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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53화 (253/530)
  • 253화. 철혈사왕 염중부

    모용세가가 뽑은 방향은 이미 흑창기마대의 포위가 형성되고 있는 쪽이었다.

    그러나 모용세가는 과감하게 포위망을 향해 짓쳐 들었다.

    흑창기마대가 그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가주 모용단천과 대제자 모용진, 그리고 독고랑까지 있는 모용세가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모용세가는 어렵지 않게 포위망을 돌파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흑창기마대와 단궁대, 녹림까지 가세한 추격대가 그들을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전력으로 말을 내달리던 모용세가는 곧 난관에 직면했다.

    “길이 막혔습니다!”

    모용세가의 제자가 외쳤다.

    관도 저 멀리, 언뜻 보기에도 커다란 나무둥치와 잡석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황색 무복을 입은 무리가 그 주변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나같이 손목에서 펄럭이는 황갈색 띠들.

    그들은 바로 황천대였다.

    ‘황천대라니!’

    가주 모용단천은 이를 악물었다.

    수로채 연합과 녹림이 무림맹을 쳐들어온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수로채 연합의 황천대, 남궁세가를 봉문시킨 그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으음.’

    앞에는 황천대가 길을 막고 뒤에는 흑창기마대의 추격이 따라 붙었다.

    이렇게 되면 암천무제가 모습을 드러내도 이상하지 않다.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남궁진천을 꺾은 바로 그 강자가 말이다.

    가주 모용단천은 즉시 결정을 내렸다.

    “옆으로 빠져나간다!”

    “하아!”

    따가닥, 따가닥.

    모용단천의 명을 따라 대제자 모용진이,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 방향을 틀었다.

    사방이 들판이라 길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항주 평야는 물길이 많은 곳이다.

    관도를 벗어나면 언제 강이나 호수로 길이 가로막힐지 몰랐다.

    따가닥, 따가닥.

    사방에 어스름이 내리는 가운데 모용세가 사람들은 어둡고 낯선 들판을 달렸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워어!”

    모용단천은 말을 멈추며 혀를 찼다.

    우려한 대로 물길이 일행의 앞을 막았다.

    언뜻 봐도 폭이 넓고 물살이 세서 말을 타고 건널 만한 곳이 아니었다.

    “우측에 숲이 있습니다.”

    제자의 목소리에 모용단천은 주변 지형을 살폈다.

    어둠이 짙게 깔리는 사이로 오른쪽에 제법 무성한 숲이 보였다.

    그리고 캄캄한 평야 이곳저곳에 일렁이는 추격대의 횃불도.

    모용단천이 나지막이 말했다.

    “숲으로 들어간다. 말을 버려라.”

    울창한 숲은 자신들을 추격대로부터 조금이나마 숨겨 줄 것이다.

    모용세가 일행은 즉시 말에서 내렸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모용단천은 쓰게 웃었다.

    이토록 끈질기게 추격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숨겨 두었던 황천대로 관도를 막고 추격대까지 구성하는 것을 보면 상대는 생각보다 더 치밀하고 집요했다.

    그저 한 번의 승리를 넘어, 아예 무림맹의 뿌리를 뽑으려는 듯이 말이다.

    ‘문왕…….’

    모용단천은 운현이 말했던 적의 명호를 떠올렸다.

    부상자를 데리고 따로 탈출한 제자들에 대한 걱정이 모용단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탁, 히히힝.

    모용단천은 가볍게 말 엉덩이를 쳤다.

    말들이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모용세가 일행은 경공을 펼쳐 숲으로 향했다.

    횃불이나 등 같은 건 당연히 사용할 수 없었다.

    쉬릭, 쉬리릭.

    컴컴한 숲의 어둠이 모용세가 일행과 독고랑, 그리고 운현을 슬며시 감싸안았다.

    파삭.

    발 밑에서 낙엽이 소리를 냈다.

    숲으로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캄캄한 수풀 속에서 대제자 모용진은 앞장 서서 길을 열고 있었다.

    ‘응?’

    순간 모용진의 감각에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용진은 즉시 걸음을 멈추며 뒤를 향해 손짓했다.

    슥.

    일행 전체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다른 두 제자에게 손짓으로 신호한 후, 모용진은 검을 든 채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사박.

    두 제자들이 검을 들고 조심스레 모용진의 뒤를 따랐다.

    신중하게 전진하던 모용진은 곧 자신이 느꼈던 인기척의 정체를 발견했다.

    ‘후우.’

    모용진은 안도했다.

    숲속의 자그마한 공터에 모여 있는 이들은 바로 혁련세가의 제자들이었다.

    무림맹 대표자인 혁련필 역시 그중에 있었다.

    모용진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혁련필 대협.”

    “헉!”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반응은 컸다.

    혁련필은 물론 앉아 있던 혁련세가의 제자들이 화들짝 일어서며 검을 뽑았다.

    “누, 누구냐!”

    모용진은 인상을 썼다.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그 의도가 무산된 것이다.

    모용진은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락.

    “모용세가의 모용진이오. 목소리를 낮추시오.”

    모용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혁련세가의 제자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아아, 모용세가였구려.”

    그사이, 모용진을 뒤따랐던 두 제자와 일행도 천천히 공터로 나왔다.

    모용세가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혁련세가의 대표자, 혁련필이 눈을 빛냈다.

    “혹시 모용단천 대협께서는…….”

    “나는 여기 있네.”

    저벅.

