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불화살
“소림이 먼저 길을 뚫겠소.”
태허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우고는 가주와 장문인 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들 보중하시오.”
적의 주목을 받는 가장 위험한 일을 소림이 자청한 셈이다.
“화산이 다음을 맡겠소.”
“무당 또한 뒤처지지 않을 것이외다.”
화산파 장문인과 무당파 장문인이 선언하듯 말했다.
“참으로 감사하오.”
군자검 제갈명은 세 장문인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비록 오늘 역도들의 손에 무림맹이 유린될지언정, 여러분께서 계시는 한 강호 무림의 정기는 결단코 흐트러지지 아니할 것이오.”
사뭇 비장한 음성으로 군자검 제갈명은 말을 이었다.
“그럼 모두들 보중하시오.”
그 말이 신호인 양, 장문인과 가주 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누각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사뭇 비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용단천에게는 그 모든 것이 가식으로만 보였다.
‘허어.’
단호한 퇴각 명령부터 일사천리로 진행된 퇴각 계획까지.
마치 서로 짠 듯 진행되는 그 모습은 어이없는 것을 넘어 감탄마저 나올 정도였다.
슥.
모용단천은 단목세가의 가주를 보았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누각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느낀 배신감도 이해할 만했다.
무림맹을 위해 제자들의 목숨까지 바쳤는데, 알고 보니 다른 문파들은 이미 발을 뺄 준비를 끝냈으니 말이다.
‘허나 어쩔 수 없지. 이것이 강호 무림이니까.’
힘 없는 것이 잘못이고 영리하지 못한 것이 죄다.
게다가 알고 보면 단목세가 역시 대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
“무림맹이라…….”
모용단천은 누각 아래 펼쳐진 무림맹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크고 작은 전각은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이곳을 버리고 있었다.
“짧은 꿈이었군.”
나지막이 중얼거린 모용단천은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신음과 외침 속에, 모용단천은 천천히 누각을 내려갔다.
***
탈출 준비는 재빠르게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문파들은 퇴각과 동시에 탈출 준비를 시작했고, 모용세가 역시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다.
운현과 독고랑은 모용세가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객청에 상아패 셋을 보냈다고요?”
운현이 묻자 대제자 모용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혹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라도…….”
“사람 수를 생각하면 여섯을 보내는 것이 옳기 때문이지요.”
모용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상아패 셋이면 다른 문파의 두 배에 가까운 인원이 속하게 돼요. 결국 적의 주목을 끌 가능성이 높아지겠지요.”
모용진은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선 어쩔 수 없어요. 그분들은 항주의 지리를 잘 알고 있을 테니 걱정은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지도 몰라요.”
모용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운현은 그것이 자신의 염려를 덜어 주려는 뜻임을 알았다.
“고맙습니다. 모용 소저.”
“아니에요. 그보다 두 분은 괜찮으시지요?”
모용미가 그렇게 물을 만도 했다.
운현의 옷소매와 독고랑의 무복이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건…….”
“언제 출발합니까?”
운현이 얼버무리는데 독고랑이 모용미에게 물었다.
“지금 바로요.”
모용미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제자가 말 몇 필을 끌고왔다.
다각, 다각.
모용미와 모용진은 가볍게 말에 올랐다.
휙.
독고랑이 운현 뒤에 올라타 고삐를 쥐었다.
위급한 상황이라 기마술이 뛰어난 독고랑이 말을 모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대인.”
낮은 목소리로 독고랑이 말했다.
“독선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삼태상은 반드시 대인을 찾으려 할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드러내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하셔야 합니다.”
독고랑이 운현에게 두 번씩이나 말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운현은 슬쩍 독고랑을 돌아보았다.
바로 코앞에 보이는 독고랑의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알겠네. 명심하지.”
운현의 말에 독고랑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바로 그때, 선두에 있던 가주 모용단천이 말했다.
“가자!”
“이랴!”
“이랴! 가자!”
