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만옹 인태상
“문제는.”
휙, 휙.
귓가를 스치는 날카로운 파공음을 들으며 운현은 말했다.
“염중부에게 삼태상이 속아 넘어갈 것인가 하는 점인데…….”
말하던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틀렸군.”
“네?”
독고랑의 반문에 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오고 있네.”
으득.
독고랑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을 다해 펼치고 있던 경공이었지만 독고랑은 한층 더 내력을 끌어 올렸다.
파바밧.
이제 독고랑의 빠르기는 스스로 제어하기 힘들 정도였다.
스치는 나뭇가지들은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독고랑을 스쳐 지나갔다.
독고랑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늘어가고, 운현 역시 작은 상처들이 생겼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을 말하지 않았다.
어두운 숲속을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대인.”
“나도 보이네.”
어둠 사이로 불빛이 보였다.
피할 것인지 아니면 마주칠 것인지 결정해야 할 때였다.
“혹시 소림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고랑의 말대로 될 확률이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운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우회하기는 늦었다.
“그리하세.”
운현이 말했다.
독고랑은 불빛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파밧.
불빛이 가까이 다가오며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들이 무림맹에서 같이 탈출한 문파라는 의미였다.
‘설마 진짜로 소림인가?’
운현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삭.
수풀이 열리고 횃불들 가운데 운현과 독고랑이 내려앉았다.
탁.
그와 동시에 시퍼런 칼날이 두 사람을 향해 짓쳐 들었다.
쉬익.
독고랑은 운현을 안은 그대로 즉시 몸을 뒤틀었다.
휘릭, 탁.
칼날은 허공을 갈랐다.
뒤로 물러난 독고랑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대인.”
독고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목세가와 남해검문의 제자들이었다.
횃불을 든 황천대가 포위하며 접전을 벌이고 있는 곳 한가운데, 독고랑과 운현이 뛰어든 것이다.
“괜찮네. 자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운현은 얼른 독고랑의 품에서 벗어났다.
저벅.
단목세가와 남해검문 사람들도 그제야 운현을 알아보았다.
특히 검을 날렸던 단목세가의 대제자, 단목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언가 숲에서 날아들기에 반사적으로 검을 날렸는데 알고보니 같은 무림맹 사람인 듯하지 않는가?
“운 서기님!”
낭랑한 그 목소리는 조용해진 주위에 똑똑히 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난히 또렷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남해검문의 황보선혜였다.
바로 그때였다.
쉬익.
뒤에 서 있던 황천대 중 한 무사가 독고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독고랑은 즉시 검을 뽑았다.
서걱.
쇳소리는 나지 않았다.
황천대 무사가 휘둘렀던 검이 그대로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독고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황천대 무사를 노려보았다.
우우우웅.
푸른 검기가 일렁이는 독고랑의 검, 흐트러진 머리와 나뭇가지가 남긴 날카로운 상처들, 그리고 귀화처럼 일렁이는 섬뜩한 눈빛.
황천대 무사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 것도 당연했다.
그사이, 남해검문의 누군가가 운현을 불렀다.
“운 학사님.”
그는 파진한이었다.
무림맹에서 그를 보지 못했던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파진한 대협.”
생각해 보면 무림대회에 그가 안 나왔을 리 없으니 아마도 길이 엇갈린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인사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철혈사왕이었습니까?”
운현의 물음에 파진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
어찌 된 상황인지 운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파진한 뒤쪽,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며 다른 제자에게 업혀 있는 사람은 바로 남해검문의 문주였다.
단목세가의 가주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중상을 입은 가주와 함께 탈출하던 이들이 황천대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리라.
“그래도 다행입니다. 천운으로 운 학사님을 만났으니…….”
“아닙니다. 우리 역시…….”
운현이 고개를 저으며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으하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숲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큭.”
파진한이 급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단목세가의 대제자 단목기는 물론 황보선혜도 귀를 막았다.
“과연! 네가 운현이었구나.”
파라라락.
바람 소리와 함께 두 노인이 내려섰다.
작고 뚱뚱한 만옹 인태상과 큰 키에 긴 수염을 기른 지태상이었다.
저벅.
웃음을 머금은 인태상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왜? 더 도망가지 않고?”
그 모습은 마치 인자하고 익살스러운 할아버지 같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빛나는 기운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태, 태상님!”
황천대 무사들이 급히 예를 표하려 했다.
그러나 인태상은 귀찮다는 듯 휙 손을 내저었다.
후욱.
예를 표하려던 황천대 무사들은 움찔하며 물러섰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밀어낸 것이다.
“물러나라. 번잡하다.”
인태상이 마뜩찮은 듯 말했다.
그에게 황천대는 그저 방해에 불과했다.
황천대 무사들은 즉시 명에 복종했다.
