람을 뒤쫓는 인태상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마음은 조급한데 생각처럼 신승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의 경공이 이런 경지에 올라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염가, 이 쓸데없는 놈.’

    문득 염중부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백보신권이 불영의 절기니 뭐니 하며 거창하게 늘어놓기만 하더니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었다.

    ‘돌아가면 내 이놈을…….’

    하지만 지금은 그 일을 곱씹을 때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서 달아나고 있는 신승의 뒷목을 잡아채는 것이 더 급했다.

    “검 늙은이야!”

    인태상은 지태상을 불렀다.

    “저놈을 멈추게 할 수 없겠느냐?”

    “쓸데없는 짓이다.”

    검옹 지태상의 대답은 간단했다.

    인태상도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벌써 몇 번 공격해 보았지만 불영은 교묘하게 그들의 공세를 피해 나갔다.

    그때마다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인태상은 속이 탔다.

    이런 식으로 추격전이 길어지는 것은 좋지 않다.

    자신들은 이 부근의 지리에 어두운 반면 신승은 손바닥 보듯 훤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신승이 어떤 술수를 부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지 않아.’

    인태상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것조차 상대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인지 모른다.

    으득.

    만옹 인태상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저들을 놓치면 문왕을 볼 면목이 없다.

    그리고 일대상인은 또다시 문왕에 대해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귀한 도련님, 문왕에게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서라아! 너 이노오옴!”

    만옹 인태상이 울부짖듯 외쳤다.

    ***

    항주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아직 녹림의 약탈이나 파괴는 없었지만, 항주를 빠져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은 그야말로 난리통이 따로 없었다.

    무림맹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부상자들로 시작된 탈출 행렬은 두려움을 느낀 항주 사람들이 합류하며 순식간에 늘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큰 싸움,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무림맹의 패배.

    사람들의 마음은 단번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밤이 찾아오는 중에도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막무가내로 항주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무림맹의 충격적인 모습은 그 공포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부상자들의 신음과 함께, 항주를 탈출하는 사람들의 행렬은 어둠 속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덜컹.

    “끄으으으.”

    수레가 덜컹거리자 짐짝처럼 쌓인 부상자들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삐를 쥐고 있던 사람도 피로에 찌든 얼굴로 묵묵히 수레를 몰 뿐이었다.

    수레에 실린 부상자들은 대부분 전열에 섰다가 큰 부상을 당했거나 혹은 무림맹으로 날아든 불화살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부상자들은 목숨이나마 건진 것을 감사해야 했다.

    흑창기마대의 말발굽에 밟혀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자들도 부지기수인 데다가, 부상자들 중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들조차 있었으니까.

    퍼엉.

    문득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 소리에 행렬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 소리도, 기척도 들리지 않자 행렬은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익.

    수레의 바퀴 축이 다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침묵 속에 행렬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콰아앙!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렬한 폭음이 행렬 한복판에서 터져 나왔다.

    “으아악!”

    “히히히힝.”

    놀란 말들이 발작하고 사람들은 혼비백산 흩어졌다.

    행렬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그 폭음은 요란한 기세와 함께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사실 엄청난 소리에 비해 피해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행렬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

    신승과 운현을 뒤쫓던 인태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콰앙.

    “아이쿠.”

    “으악!”

    뒤이어 폭음이 터지고 놀란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신승이 피난 행렬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이다.

    ‘저놈!’

    설마 피난민을 방패로 삼으려는 것인가 인태상이 의심하는 순간이었다.

    탓.

    신승은 행렬에서 튀어나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어찌하겠느냐?”

    으득.

    지태상의 물음에 인태상은 이를 갈았다.

    신승이 또 수작을 부린 것이다.

    휘릭.

    피난 행렬을 뛰어넘으며 인태상의 날카로운 시선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살폈다.

    운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신승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저것들을 전부 다…….’

    생각만으로도 인태상의 양손에 공력이 모였다.

    “아서라.”

    지태상이 그 심경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그놈이 저기 섞여 있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창룡검주를 죽여선 안 된다.

    그렇다고 멈춰서서 저 행렬을 조사할 수도 없다.

    휙, 휘릭.

    “저 땡중이 아직 그놈을 들고 있는 것이 확실하냐?”

    멀리 보이는 신승을 향해 경공을 펼치며 지태상이 물었다.

    “확실하다.”

    인태상이 말했다.

    이 거리에서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놈인지는…… 모르겠다.”

    조금 전 신승은 행렬 사이로 뛰어들며 요란한 폭음과 기세를 뿜어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때 인태상은 신승의 행동을 놓쳤다.

    “그럼 내가 확인하지.”

    지태상이 말했다.

    돌아가서 행렬을 살펴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인태상의 반응은 퉁명스러웠다.

    “그럼 다음 번엔 어쩌라고?”

    지태상이 없으면 추격은 더욱 힘들어진다.

    게다가 다음번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조금 전처럼 신승이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다면 인태상 혼자 어쩔 것인가?

    그때는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감히 이따위 도박을…….’

    그것은 말 그대로 도박이었다.

