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미명(未明)
따각.
앞서 달리던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명이 말을 멈췄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작은 시골길은 조용했다.
뒤쫓는 횃불은커녕 아무런 인기척조차 없었다.
“다들 무사한가?”
제갈명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자 제갈연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모두 무사합니다.”
가주 제갈명은 제자들의 모습을 살폈다.
제자들은 무림맹을 탈출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런 야심한 밤이 아니었다면 그저 나들이를 온 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부상자들은?”
“곧 도착할 것입니다.”
제갈세가에 주어진 방향에도 포위는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첫 충돌 이후 더 이상의 추격은 없었다.
관도 역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덕분에 제갈세가는 뒤처진 부상자들을 기다리며 이 한적한 길에서 말을 멈추고 있는 것이다.
“운이 좋았습니다.”
대표자 제갈연이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충돌도, 희생자도 없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 제갈명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상자들이 옵니다!”
뒤편에 있던 제자 한 명이 외쳤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가주에게 말한 제갈연은 즉시 말을 몰아 뒤쪽으로 향했다.
따각, 따각.
제갈연이 뒤쪽으로 가고, 다른 제자들의 시선 역시 그쪽을 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주 제갈명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운이라…….”
사락.
제갈명은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무림맹에서 문파들의 탈출 방위를 정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운조차 따라주지 않는 법이지.”
미리 약속한 몇몇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패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작위의 패가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비단 주머니.
이것은 제갈세가의 속임수 중에서도 아주 초보적이고 하찮은 것이다. 그보다 더 정교하고 복잡한 기술들이 제갈세가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해도 쓰기 나름이듯 말이지.”
저들이 가져간 상아패에 어떤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지 제갈명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들에게 제갈세가와 같은 행운이 없을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슥.
제갈명은 비단 주머니를 들었다.
이미 상아패가 대부분 사라진 다음인데도 비단 주머니는 여전히 묵직했다.
제갈명은 관도 저편에 흐르는 물길을 향해 힘껏 주머니를 던졌다.
퐁.
어둠 속을 날아간 비단 주머니는 작은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진흙과 물풀이 저것을 물길 깊숙한 곳으로 숨겨 줄 것이다.
설령 누군가 우연히 발견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저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비단 조각과 상아패에 불과하니까.
따각.
제갈명은 말 머리를 돌렸다.
항주를 벗어나는 작은 길이 어둠 속에 곧게 뻗어 있었다.
저 길을 따라가면 제갈세가는 새로운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전혀 바뀌지 않은 시대를.
“……당문에게 신세를 졌군.”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모용세가와 혁련세가 제자들의 표정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철혈사왕 염중부가 노골적인 살기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살기를 마주하고 있는 운현은 담담하기만 했다.
“오랜만입니다.”
저벅.
운현이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절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니,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염중부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운현을 바라보았다.
“흥, 너는…….”
“헌데 누가 저를 그토록 보고자 하던가요? 문왕입니까? 아니면 상인이던가요?”
염중부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모르리라 생각했던 운현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결코 가벼운 것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면 십 초식 만에 당신을 무릎 꿇린 삼태상입니까?”
“너, 이노……!”
분노로 호통치려던 염중부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으득.
호통을 삼키고 이를 갈던 염중부는 운현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
그건 운현의 말을 시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선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독선이?”
염중부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흥, 거짓말 마라!”
짐짓 조소를 머금으며 염중부가 말했다.
“독선의 입은 천금보다 무겁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상대는…….”
말하던 염중부가 흠칫했다.
“설마 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염중부가 말했다.
“천향접을 파훼했더냐? 독선의 절기를?”
“그건 파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조금 비틀었을 뿐이지요. 천향접은 그분 평생의 심득이 담긴 천하제일의 절기니까요.”
염중부는 말을 잊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하하, 하하하하!”
웃던 염중부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염중부는 말했다.
“믿을 수 없다.”
휘리릭.
붉은 기운을 품은 날카로운 기세가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염중부의 채찍이 운현을 향해 쏘아진 것이다.
“쌍두독아!”
가주 모용단천이 크게 놀라며 외쳤다.
독니를 빛내는 두 마리의 뱀.
그것은 철혈사왕 염중부의 절기중 하나인 쌍두독아였다.
그리고 쌍두독아를 알아차린 사람은 모용단천만이 아니었다.
카앙.
무언가 달빛 아래 번뜩이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넌 또 누구냐?”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쌍두독아를 막아선 사람은 바로 독고랑이었다.
달빛 아래 빛나는 그의 칼날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우우웅.
“독고랑이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군.”
슥.
뒷짐을 지고 있던 염중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알 필요 없겠고.”
투투두둥.
활 줄 튕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염중부의 손끝에서 무수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독고랑만을 노린 것이 아니었다.
염중부의 또 다른 절기, 적혈사심이 일행을 향해 난사 된 것이다.