모용세가의 제자들이 일제히 말을 달렸다.
“이랴!”
독고랑의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이 탄 말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퇴각이 시작된 것이다.
***
문왕은 무림맹을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있었다.
흑창기마대가 이미 대강의 포위를 이뤘고, 단궁대와 녹림이 그 틈을 메워 가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문득 무림맹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갑자기 모든 문이 활짝 열렸다.
“응?”
문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수십, 수백의 기마들이 일제히 문을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문왕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웃음으로 변했다.
“우하하하하!”
“저들이 탈출하고 있습니다!”
수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문왕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크하하, 와하하하하.”
문왕은 정말로 우습다는 듯 온몸을 흔들며 웃었다.
“걸작이군! 이거야말로 걸작이야! 천하의 무림맹이 구슬 튀듯 사방으로 도망가는 꼴이라니! 으하하하하.”
덜컹.
문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무림맹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창룡검주! 네가 보여 줄 것이 이것뿐이더냐! 으하하하하.”
문왕은 계속 웃었다.
그러다 문득 수하에게 말했다.
“쏴라.”
갑작스러운 명령에 수하가 잠시 당황하는데, 문왕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무얼하느냐! 단궁대에 명해 즉시 불화살을 쏘란 말이다!”
“조, 존명!”
수하는 즉시 명을 받들었다.
단궁대의 불화살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명령이 내려진 이상 쏴야만 했다.
“철혈사왕!”
“부르셨습니까?”
쉬릭.
잘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 붉은 비단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문왕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고관대작의 나들이인 양, 철혈사왕 염중부는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서 있었다.
“무림맹이오.”
문왕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가서 마음껏 휘저어 보시오.”
“참으로 반가운 말씀이외다.”
염중부는 사뭇 과장된 태도로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인 할아범, 지 할아범!”
“헐헐,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곳에 두 명의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불룩한 뺨과 배를 내민 키 작은 노인 인태상, 그리고 거대한 체구와 긴 수염을 가진 지태상이었다.
“창룡검주를 잡아와.”
문왕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반드시 살려서 끌고와야 해. 알았지?”
매우 무례한 어투였지만 인태상은 활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요. 이 할아범이 반드시 끌고 오겠습니다. 도련님.”
쉭.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태상과 지태상의 모습은 사라졌다.
문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창룡검주. 아니, 문서의 주인.”
이를 갈며 문왕은 중얼거렸다.
“이제 곧 내 손에 들어온다. 이제 곧!”
콰직.
문왕의 손에 들린 공작선이 부서졌다.
그러나 문왕은 상관하지 않았다.
픽, 피비빅.
단궁대의 불화살이 하나둘 저녁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저녁 해는 이미 그 기세가 꺾이고, 불화살은 아름다운 빛 꼬리를 길게 끌며 하늘로 솟았다.
하지만 그 불화살들이 가져올 결과는 결코 아름답지 않을 터였다.
***
항주 심검문의 문주, 장천호는 객청에서 탈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아직 출발하지 못한 것은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도 있었지만,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문파들이 탈출하면 동시에 움직이라니.”
장천호는 손바닥의 상아패 셋을 보며 이를 갈았다.
상아패를 가져다 준 제갈세가의 제자는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듯 말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장천호는 즉시 그 의도를 파악했다.
“아주 우릴 우습게 보는군. 끝까지 우리더러 화살받이나 되라 이거지?”
무림맹의 본진이 퇴각한 순간 장천호는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이따위를 받으려고 목숨을 건 게 아닌데.”
달그락.
움켜쥔 그의 손에서 상아패가 소리를 냈다.
무림맹이 이길 것을 확신했기에 뛰어든 싸움이다.
적지 않은 피를 흘렸는데 결국 돌아온 것이 상아패 셋과 무림맹의 패배라니, 일해 주고 받을 돈을 떼이게 된 장천호로서는 고운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독고 대협의 말을 들을걸…….”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지 않았소?”
