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별리(別離)
운현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던 그때.
독고랑은 언제라도 두 태상의 공세 앞에 자신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록 그것이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하는 무의미한 행동이라 해도 말이다.
그러나 독고랑은 자리를 지켰다.
그것은 어느 순간 그에게 날아온 전음 때문이었다.
그 전음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독고랑은 모든 행동을 멈췄다.
눈앞에서 운현이 쓰러지는 것도,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하는 것도 독고랑은 감내했다.
저들이 쓰러진 운현을 발로 툭툭 차는, 가슴이 무너지는 그 광경 앞에서도 독고랑은 침묵했다.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단 한 순간의 행동을 위해.
“어서 꺼지라니까!”
인태상의 고함 소리에 반응한 것은 독고랑이 아니었다.
“헐헐.”
문득 들려오는 짧은 웃음소리에 인태상과 지태상의 표정이 변했다.
지태상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인태상은 일그러진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젠장.”
인태상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전력을 다한 싸움 끝에 오는 허탈감, 그 허술해진 마음을 틈타 가장 우려하던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꺼지라면 꺼져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주름 가득한 늙은 승려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받을 것은 받아야 가지. 안 그런가? 헐헐헐.”
너털웃음을 흘리는 늙고 구부정한 그 승려는 바로 신승이었다.
문왕이 가장 경계했던 또 다른 한 사람, 신승 불영이 두 태상 앞에 나타난 것이다.
“신승…….”
인태상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염중부의 말을 떠올렸다.
“불영 말이오?”
문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염중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늙은이가 왜 신승으로 불리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수양이 깊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오.”
쓴웃음을 지으며 염중부는 말을 이었다.
“불영을 상대할 때 가장 까다로운 건,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 없다는 거요. 백보신권이 불영의 절기라곤 하지만 정사대전 때 백보신권을 펼친 건 기껏 두세 번이 다요. 사실 불영의 진짜 절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요.”
“흠.”
문왕이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자기 패를 절대 안 보여 주는 자로군.”
“아니, 보여 주긴 하오.”
염중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허실을 아주 절묘하게 섞는다는 데 있소. 분명히 허초인데 승부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절기조차 양동으로 쓰기를 주저 않으니 말이오. 그러니 어찌 허실을 구분할 수 있겠소?”
씁쓸한 표정으로 염중부는 중얼거렸다.
“모르겠소. 어쩌면 내가 이리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영의 술수에 걸려든 것인지도…….”
말하던 염중부가 얼굴을 굳혔다.
“어쨌건 불영을 마주치지 마시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전부요.”
“쯧.”
또 한번 혀를 찬 인태상이 신승에게 무어라 하려 했을 때였다.
후우우욱.
엄청난 기세가 순식간에 신승 앞에 모여들었다.
‘이, 이놈.’
인태상의 눈앞에서 폭풍처럼 신승의 승복이 흔들리더니, 곧 앙상한 주먹이 두 태상을 향해 내질러졌다.
“하아!”
콰아앙.
무시무시한 강기가 두 태상을 향해 쏘아졌다.
아무런 기술도, 변화조차도 없는 단순한 정권.
그러나 그 일권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절대의 권격이었다.
‘큭!’
만옹 인태상도, 검옹 지태상도 그것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아니, 몰라볼 수가 없었다. 바로 신승 불영의 절기 백보신권이었다.
그러나 인태상을 놀라게 한 것은 백보신권 자체가 아니었다.
“이놈아! 미쳤느냐!”
신승의 백보신권은 두 태상뿐 아니라 쓰러져 있는 운현까지 박살 내려는 듯 짓쳐 들고 있었다.
탓.
인태상은 급히 쓰러져 있는 운현을 낚아채고 몸을 날렸다.
백보신권의 진로 앞에서 벗어난 인태상은 화를 냈다.
“이 미친 늙은이가 앞뒤 분간도 못 하는구나!”
그러나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신승은 반짝 눈을 빛내며 손을 폈다.
“타아!”
기합 소리와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보신권의 강기가 순간 다섯 가닥으로 갈라진 것이다.
마치 쥐었던 주먹을 펴는 것처럼 말이다.
파바바박.
‘헉!’
인태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피한 줄 알았던 백보신권이 다섯 가닥으로 갈라져 인태상과 지태상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큭.’
이 일격을 피할 수 없음을 인태상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급히 운현을 놓아 버리고 두 손을 교차시켰다.
카카강.
인태상의 코앞에서 충격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헐헐, 어떤가? 옥애발휘의 맛이.”
신승의 넉살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신승은 말했다.
“제법 섬뜩했지?”
신승은 웃었다. 그리고 인태상의 얼굴은 구겨졌다.
“이, 이 늙은이가…….”
으드득.
인태상은 이를 갈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자신이 놓아 버린 운현은 이미 독고랑의 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백보신권의 강기와 몰아치던 기세들 사이로, 독고랑이 서슴없이 몸을 던졌던 것이다.
***
독고랑은 주저하지 않았다.
만일 잠시라도 머뭇거렸다면 인태상이 운현을 놓는 그 한순간을 잡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짓쳐드는 백보신권의 무시무시한 강기도, 사방으로 갈라지는 기세들도 그에겐 아무 두려움이 되지 못했다.
비록 신승의 전언이 있었다지만 독고랑은 백보신권의 강기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어쩌면 사실이었다.
독고랑에게는 오직 운현만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탓.
