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견제
모용단천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금 운현은 분명 염중부의 살기를 사라지게 했다.
아니, 마치 베어 버린 것 같았다.
살기가 베어지는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단 한 자루의 검으로, 그것도 일검에 철혈사왕 염중부의 기세를 없애 버린 것이다.
“너 이놈!”
짐짓 목소리를 낮추던 것조차 이미 잊었다.
염중부는 경악한 눈빛으로 외쳤다.
“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이더냐!”
염중부의 외침이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했다.
“그저 베었을 뿐입니다.”
웅.
운현은 천천히 검을 세웠다.
빛나는 칼날 너머로, 운현은 염중부에게 말했다.
“흐름이 끊어지면 그 어떤 힘이라도 흩어지기 마련이지요.”
염중부로부터 시작된 살기의 흐름을 운현은 분명히 보았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운현의 검은 염중부의 살기를, 말 그대로 베어 버렸다.
사실 염중부의 살기는 독선의 천향접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해서 특별한 초식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었다.
으득.
염중부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과 계산이 교차하고 있었다.
‘설마 이놈이, 심안을?’
믿기 힘들었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의 살기는 분명히 베어졌다.
그 순간의 섬뜩한 감각이 지금도 서늘하게 등을 달리거늘 어찌 부인할 수가 있으랴?
심안을 열지 못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놈은…….’
그러므로 결론은 금방 나왔다.
아니, 이미 결심하고 있던 것이 더욱 확고히 굳어졌다.
‘절대로 남에게 넘겨선 안 된다.’
상인은 물론 문왕이나 삼태상에게도 마찬가지다.
운현은 염중부 자신이 가져야 한다.
그러면 자신은 천하를 쥘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무림만이 아닌, 말 그대로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말이다.
“가주님.”
운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용단천을 불렀다.
“다른 분들을 이끌고 떠나십시오.”
모용단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상황은 명확했다.
자신들이 운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알겠소.”
“모용 소저.”
모용미가 무어라 말하려는데 운현이 먼저 그녀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소저의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모용미에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비록 싸움엔 익숙하지 않지만.”
슥.
운현은 염중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염중부의 눈동자는 감출 수 없는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비무는 자신 있으니까요.”
철혈사왕 염중부라 해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싸움은, 강적을 상대하며 동시에 사람들을 지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죽음과 살육에 익숙하지 않듯 말이다.
“하지만…….”
모용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총명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떠나야 운현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겠어요.”
모용미는 눈을 돌려 독고랑을 향했다.
“독고 대협, 부디 운 대인을 부탁드려요.”
어쩌면 그건 필요없는 말이었다.
독고랑의 눈동자는 이미 결의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사락.
모용미는 검을 맞잡고 운현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고개를 든 모용미의 눈동자에 더 이상 주저함은 없었다.
“……기다릴게요.”
작은 그녀의 목소리에 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미는 고개를 돌렸다.
“가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용세가와 혁련세가 일행은 즉시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탁, 타닷.
혁련필은 모용진에게 부축받으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그 눈동자가 하려는 말을, 운현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슥.
혁련필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어두운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네놈들, 어딜……!”
염중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즉시 자신의 독문병기인 적사편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웅.
염중부는 움찔하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의 검, 미명이 낮게 운 것이다.
“이, 이놈…….”
“만일 조금이라도 움직이시면.”
미명을 든 채 운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도망갈 겁니다.”
“뭐라고?”
염중부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들에게 위해를 가하시려는 순간, 저는 전력을 다해 반대쪽으로 도망갈 거란 말씀입니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제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저는 합니다.”
운현의 눈빛은 더 없이 진지했다.
“그것이 저들을 살릴 유일한 방법임을 저는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요.”
염중부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조금 전 자신이 모용세가 사람들을 인질로 쥐고 있었던 것처럼, 운현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 염중부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허, 허허!”
염중부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허탈한 웃음은 곧 사라졌다.
“상관없다.”
염중부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너만 이 자리에 남는다면.”
모용세가든 혁련세가든 얼마든지 보내 줄 의향이 있었다.
아니, 사실 그들 따위는 상관없었다.
운현만 잡을 수 있다면 말이다.
“생각이 짧으시군요.”
하지만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저들이 없는데 제가 왜 이 자리에 남아 있겠습니까?”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염중부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비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리되도록 놔둘 것 같으냐?”
“그렇게 될 겁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어쩌면 절 도와주실지도 모르고요.”
염중부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대체 운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답은 곧 나타났다.
“역시 오는군요.”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뭐?”
염중부의 무의식적인 반문에 운현이 답했다.
“삼태상입니다.”
염중부는 아차 싶었다.
그가 애써 기척을 낮추고 이제껏 적사편조차 꺼내 들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삼태상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운현은 염중부의 살기를 베어 버렸다.
살기까지는 괜찮다. 그냥 강적을 만났다고 여길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살기가 베어졌다.