“피해라!”
가주 모용단천이 검을 빼 들며 외쳤다.
카강, 퍼버버버벅!
검광이 번득이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나무와 흙이 튀었다.
‘큭.’
대제자 모용진은 이를 악물었다.
사방으로 난사한 것임에도 그 하나하나에 담긴 내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다행히 모용진은 그 기세들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가주 모용단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괜찮은가!”
모용단천은 급히 상황을 살폈다.
재빠른 경고 덕분인지, 혹은 자신과 대제자 모용진이 막아 낸 덕분인지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혁련세가의 대제자 혁련필은 그렇지 못했다.
“크윽.”
혁련필은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쓰러진 혁련세가의 가주, 패검 혁련철후를 지키느라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사형!”
혁련세가의 제자가 비통하게 외쳤다.
혁련필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이미 큰 싸움을 여러 차례 겪은 후다. 쫓기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가주님.”
운현이 모용단천을 불렀다.
모용단천이 고개를 돌리자 운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분들과 함께 먼저 피하십시오. 그가 원하는 사람은 접니다. 그러니…….”
“그럴 순 없어요.”
모용미의 단호한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그녀 역시 염중부의 공세를 미처 피하지 못해 옷 소매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모용미의 손에 들린 칼날은 달빛 아래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모용세가는 대인을 버리지 않아요. 그 어느 때에라도요.”
모용미의 눈빛은 단호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소저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나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누구를 위한 효율요?”
모용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인께 일방적으로 위험을 강요하는 효율 말인가요? 그런 효율이라면 필요없어요.”
조금도 주저없는 그녀의 단언에 운현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
모용미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두고 떠나지 않겠어요.”
운현이 침묵한 것은 반론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진심에 가슴이 벅차오른 까닭이었다.
“클클클.”
염중부가 웃음을 흘렸다.
“좋은 때로다. 노부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클클.”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혈사왕이 무공을 위해 아내와 자식마저 잡아먹었다는 소문은 공공연히 강호 무림에 떠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하면 어떠냐?”
웃던 염중부가 운현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 기분이 아주 좋으니 네가 순순히 나를 따른다면.”
슥.
염중부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모용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특별히 이 여아를 죽이지 않으마.”
바로 그때였다.
“소저! 좌하(左下)!”
운현이 소리쳤다. 모용미는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좌측 아래로 내리쳤다.
카앙.
“큭.”
손에서 전해지는 엄청난 반탄력에 모용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막아 낸 것이 염중부의 지풍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이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 순간 염중부는 모용미를 향해 살수를 펼친 것이다.
저벅.
“죽이지 않겠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운현이 앞으로 나서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죽진 않았잖느냐?”
염중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네가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 약속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골적인 조소가 염중부의 입가에 걸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앞에 닥치지 않으면 믿지를 못하거든. 사지 하나쯤 잘려 나가야 비로소 현실을 깨닫는 것이 인간이지. 클클클.”
웃던 염중부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어차피 다 죽을 것들 아니더냐?”
저벅.
염중부가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함께 엄청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콰과과곽.
옷자락을 펄럭이고 나무가 흔들리게 만든 그것은 바로 염중부의 살기였다.
“큭.”
“으윽.”
내력이 약한 제자들이 신음을 흘렸다.
혁련세가 제자들의 경우는 더 심해서 아예 주저앉는 자들까지 있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가공할 살기를 내뿜으며 철혈사왕이 말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언젠간 죽기 마련. 그저 그때가 너희에겐 지금일 뿐이다.”
폭풍같은 기세에 나무가 흔들리고 먼지와 풀이 사방에 휘날렸다.
철혈사왕 염중부가 작정하고 일으킨 기세는 그야말로 공포스러웠다.
으득.
가주 모용단천은 이를 악물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명, 환우오천존.
그러나 내심 해 볼 만하리라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닥친 철혈사왕 염중부의 기세는, 어째서 그가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지 분명히 알려 주고 있었다.
‘……이대로는.’
염중부의 기세는 그조차 견디기 힘들었다.
가주인 자신조차 그러하니 다른 사람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모용단천이 각오했을 때였다.
웅.
달빛이 검로를 그렸다.
푸른 달빛이 부서지는 운현의 칼날이 한 줄기 궤적을 그려 낸 것이다.
더없이 부드럽고 너무나 아름다운, 마치 환상과도 같은 검로.
그리고 다음 순간.
훅.
사람들을 짓누르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
갑작스러운 변화에 모용단천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설마 염중부가 살기를 거둔 것일까?
그럴 리 없었다. 그 누구보다 염중부가 가장 크게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네가 어떻게…….”
염중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운현을 쳐다보았다.
웅.
푸른 달빛 아래 낮은 울음을 흘려 내는 한 자루의 검.
염중부의 살기를 단번에 사라지게 한 그것은 바로 북해의 검 미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