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싸움의 끝
―허어, 저놈 눈깔 보게.
인태상은 전음으로 지태상에게 투덜거렸다.
―저런 어린놈이 대체 어떻게 네 검을 막아 낼 수가 있는 거냐?
―심안이다.
검옹 지태상이 전음으로 답했다.
―심안?
인태상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심안이라니, 설마…….
―그래.
지태상은 담담하게 전했다.
―아무래도 이 아이는 ‘흐름’을 보는 듯하다. 상인께서 그러하시듯이.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인태상의 권격을 비틀어 버린 것이나 지태상 자신의 일검을 막아 낸 것까지 말이다.
―젠장, 어디서 이런 놈이.
인태상이 혀를 내두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운현을 노려보던 인태상이 문득 말했다.
―검 늙은이야. 무슨 방법이 없겠냐?
―없다.
지태상의 대답은 일말의 주저함조차 없었다.
인태상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검에 미친 너조차 방법이 없다고?
―그래.
검에 미친 검옹이기에, 그래서 지태상은 더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현의 저 검로를 부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그럼 대체 누가…….
―너다.
지태상이 전음으로 말했다.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네가 해야 한다.
그 전음에 인태상은 놀라 지태상을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태상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덤덤하기만 했다.
“허.”
인태상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검옹 지태상의 말대로였다.
방법은 자신이 찾아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이야말로 하늘을 속이는 자, 만천자(瞞天子) 만옹 인태상이 아니던가?
“해야 한다면 바로 내가 해야겠지. 클클클.”
인태상이 웃자 운현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두 태상의 분위기가 변한 것은 운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아!”
인태상이 크게 소리치며 운현에게 짓쳐 들었다.
운현은 즉시 검을 그어 내렸다.
카앙.
맨주먹과 칼날 사이에서 쇳소리가 났다.
그 권격이 이전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것을 운현은 알 수 있었지만, 뒤이어 짓쳐 든 지태상의 검은 운현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쿵, 쿠구궁, 콰앙.
검옹 지태상의 검은 여전히 묵직했다.
인태상의 현란한 권격과 지태상의 무거운 검격이 어우러지니 운현조차 한 치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놈아! 이제 이 짓도 슬슬 질리지 않느냐?”
현란한 권격을 몰아치며 인태상이 말했다.
잠시 멈추었던 그의 수다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밤새도록 드잡이질을 할 수도 없지 않느냐? 넌 젊어서 괜찮겠지만 난 벌써 팔다리가 쑤신단 말이다. 아이구.”
운현은 대답 대신 미명을 크게 그어 올렸다.
“어이쿠, 그러다 사람 다칠라.”
만옹 인태상은 허공에서 가볍게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시야에 문득 독고랑의 모습이 들어왔다.
살벌한 눈빛으로 이를 악물고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그 기세가 마치 날 선 한 자루의 검 같은 사내다.
‘저놈을 이용해 볼까?’
그러나 인태상은 곧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독한 놈, 눈빛하고는.’
인태상은 알 수 있었다.
만일 자신이 독고랑을 인질로 잡는다면, 독고랑은 그 즉시 스스로 목을 그어 버릴 인물이라는 것을.
“살살 해라, 살살 해. 클클클.”
카강, 쿠구궁.
권격과 검격, 미명의 검로가 현란하게 어우러졌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소나기 같은 권격을 날리며 인태상은 생각했다.
그의 권격은 미명에 헛되이 가로막혔지만 어차피 가볍게 날린 것이라 별 기대는 없었다.
물론 아무리 가벼워도 상대를 즉사시킬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말이다.
쾅.
‘저놈이 이놈을 데려왔었지?’
자신이 쫓던 기척은 둘이었다.
그러나 경공술은 한 사람만 펼쳤다.
처음엔 무심코 넘어갔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이미 발각된 상태에서 굳이 경공술을 펼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후우우웅.
운현의 검 미명이 인태상의 코앞을 가르고 지나갔다.