그 낯설고도 기이한 현상을 삼태상이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으득.
염중부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염중부에게도 멀리서 다가오는 삼태상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독고 제.”
운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독고랑이 서슴없이 땅을 박찼다.
팍.
독고랑은 단숨에 운현을 안고 어두운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놈!”
즉시 손을 뻗으려던 염중부는 멈칫했다.
이대로 운현을 뒤쫓으면 결국 삼태상에게 들킨다.
결국 자신이 할 일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염중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으드득.
‘이 내가 저 어린놈에게…….’
완벽하게 놀아났다. 게다가 운현은 자신보다 먼저 삼태상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염중부가 분노로 이를 갈던 그때였다.
파라락.
바람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나무 위에 모습을 나타냈다.
“염가야.”
염중부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이를 갈던 것이 거짓인 양, 그의 눈빛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시오?”
어두운 밤하늘, 나무 꼭대기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인태상과 지태상이었다.
“방금 이곳에 누가 있었더냐?”
뚱뚱하고 키가 작은 인태상이 물었다.
“혁련가와 모용가의 아이들이 있었소이다.”
“클클.”
인태상이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래? 그럼 그들의 시체는 어디 있느냐?”
가느다란 인태상의 눈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사방에 염중부가 펼친 절기의 흔적이 가득한데, 정작 죽은 사람은 왜 없느냐고 묻는 것이다.
“훗.”
염중부는 피식 웃었다.
“본디 상처입은 짐승을 뒤쫓는 것이 더 재미있는 법 아니겠소?”
인태상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 떠도는 비릿한 피 냄새는 염중부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주의를 끌었던, 그 낯설고 이상한 감각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인태상과 지태상이 주변을 살피는데 염중부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헌데 이곳엔 어쩐 일이시오? 두 분은 창룡검주를 찾으러 가지 않으셨소? 알려 드린 용모파기만으로 찾기 힘들다면 내가…….”
“필요없다.”
인태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는 도련님의 명을 거행해라. 한 치의 부족함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미 그리하고 있소.”
염중부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분께서 부르지만 않았어도 말이오.”
그 불평은 진심이었다.
삼태상만 아니었다면 운현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운현을 숨겨 주는 듯한 언행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운현의 심계에 당한 데다 그의 말대로 도와주기까지 하다니, 염중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럼 나는 가 보겠소.”
슥.
염중부는 몸을 돌렸다.
나무 꼭대기에 선 인태상과 지태상은 완벽하게 자신의 등 뒤에 있다.
‘……지금이라도.’
미련이 염중부의 시선을 끌었다.
염중부는 운현이 사라진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물론 눈만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 다른 기척은 전혀 내지 않았다.
‘안 돼.’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 빠른 인태상이 수상쩍게 여길지도 몰랐다.
휙.
염중부는 아쉬움과 미련을 놓지 못한 채 숲으로 몸을 날렸다.
그 뒷모습을 인태상과 지태상은 나무 꼭대기에 서서 지켜보았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하지만 두 태상이 딛고 선 가지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자의 말을 믿나?”
커다란 체격의 노인, 지태상이 물었다.
“물론 아니지. 성품이 뱀과 같은 놈을 어찌 믿어?”
염중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인태상은 코웃음을 쳤다.
“허나 저놈 덕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지태상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자신도 보았지만 염중부의 언동에서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쳐다보면 모를 거라 생각했겠지만.”
노골적인 비웃음을 머금으며 인태상은 말했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이놈아.”
천하에 인태상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늘마저 속인다 하여 만옹(瞞翁)이라는 호를 받은 인태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조금 전, 독고랑이 운현을 안고 사라진 바로 그 방향이었다.
***
독고랑은 두 손으로 운현을 안은 채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시커먼 나무들이 어둠 속에 휙휙 지나가고, 그때마다 운현의 귓가에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렸다.
“철혈사왕이 추격해 오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네.”
독고랑의 품에 안긴 것이 조금 부끄러운 운현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그는 오히려 우릴 삼태상에게서 숨겨 줄 걸세.”
“숨겨 준다고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날 삼태상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독고랑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허나 철혈사왕은 문왕의 수하가 되지 않았습니까?”
“철혈사왕 염중부는.”
운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결코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자일세. 특히 자신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지.”
독고랑은 그 평가에 동의했다.
그가 보기에도 염중부는 대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가 가치가 있음을 보였네. 그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드는 것을 독고 제도 보았을 테지?”
그 순간 염중부는 누구보다도 더 운현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 눈빛을 알아차린 사람은 독고랑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삼태상도 나를 찾고 있지. 그러니 그들에게 날 뺏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나?”
그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적 추론이었다.
“우리의 행방을 은폐하겠군요.”
“그래.”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오직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많은 것을 잃고 사는 셈이지.”
신승은 철혈사왕 염중부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운현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서슴없이 도망칠 수 있었다.
염중부가 어떻게 움직일지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