다른 문주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렇소이다. 게다가 저들이야 자기네 문파로 돌아가면 그만이라지만,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항주에 있을 수밖에 없소.”
또 다른 문주가 말했다.
장천호는 이를 악물었다.
“어쨌든 우리가 저들의 명을 따를 필요는 없소. 아니, 오히려 저들을 이용합시다.”
다른 문주가 눈을 빛냈다.
“이용이라면 어떤……?”
“저들이 먼저 탈출하게 놔두는 거요.”
장천호는 목소리를 낮췄다.
“자연히 적들은 저들을 뒤쫓아 떠날 터, 그때 조용히 빠져나가는 거요. 어둠을 틈타 항주 시내로 숨어들면 누가 우릴 알아보겠소? 안 그렇소?”
“오오! 참으로 대단한 계책이오!”
문주들이 감탄하며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불안해 하는 문주도 있었다.
“진짜 괜찮겠소?”
그는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맹에서 일하던 하인들과 문사들이 전부 항주 시내로 도망하고 있소. 이 참에 우리도 섞여 나가는 게 나을 듯한데…….”
무림맹의 정문은 항주 시내 방향으로 향해 있는데, 주변에 민가와 상가가 많아 적들이 포위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하인들과 문사들은 그 정문을 통해 화급히 항주 시내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모르시는 말씀이외다.”
장천호는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허허실실이라, 사실 여기야말로 가장 안전한 장소요. 거대 문파들이 떠나고 나면 적들이 왜 이곳을 치겠소? 어차피 자신들의 것이 될 텐데.”
다른 문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천호의 심계가 이토록 뛰어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대로 기다리다가 어두워지면 그때…….”
그러나 장천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피이이잉, 퍽!
“으악!’
어디선가 날아온 불화살이 객청의 기둥에 박혔다.
장천호가 화들짝 놀라고, 다른 문주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날아오는 불화살은 한 대가 아니었다.
퍽, 퍼벅.
불화살은 사방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오?”
“장 문주, 대체 어떻게 이런…….”
“이런 씨앙.”
장천호는 결국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 것들이 왜 불화살을 쏘는 거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장천호 역시 대답을 들을 여유는 없었다.
퍽, 퍼억.
“빠, 빨리 빠져나가야겠소! 저것들이 아무래도 전부 불태울 모양이오!”
문주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빨리 제자들과 부상자들을 수습하시오. 어서!”
장천호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제대로 탈출 준비도 못 하고 있었던 데다가, 밖에는 그 무시무시한 흑창기마대가 버티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그때였다.
“무, 문주님! 장 문주님!”
심검문의 제자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적이,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뭐?”
장천호는 당혹스러웠다.
불화살이 날아오고 있는데 적이 물러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가 봅시다!”
장천호는 급히 다른 문주들과 함께 근처에서 가장 높은 누각에 올랐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분명 불화살은 날아오고 있었지만, 정작 흑창기마대나 녹림들은 거대 문파들을 따라 일제히 추격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장천호는 쾌재를 불렀다.
“보시오! 내 말대로지 않소? 저들이…….”
“어서 갑시다!”
다른 문주가 다급하게 외쳤다.
“불바다가 되기 전에 무림맹을 나가야 하오! 어서, 어서!”
“알았소. 아, 참!”
장천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무기는 전부 버리시오! 하인들과 문사들 가운데 섞여 나가는 게 좋겠소이다! 안 그러면 우리에게도 추격이 붙을 거요!”
문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섞여 나가자고 했던 문주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빨리 갑시다! 빨리!”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무림맹이 불바다가 되기 전에, 그리고 추격에 나선 흑창기마대가 돌아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부상자들은 마차든 짐수레든 실으시오! 어서 이곳을 나갑시다!”
한달음에 객청으로 뛰어간 장천호와 문주들은 다급하게 사람들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어어!”
얼굴이 시뻘개지는 것도 모르고, 장천호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