“어이쿠, 노인네 다 죽는다. 이놈아!”
말은 장난스러웠지만 인태상의 등에는 오한이 스쳤다.
자신을 이토록 몰아넣은 자가 상인 외에 누가 또 있었던가?
‘이 정도의 재주를 가진 놈이, 경공을 안 한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인태상의 뇌리를 스쳤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뿐일지도 몰랐다.
휘릭.
행동은 빨랐다.
인태상은 즉시 몸을 뒤로 빼냈다. 그 빈자리를 메우듯 검옹 지태상의 검격이 쏟아졌다.
쿵, 쿵, 쿵.
하나하나가 엄청난 내력을 담은 검격들. 운현은 침착하게 그 검격들을 흘려 냈다.
그때였다.
“이놈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태상이 외쳤다.
그는 운현을 보며 빙긋 웃었다.
“선물이다. 받아라.”
탁, 퍽.
발로 무엇인가를 밟아 끊어 낸 인태상은 그것을 가볍게 차올렸다.
버려진 횃불과 죽은 황천대 무사들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그곳에서, 둥근 물체가 운현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
인태상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건 운현도 알고 있었다.
말이 없어졌다가 다시 수다스러워진 것과 한결 가벼워진 권격들,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인태상이 몸을 빼냈을 때도 운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 새로운 공격을 해 올 것을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자신 있었다.
그 어떤 무공이건 간에 자신의 검 미명은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태상이 차 날린 것은 운현의 예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휙.
그것을 본 순간 운현은 경악했다.
검옹 지태상의 무거운 검격을 거둬 낸 운현은 반사적으로 미명을 그어 내렸다.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죽은 자의 얼굴을 향해.
촤아악.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운현은 그것을 그대로 덮어쓸 수밖에 없었다.
“클클클, 우하하하하.”
만옹 인태상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네놈 같은 괴물이 죽은 머리통 따위에 겁을 내?”
인태상은 불길처럼 눈빛을 이글거리며 외쳤다.
“이제 보니 헛것이었구나! 겉만 번지르르한 놈이었어! 으하하하하!”
만옹 인태상은 마음껏 웃어 젖혔다.
운현은 흐르는 피와 뇌수를 닦지도 못한 채 이를 악물었다.
저들이 드디어 운현의 약점을 알아낸 것이다.
‘결국…….’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운현이 자신 있는 것은 비무이지, 싸움이 아닌 것이다.
“크하하하! 이런 어이없는 놈을 보았나. 으하하하.”
인태상이 둥근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때부터 싸움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카가가강.
“이놈아! 느낌이 어떻더냐? 네 검이 뼈와 살을 가를 때 그 감촉이 어떠하더냔 말이다!”
인태상의 목소리가 음공을 실은 채 쩌렁쩌렁 울렸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얼굴에 달라붙은 죽은 자의 피와 육편이 집중을 방해했다.
“오싹하더냐? 무섭더냐?”
쿵, 쿠궁, 콰아앙.
운현의 미명은 두 태상의 합공을 여전히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열세는 확연했다.
가끔씩 인태상이 날려 보내는 죽은 시신의 신체 일부들 역시, 운현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였다.
“아니면 짜릿하더냐?”
인태상의 눈빛이 비릿하게 번뜩였다.
그의 말은 운현에게 끔찍한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무림맹 누각에서 보았던 그 참혹한 살육의 현장들.
피가 튀고 시신들이 말발굽 아래 짓밟히던 모습이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욱.’
코끝에 느껴지는 비릿한 피 냄새.
운현은 순간 욕지기가 치솟았다.
그 순간, 물 흐르듯 이어지던 운현의 검로가 흔들렸다.
빠르든 늦든 찾아왔을 단 한 번의 실수.
그 실수가 싸움의 승패를 결정지어 버렸다.
휘리릭.
미명의 검로가 멈칫한 사이, 인태상의 뚱뚱한 체구가 바람처럼 운현의 코앞으로 흘러 들어왔다.
