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검옹 지태상
훅.
인태상은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와 동시에 인태상의 주먹이 폭풍처럼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쾅, 콰과광.
“아주 제법이야. 너 같은 놈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연신 권격을 퍼부으며 인태상은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인태상의 눈빛은 완연한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지금도 빗발치고 있는 그의 권격을 운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막아 가고 있었다.
현란한 검로도, 엄청난 빠르기도 없었다.
그저 조금씩 검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운현은 인태상의 권격을 모조리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두 사람이 합을 맞췄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콰과광, 쾅, 쾅.
“클클, 할 줄 아는 것이 그저 막아 내는 것뿐이더냐? 어디 더 보여 봐라!”
후우우우욱.
인태상의 눈이 빛나더니 곧 엄청난 기세가 그의 주먹에 모여들었다.
운현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미명을 그어 올렸다.
인태상의 권격과는 전혀 동떨어진 검로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 검로가 끝나는 순간.
쿠웅.
육중한 충격이 주변을 울렸다.
운현의 검 미명은 인태상의 권격을 완벽하게 막고 있었다.
아니, 인태상의 권격이 운현의 검에 가 닿은 것이다.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흘, 이놈.”
인태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대체 어찌한 거냐?”
그의 권격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운현은 막았다.
그것도 한순간의 임기응변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쉭.
운현은 대답 대신 미명을 그어 내렸다.
“어이쿠!”
휘릭.
인태상이 몸을 뒤로 뺐다.
“성격 한번 까칠한 놈일세.”
장난처럼 웃으며 인태상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가느다란 눈가에는 섬뜩한 살기가 완연히 묻어나고 있었다.
“대답도 안 하냐? 아주 못된 놈이로고.”
빈정이 상한 듯 인태상이 이죽거렸다.
“뭐, 어차피 잘됐다. 요즘 몸도 찌뿌드드하던 차이니…….”
인태상은 두꺼운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연이는 권격이 모두 무산되었음에도 인태상의 표정은 느긋하기만 했다.
“한번 놀아 보자꾸나!”
파라락.
인태상의 뚱뚱한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 폭풍처럼 그의 권격이 쏟아져 내렸다.
쿵, 콰광, 쿠웅.
검과 주먹 사이에서 폭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독고랑은 이를 악문 채 운현과 인태상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하는 자신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슥.
독고랑은 다른 한 노인, 지태상을 보았다.
지태상은 석상처럼 묵묵히 운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마치 불꽃처럼 일렁였다.
콰앙.
“허, 이놈아. 이런 신기한 재주는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인태상이 장난스레 말하며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우습기까지 한 자세였지만 뒤이어 쏘아지는 그의 권격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콰콰쾅.
“어이쿠, 손뼈가 아주 저릿저릿하구나. 이왕이면 좀 더 세게 해라. 그래야 내 손이 부러지지.”
인태상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 목소리가 그저 수다가 아님을 독고랑은 알 수 있었다.
‘……음공(音功).’
인태상의 음성에는 강한 내력이 실려 있었다.
그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귀를 울리는 것도, 거친 쇳소리처럼 거슬리다가 이제는 머리마저 아파 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독고랑마저 그러하니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 운현은 어떠하랴?
운현이 아까부터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는 이유를 독고랑은 알 수 있었다.
“크하하! 이놈아! 정신 차리지 못하겠느냐!”
카앙.
인태상은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운현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미명의 칼날이 먼저 인태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차이였다.
“어이쿠, 이놈. 조심하거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인태상은 한순간 고민했다.
공방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운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비록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때였다.
“타하!”
인태상이 마음을 정했다.
콰과곽.
강맹한 일권을 내지르며 인태상이 그대로 운현의 미명을 돌파하려는 순간이었다.
웅.
운현의 미명이 울었다.
자신의 주먹에 미명이 스치듯 가 닿은 순간, 인태상은 눈앞이 빙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헉.’
하늘과 땅이 단번에 뒤집어지고 있었다.
“하아아!”
인태상은 즉시 기합을 터트리며 전력을 끌어 올렸다.
쿵.
그의 두 발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대지를 디뎠다.
그리고 그것은 인태상의 위치가 정확히 고정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쉭.
운현의 검, 미명이 인태상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인태상은 생각할 틈도 없이 두 손을 들어 올려 교차시켰다.
단 한 번의 판단 착오가 불러온 돌이킬 수 없는 결과.
큰 손해를 입을 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후우우욱.
바로 그때, 허공에서 거대한 기세가 운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운현은 즉시 미명을 되돌렸다.
쉬익.
미명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거대한 기세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쨍.
그것은 마치 거울이 깨지는 듯 날카로운 소리였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뒤를 이었다.
쿠우우웅.
숲이 울리고 대지가 진동했다.
독고랑은 물론 인태상조차도 그 충격을 견뎌 내기 위해 몸을 낮춰야 했다.
“으윽.”