    운현의 목숨을 걸고 신승은 죽느냐, 사느냐의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으득.

    인태상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판단은 냉철하고 결단은 신속했다.

    “그대로 뒤쫓는다.”

    신승이 도박을 걸더라도 이번은 아니다.

    지금은 한 사람이 돌아가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승이 운명을 거는 건 아마도 두 태상 중 한 명을 떨어뜨린 후일 것이다.

    “네놈이 과연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는지.”

    저 멀리 보이는 신승의 뒷모습을 향해 인태상은 뱉듯이 말했다.

    “두고 보자.”

    반드시 신승을 붙잡겠다고 인태상은 결심했다.

    소림사라도 상관없다. 관부로 뛰어든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설령 세상 끝까지 도망간다 해도 반드시 잡고야 말리라고, 인태상은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바로 그때, 신승이 뚝 떨어지듯 아래로 내리꽂혔다.

    콰앙.

    또 다른 피난 행렬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흩어지고 흙먼지가 솟았다.

    “또 그 짓이냐!”

    퍼엉.

    솟아오르는 신승을 향해 인태상이 일권을 날렸다.

    그러나 거리가 멀었다.

    신승은 허공에서 교묘히 몸을 틀며 인태상의 권력을 피했다.

    아니, 이번엔 슬쩍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 얄미운 모습에 인태상은 다시금 이를 갈았다.

    그래도 아까보다 조금 가까워진 것을 확인하며 인태상은 경공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

    “어이구, 방금 그게 대체 무슨…….”

    폭음이 사라지고 소란이 잦아들자 흩어졌던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길 옆 진창으로 굴러떨어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난리통인지…….”

    사람들은 투덜거리거나 한숨을 내쉬며 행렬로 돌아왔다.

    조금 전 폭음이 대체 무슨 영문인지 궁금했지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데다 제대로 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끼이익.

    부상자들을 실은 수레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흔들림 탓인지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크윽.”

    수레 바닥에 누운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끔찍한 격통이 온몸을 내달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난폭하게 헤집고 돌아다니는 듯 했다.

    하지만 덕분에 정신은 완전히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승이 무엇이라고 했는지도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저 우연이다.

    전에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신승은 말했다.

    ―네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난 것도, 오늘 내가 널 구하게 된 것도 말이다. 그러니 복수도, 원한도 생각지 마라. 은혜라고도 여기지 마라.

    신승은 운현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우연히 스쳐 지나는 세상, 네 덕분에 잠시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이 신승 불영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운현은 본래 이곳에 누워 있던 누군가의 시신과 바뀌었다.

    신승 불영이 도박을 걸었던 곳은 첫 행렬이었던 것이다.

    끼이익.

    바퀴 소리가 신음처럼 들렸다.

    온몸을 찢는 고통 속에서도 운현은 생각했다.

    ‘가야 돼.’

    일어나서 가야 했다.

    피를 뿌리며 낙엽처럼 떨어지던 독고랑의 모습은 결코 악몽도, 환상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에 젖은 그 모습 그대로.

    신승 역시 두 태상에게 쫓기고 있다.

    그러니 가야 했다.

    가서 구하고 도와야 했다.

    하지만 운현의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못했다.

    덜컹.

    “커억.”

    작은 충격에도 온몸에 격통이 내달렸다.

    운현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팔에 힘을 주었다.

    끊어져 나가는 듯 아팠지만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이대로 있으면 더 멀어지고 말 테니까.

    끼익.

    그 순간, 운현은 흠칫했다.

    자신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 참혹하고 역겨운 자리에서, 그 무서운 곳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일말의 안도감이 번져 가는 것을 깨달은 순간, 운현은 욕지기가 치솟았다.

    ‘욱.’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역겨운 마음에 저항하듯, 운현은 고통을 참으며 손을 움직였다.

    턱.

    마침내 운현의 손이 수레 어딘가를 쥐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끼이익, 끼익.

    무심하게 흐르는 수레바퀴 소리와 함께 운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눈물은 곧 흐느낌으로 변했다.

    “흐윽, 흑, 끄흑.”

    두려움도, 고통도, 그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마저도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겉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과 함께 운현의 가슴도 텅 비어 가는 것 같았다.

    끼익, 끼익.

    “거, 아파도 좀 참게.”

    수레를 몰던 사람이 퉁명스레 말했다.

    우울한 피난 행렬에 울음소리까지 들리니 말투가 거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 아닌가? 다들 고생하는 판국에…….”

    하지만 다친 사람에게 너무했다 싶었는지 사내는 곧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괜찮아질 걸세. 쯧,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고개를 젓던 사내는 묵묵히 수레를 몰기 시작했다.

    끼익 끼익.

    수레바퀴 소리 사이로 운현의 나지막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수레를 몰던 사람은 이제 상관하지 않았다.

    옆에서 걷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있는 독고랑을 외면한 채, 고통과 무력함을 핑계로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끼익, 끼익.

    운현은 수레 바닥에서 숨죽여 흐느꼈다.

    그렇게 피난 행렬은 항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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