인태상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잡았다.”
쿠웅.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운현의 온몸에 고통이 내달렸다.
만옹 인태상의 일권이 운현의 하복부를 거침없이 유린하고 있었던 것이다.
쩍.
세상이 깨지는 듯한 격통 속에 운현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우드득.
인태상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더욱 깊이 박아 넣었다.
운현의 눈앞에서 세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
털썩.
운현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북해의 검, 미명은 여전히 손에 쥐어진 채였지만 운현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 후였다.
“괴물 같은 놈.”
인태상이 운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운현을 쓰러뜨렸지만 인태상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했다.
저벅.
지태상이 검을 거두고 쓰러진 운현에게 다가왔다.
운현을 잠시 내려다보던 지태상이 말했다.
“꼭 이리해야 했는가?”
“그럼 어떻게 하라고?”
인태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단전이라도 안 부수면 어떻게 이놈을 데려간단 말이냐? 잘못하다간 내가 죽게 생겼는데 누구 사정을 봐줘?”
인태상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지태상의 눈빛은 여전히 탐탁잖은 듯했다.
이런 방법으로 상대를 흔드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 승부가 끝나는 것도 지태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완전히 부숴 버렸나?”
미련이 남은 듯 지태상이 물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불필요한 물음이었다.
만옹 인태상의 정권에 맞고도 무사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내가 죽을 뻔했다는 건 신경도 안 쓰냐? 자, 봐라. 이 늙은이야!”
슥.
인태상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때에 맞지 않는 허연 서리가 가득 덮여 있었다.
“……한기?”
“그래, 이놈아!”
인태상은 인상을 구겼다.
“완전히 부쉈냐고? 암, 완전히 부서졌겠지. 다른 놈이라면 말이다!”
쓰러진 운현을 내려다보며 인태상은 말을 이었다.
“있는 대로 내력을 다 때려 박았다. 단전을 아주 박살 내려고. 그랬더니 어땠는지 아냐?”
인태상이 이를 갈았다.
“순식간에 온몸에 한기가 들더라. 그대로 조금만 더 있었다면 분명히 내가 먼저 죽었을 거다.”
운현의 단전에 일권을 박아 넣은 순간 인태상을 덮친 것은 섬뜩할 정도로 거대한 한기였다.
아니, 그것은 이미 공포였다.
만일 인태상이 조금만 더 늦게 손을 거뒀더라면 이 자리에 죽어 넘어진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한기라…….”
지태상은 운현이 자신의 일검을 받아 냈을 때를 떠올렸다.
그 엄청난 내력, 그리고 번져 가던 하얀 서리는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빙한기공을 익혔나?”
운현을 내려다보는 지태상에게 인태상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단전은 아마 부서졌을 게다. 하지만 절대로 이놈을 깨우지 마라.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니까.”
인태상의 목소리엔 감정이 잔뜩 실려 있었다.
“어쨌거나 잡았으니 어서 도련님께 데려가자.”
인태상은 쓰러진 운현을 발로 툭 쳤다.
그러자 죽은 듯 쓰러져 있던 운현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어이쿠, 이 독한 놈 보게. 벌써 깨어나려고?”
인태상이 혀를 내둘렀다.
“단전이 아니라 아예 아랫배에 구멍을 뚫어 놔도 팔팔하겠구나. 이 괴물 같은 놈.”
투덜거리던 인태상은 문득 자신을 향한 시선을 알아차렸다.
“얼씨구?”
고개를 돌린 인태상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독고랑이었다.
“넌 왜 여태 거기 서 있냐? 어서 꺼져라! 콱 죽여 버리기 전에!”
짐짓 윽박지르듯 인태상이 말했다.
하지만 인태상은 물론 지태상도 독고랑에게 손을 쓸 마음은 없었다.
그것은 엄청난 싸움을 끝낸 뒤에 찾아오는 일종의 허탈감 같은 것이었다.
이제 그들의 일은 끝난 것이다.
그러나 독고랑에게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