낮은 신음을 흘린 독고랑은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기세의 정체는 바로 지태상이었다.
오직 검에만 미친 자, 검옹(劍翁) 지태상.
그가 단 한 순간을 노리고 자신의 검과 함께 떨어져 내리며 운현을 내려찍은 것이다.
그야말로 땅이 울리고 숲이 떠는 회심의 일격.
그러나 그 일격은 운현의 검 미명의 칼끝조차 넘어서지 못했다.
우우우웅.
깃발처럼 솟아오른 미명의 칼끝은 검옹 지태상의 검 끝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맙소사.’
만옹 인태상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참으로 괴이한 광경이었다.
마치 운현이 들어올린 것처럼, 지태상과 그의 거검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츠즈즈즈.
운현의 발밑으로 하얀 서리가 번져 갔다.
“이노옴!”
콰과곽.
뚱뚱한 인태상은 즉시 운현을 향해 권격을 날렸다.
사박.
운현은 옆으로 물러서며 인태상의 권격을 흘려 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검옹 지태상은 땅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턱.
커다란 검옹 지태상도, 뚱뚱한 만옹 인태상도 말이 없었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괴물 같은 놈.’
잠깐이었지만 검옹 지태상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미명의 검 끝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운현을 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락.
그사이, 옆으로 물러섰던 운현은 자세를 잡았다.
한 손으로 미명을 비스듬히 늘어뜨린 채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호흡조차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왜 그러시지요?”
담담한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다.
“저를 데려가겠다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래.”
인태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우리와 함께 가게 될 거다. 반드시!”
탓.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태상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며 일권을 내질렀다.
그 뒤로 지태상의 검이 운현을 노리며 날카롭게 번득였다.
두 태상과 운현의 격돌이 시작된 것이다.
쾅, 쿠웅, 카앙.
검광이 번득이고 충격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두 태상의 협공으로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니, 이제야 진짜로 시작되고 있었다.
***
쿠웅.
주위를 울리는 폭음에 철혈사왕 염중부는 혀를 내둘렀다.
‘괴물 같은 놈.’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염중부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만옹 인태상과 검옹 지태상을 상대로 운현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두 태상의 합공을…….”
자신은 지태상의 공격을 채 십 초도 받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운현은 두 태상 앞에서도 전혀 다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끔씩 두 태상을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염중부라면 동귀어진을 각오해야 하는,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가까이 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태상을 둘이나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켜보는 염중부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이상한걸?’
철혈사왕 염중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괴다.
그는 지금 이 승부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
‘놈이 왜 저러지?’
그의 시선은 운현을 향해 있었다.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지극히 작은 격차가 가져오는 결과는 잔혹하리만치 절대적이다.
물론 한순간의 방심을 틈탄 암습이나 독, 암기 같은 예외 상황들이 있지만 고수들의 정면 승부라면 결과는 늘 둘 중의 하나다.
승부를 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승패가 갈리거나.
지금 같은 경우라면 진작에 운현이 이겨야 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싸움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팽팽한 접전을 이어 가고 있었다.
두 태상의 폭풍 같은 합공을 운현이 막아 내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혹시 시간을 끌려는 것인가?’
쿵, 카앙, 쿠궁.
지태상의 거검과 인태상의 권격이 현란한 기세를 뿜었다.
그리고 운현의 미명이 그리는 부드러운 검로는 그들의 공세를 완벽하게 무산시키고 있었다.
“허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모습에 염중부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곧 분노와 질투심으로 이를 갈았다.
아드득.
그것은 어쩌면 아주 익숙한 감정이었다.
오랜 숙적인 신승 불영과 평생의 벽이었던 검성,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운현을 통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후욱, 쿵.
충격음이 숲을 울렸다.
운현을 바라보는 염중부의 눈동자는 불길 같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
휘릭.
인태상과 지태상이 거리를 벌렸다.
운현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자세를 바로했다.
슥.
‘놀랍군.’
두 태상만큼이나 운현도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펼쳐 낸 것은 만년빙정이 보여 준 북해의 검이다.
설령 암천무제라 할지라도 이 검을 받아 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운현은 확신했다.
하지만 이 두 노인은 북해의 검을 버텨 냈다.
뿐만 아니라 지금껏 쉬지 않고 권격과 검격을 날렸다.
만일 이 자리에 또 한 명의 태상이 있었다면 결과는 장담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과연 독선께서 피하라고 하실 만해.’
뚱뚱하고 키 작은 노인, 인태상의 권격이나 몸놀림도 놀라웠지만 크고 장대한 노인, 지태상의 첫 일검은 운현조차 경악할 정도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이탈해야 했다.
‘허나.’
이 두 사람 앞에서 등을 돌려 도망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 없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기다리면, 때는 온다.’
시간은 운현의 편이 아니지만 성급한 판단은 더욱 최악의 결과를 부를 뿐이다.
우웅.
미명을 세우며 운현은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