    가주 모용단천이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하며 모습을 나타냈다.

    혁련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사하셨군요. 참으로 천운입니다!”

    그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모용진은 물론 모용단천도 의아한 눈빛을 했다.

    혁련필의 반응이 유난히 친근했기 때문이다.

    바스락.

    마지막으로 운현과 독고랑이 모습을 나타냈다.

    혁련필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대제자 모용진이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의 물음은 당연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혁련세가의 제자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상처들은 그들이 격전을 치렀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니…….”

    눈살을 찌푸리며 혁련필이 되물었다.

    “그럼 모용세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말이오?”

    모용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황천대가 관도를 막은 것과 흑창기마대와 녹림의 추격은 있었소만…….”

    “철혈사왕 말이오!”

    모두의 안색이 일시에 변했다.

    “철혈사왕 염중부가 나타났소! 우리가 황천대에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그가 가주님을 습격했단 말이오!”

    모용진과 모용미는 물론 가주 모용단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패검께서는 어디 계신가?”

    모용단천의 말에 혁련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혁련세가의 제자들 너머로 보이는, 쓰러진 한 사람의 모습을 모용단천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염가는 비겁하게 암습을 가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주께서 이리 허무하게 당하시진 않았을 것입니다.”

    “잠시만요.”

    모용미가 다가섰다.

    혁련세가의 제자들이 그녀를 경계했지만, 혁련필의 눈짓에 뒤로 물러났다.

    사락.

    쓰러져 있는 사람은 과연 혁련세가의 가주, 패검 혁련철후였다.

    외상은 크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태가 위중한 것이 분명했다.

    맥을 짚어 본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빨리 의원에게 보여야겠어요.”

    혁련필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어.”

    가주 모용단천이 탄식을 흘렸다.

    광동성의 패자 패검 혁련철후.

    매사에 거만하고 결코 굽히지 않던 그가 큰 부상을 입고 이런 야산에 쓰러져 있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철혈사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니 설마 퇴각하는 문파들을 뒤쫓고 있었을 줄이야.”

    싸움을 피하고 말을 달린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무공의 우위를 믿고 싸움으로 시간을 지체했다면 철혈사왕을 만났을 것이다.

    ‘어쩌면.’

    모용단천은 문득 생각했다.

    혹시 이 탈출조차 적의 의도대로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관도를 막고 추격대를 붙여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도망쳐 오도록 말이다.

    “다른 제자들은 어찌 되었나?”

    모용단천이 물었다.

    본래 혁련세가의 제자들은 팔십여 명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이들은 십여 명이 전부다.

    혁련필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부분 큰 부상을 입은 채 흩어졌습니다.”

    이를 악문 혁련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싸움의 와중에 죽은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형제를 잃은 그 마음이 어떠하랴?

    “음, 미안하네.”

    가주 모용단천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혁련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같이 움직일 수 없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사정이 이러하니…….”

    ‘아.’

    대제자 모용진은 혁련필이 왜 그토록 반가워했는지, 그리고 거북한 질문에도 순순히 답해 주었는지 알았다.

    모용세가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다.

    ‘하긴 나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알겠네.”

    가주 모용단천이 말했다.

    “안전한 곳까지 함께 움직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혁련필이 고개를 깊이 숙여 모용단천에게 예를 표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대협.”

    “괜찮네.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보다 혹시 이곳이 어디쯤 되는지 알겠나?”

    혁련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철혈사왕의 추격을 간신히 뿌리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습니다.”

    ‘추격을 뿌리쳐?’

    모용단천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철혈사왕의?’

    그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던 바로 그때였다.

    “조심하십시오!”

    뒤에서 독고랑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그와 동시에 묵직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허허, 오늘 밤은 노부의 운이 아주 좋구나.”

    사람들의 안색이 일시에 굳었다.

    혁련필의 표정은 아예 사색이 되었다.

    “서, 설마…….”

    파라라락.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날아내렸다.

    사박.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는 붉은 비단옷을 걸친 중년의 사내였다.

    뒷짐을 진 그 모습은 언뜻 고관대작처럼 중후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으득.

    혁련필이 이를 갈았다.

    “철혈사왕!”

    그는 바로 철혈사왕 염중부였다.

    뱀의 심성을 지닌 철혈의 사내, 암습으로 패검 혁련철후를 중상에 이르게 한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함부로 부르지 마라.”

    철혈사왕 염중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 같은 것이 입에 올려도 되는 명호가 아니다.”

    쉭.

    섬뜩한 파공성과 동시에 모용진이 검을 뽑았다.

    카강.

    날카로운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모용진은 어느새 혁련필 앞을 가리며 서 있었고, 그의 검에서는 푸른 검기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염중부가 발출한 한 수를 모용진이 알아차리고 막아 낸 것이다.

    우우웅.

    “호오.”

    염중부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의 시선은 모용진의 검에서 일렁이는 기운에 가 닿아 있었다.

    “모용세가에도 쓸 만한 인재가 있었군.”

    사뭇 가상하다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눈빛에 담긴 적의를 몰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흥미롭지만 지금은 잠시 미뤄 두도록 하지.”

    슥.

    염중부는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로구나. 아이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그의 뱀 같은 시선이 향한 사람은 바로 운현이었다.

    “아니 이제는 창룡검주라고 불러야 하나?”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염중부는 말을 이었다.

    “널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더구나. 아주 많은 사람이 말이다. 클클클.”

    마치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운현을 바라보는 염중부의 눈동자는 살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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