사사삭.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수십 명의 황천대 무사들이 물러났다.
그와 함께 주위를 밝히던 불빛도 사라지고, 쓰러진 시체들과 땅에 떨어진 횃불들만이 남았다.
“이, 이게 대체…….”
단목세가의 대제자 단목기가 당황스러워하는데 운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여러분도 피하십시오.”
파진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괜찮겠소?”
단목기가 파진한에게 물었다.
운현의 말에 따라도 되겠느냐는 뜻이었다.
그에겐 낯선 운현 역시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운 서기님은.”
황보선혜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우리를 구해 주시려는 거예요.”
운현을 향한 황보선혜의 눈빛은 아련하기까지 했다.
단목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그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운 학사님.”
파진한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선혜 역시 운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자, 어서 가요.”
그녀의 말이 신호인 양, 남해검문과 단목세가의 제자들은 즉시 움직였다.
휘릭, 파밧.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단목기는 운현을 슬쩍 돌아보곤 곧 어두운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탓.
그가 사라지고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운현과 독고랑, 그리고 만옹 인태상과 지태상뿐이었다.
“이제야.”
인태상이 씩 웃으며 말했다.
“널 만나는구나.”
타닥, 타닥.
죽은 시신들 사이에 버려진 횃불이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가운데 운현은 삼태상 중 두 태상과 마주했다.
***
휙, 휘릭.
어두운 숲속을 내달리며 단목기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추적은 없었다.
정체불명의 두 노인은 물론 황천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단목기는 슬쩍 방향을 틀어 파진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탓.
그의 접근을 알아차린 파진한이 단목기를 바라보았다.
“아까 그가 누구요?”
단목기가 물었지만 파진한은 다만 굳은 표정일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무림맹에 운현이 있음은 파진한도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운현이 정체를 숨기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찾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운현을 만났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운현에게 모든 것을 떠맡긴 채로.
으득.
파진한은 이를 악물었다.
두 노인의 무위가 대단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가주가 중상을 입고 황천대의 추격에 시달리던 자신들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상대.
그런 상대를 운현이 막아선 것이다.
그래서 파진한은 차마 단목기에게 대답할 면목이 없었다.
탓.
“저분은 신승 불영의 사제예요.”
대답은 황보선혜가 했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는 경공을 펼치며 말했다.
“무림맹에선, 후훗, 서기의 직을 가지고 있었지요.”
‘아!’
단목기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운현이 바로 그 유명한 ‘운 서기’이며, 황보선혜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은근히 황보선혜를 마음에 두고 있던 단목기는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공사를 혼동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우리가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구려.”
“그리고 하나 더.”
황보선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이 바로 창룡검주예요. 놀랍지 않아요?”
그건 마치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단목기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슥.
단목기는 슬쩍 파진한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씁쓸한 표정으로 단목기는 생각했다.
‘……우리 세가는, 아직 멀었군.’
드디어 무림맹 거대 문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운현의 경고를 무시했지만 사태는 그의 말대로 되었고, 다른 문파들은 단목세가와 달리 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심지어 같은 신흥오대세가인 모용세가와 남해검문마저 그러했으니, 아무 생각도 없던 것은 단목세가뿐인 것이다.
파밧.
침통한 표정으로 단목기는 가주의 안위를 살폈다.
제자에게 안겨 있는 단목세가의 가주는 아직도 의식을 잃은 채였다.
그것은 남해검문의 문주도 마찬가지여서, 파진한 역시 굳은 얼굴로 어둠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쿠궁.
“헉!”
뒤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폭음에 단목기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파진한과 황보선혜 역시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들이 떠나온 곳에서 묵직한 충격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
“흐음.”
만옹 인태상은 수염을 매만지며 흥미로운 듯 운현을 살폈다.
“네가 창룡검주냐?”
“그렇습니다.”
스릉.
운현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리고 문서의 주인이고?”
“아닙니다.”
운현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빼어 든 미명의 칼날처럼 운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그걸 정하는 건 네가 아니다.”
만옹 인태상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 줘야겠다.”
탓.
인태상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독고랑조차 반응하지 못한, 뚱뚱한 덩치가 무색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앙.
푸른 기운을 두른 운현의 검이 인태상의 주먹을 막고 있었다.
칼과 맨손이 부딪혔는데 충격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우우웅.
“허허, 이놈.”
뚱뚱한 인태상은 크게 몸을 비틀며 말했다.
“아주 무례하구나. 어른에게 인사도 않고!”
휘릭.
인태상의 커다란 몸이 가벼운 공처럼 허공에서 빙글 회전했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를 담은 인태상의 주먹이 짓쳐 들었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나무들이 흔들렸다.
인태상의 주먹은 다시금 미명에 가로막혀 있었다.
“제법이구나.”
인태상이 웃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