운현을 되찾은 독고랑은 즉시 신승에게 몸을 날렸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찰나뿐이었다.
“으윽. 도, 독고 제…….”
운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아마도 거듭되는 충격에 정신을 차린 것이리라.
독고랑에게 그것은 하늘이 허락한 한순간이었다.
“운 대인.”
파라라락.
푸른 달빛 아래 날아내리며 독고랑은 미소를 지었다.
운현을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독고랑이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마치 찻잔을 앞에 두고 서로 한담을 나누듯,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한 표정이었다.
***
“너, 너 이노오오옴!”
인태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신승의 난입을 허용하고 예기치 않은 변칙 공격에 그만 당황해 버렸다.
한순간의 실수였지만 그 결과는 컸다.
애써 잡은 운현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뻔히 보고 있을 인태상이 아니다.
탓.
인태상은 즉시 땅을 박차고 독고랑을 향해 날아올랐다.
“서라!”
인태상의 손이 갈퀴처럼 독고랑을 향해 뻗어 나갔다.
혹 짓쳐 들지 모를 신승의 공세를 대비하여 인태상은 다른 한 손에 막강한 내력을 실었다.
우우웅.
독고랑의 등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운현은 비몽사몽 같은 중에 독고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다니……. 대체 무슨…….’
운현은 독고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충격에서 회복되지 못한 운현은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휙.
독고랑이 운현을 허공으로 밀어냈다.
정신이 혼미한데 세상까지 빙글빙글 돌자 운현은 지독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어지러움은 길지 않았다.
팍.
누군가 운현을 받아 들었다.
깡마른 팔이었지만 그 움직임이 사뭇 조심스러움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이쿠, 이놈. 아주 묵직하구나. 헐헐.”
귀에 익은 그 목소리는 바로 신승의 것이었다.
탓.
신승은 운현을 받아 들자마자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쉬익.
지태상의 검이 신승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인태상이 독고랑을 향해 몸을 날린 순간 지태상은 신승을 향해 짓쳐 든 것이다.
그러나 신승은, 그야말로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지태상의 검을 벗어났다.
콰아앙.
지태상의 검이 헛되이 대지를 울렸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놈드으으을!”
인태상은 분노로 외쳤다.
그는 독고랑이 운현을 들고 도주하고, 신승이 자신들을 막아설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신승은 막아서기는커녕 전력으로 도주해 버렸다.
독고랑에게서 운현을 받아 들고서 말이다.
어쩌면 당연히 알아차렸어야 했다. 진작 예측했어야 옳았다.
신승이 자신들을 막을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못한 이상 결론은 도주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운현을 데리고 피해야 하는가?
당연히 신승이다.
백보신권과 그 현란한 기세들, 그리고 목숨을 돌보지 않는 독고랑의 행동까지 모든 것이 속임수였던 것이다.
“감히이!”
인태상은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를 담은 일권을,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독고랑의 등을 향해 내질렀다.
콰직.
분노가 서린 인태상의 주먹은 무자비했다.
그 일권은, 오직 운현을 신승에게 건네는 것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던 독고랑의 등을 그대로 뭉개 버리고 말았다.
“크헉!”
독고랑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단 일권으로 독고랑의 눈은 초점을 잃었다.
그 광경은 신승에게 안겨 이곳을 벗어나던 운현의 눈에도 똑똑히 들어왔다.
가슴이 박살 난 채 피를 뿜으며 땅으로 추락하는 독고랑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독고 제!’
운현은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독고랑의 모습도 순식간에 수풀 사이로 멀어져 버렸다.
파바박.
시커먼 나무 그림자들이 쏜 화살처럼 지나가고 멀어졌다.
사방을 뒤덮은 어두움 속에, 운현은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독고 제…….’
그건 끔찍한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악몽이었을까?
서서히 머리가 맑아지면서 단편적으로 기억이 떠올랐다.
무림맹 탈출과 추격, 철혈사왕, 두 명의 태상, 그리고 피.
순간 격렬한 통증이 아랫배에서 느껴졌다.
“크윽.”
“헐헐, 이제 정신이 드냐?”
귓가에 신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거의 없었다.
“도, 독고…….”
목소리 대신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놈은 걱정 마라.”
담담한 목소리로 신승이 말했다.
“자기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
그 말에 운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짐짓 무심한 듯 말했지만 신승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다.
“도, 돌아…….”
간신히 새어 나온 그 목소리를 신승은 알아들었다.
“안 된다.”
신승은 단호히 말했다.
“도망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도박이다.”
휙, 휘릭.
어두운 나무 그림자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뒤로 지나갔다.
그리고 곧 커다란 목소리가 뒤쪽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너 이노오옴! 게 서지 못하겠느냐아아아!”
인태상의 외침은 그저 말만이 아니었다.
곧 무시무시한 기운이 뒤에서부터 두 사람을 덮쳐 왔다.
콰앙.
공격은 정확했지만 신승의 경공은 그보다 더 절묘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면서 신승은 최단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신승이 이 정도의 경공을 구사한다는 것은 이제껏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두 태상과 신승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크윽.”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아랫배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통증에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나 말이냐?”
신승은 잠시 말을 멈췄다.
사실 대화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도주로와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신승 불영이다. 아홉 사람과 쟁론하여 모두 이겼던 구면쟁론의 괴승.
“왜 왔겠느냐? 해탈하러 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