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탈출
“맙소사.”
“어찌 저런 괴물이!”
제갈세가 가주의 외침과 아미파 장문인의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소림 장문인 태허가 자신도 모르게 불호를 되뇌고, 앉아 있던 장문인들과 가주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단목세가의 가주가 외치듯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저 괴이한 무리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 저런 극악한 사술이…….”
무당파 장문인이 신음하듯 말했다.
방어를 철저히 도외시한 채 동귀어진이라도 할 듯 달려드는 괴인들.
팔을 자르고 가슴에 검을 꽂아도 저것들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당과 화산은 물론 명문 세가의 제자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대도에 잘리거나 철퇴에 뭉개지면서.
“저것들은 대체 무엇이기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펄럭.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수장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어서 제자들을 물려야 하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할 법도 했지만, 자파의 제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는 지금 그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저 괴물들은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기를 올리시오!”
펄럭.
군자검 제갈명의 외침에 새로운 깃발이 누각 높이 솟았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 퇴각을 알리는 신호였다.
“기가 올랐습니다!”
사제의 급한 목소리에 제갈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조건 퇴각!’
“사형, 퇴각입니다!”
사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제갈연은 이를 악물었다.
“북을 울려라!”
제갈연이 급히 외쳤다.
둥둥둥둥둥.
빠르고 거친 북소리가 울려나기 시작했다.
퇴각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와 동시에 제갈연은 소림의 대표자 진명, 혁련세가의 대표자 혁련필에게 말했다.
“갑시다!”
두 사람 역시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타닷.
세 사람은 즉시 몸을 날렸다.
무림맹 쪽이 아니라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전방을 향해서였다.
퇴각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때이기 때문이다.
탁, 쉬익.
괴인 앞에 내려선 제갈연은 쌍장을 내지르며 외쳤다.
“퇴각하라!”
쾅.
막 제갈세가의 제자에게 달려들던 괴인이 뒤로 주륵 밀려났다.
괴인과 맞서던 사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갈연을 쳐다보았다.
“대, 대사형!”
“듣지 못했느냐? 어서 퇴각하란 말이다!”
제갈연은 날카롭게 외쳤다.
둥둥둥둥.
그제야 사제도 북소리가 울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투의 와중에 제대로 듣지 못했던 것이다.
“어서 퇴각해!”
탓.
제갈연은 다른 사제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자랑하던 철필은 괴인을 상대로는 불리하다.
제갈연은 이리저리 권장을 날리며 괴인들을 밀어내고, 사제들을 퇴각시켰다.
소림의 진명이나 혁련세가의 혁련필, 그리고 다른 대표자들 역시 자파의 제자들을 구해 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좌진을 이루는 신흥오대세가 역시 마찬가지여서, 모용세가의 모용진과 모용미는 물론 남해검문 황보선혜의 활약 역시 두드러졌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결코 편치 못했다.
‘역시.’
모용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이 패배했어.’
그것도 철혈사왕이나 삼태상은 나오기도 전에 말이다.
“미아야!”
모용진이 허공을 날아 모용미 앞에 내려섰다.
“오라버니!”
“하아아아아!”
모용진은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내력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그의 검에 푸른 기운이 서리더니 그 기운은 이내 검 끝을 넘어 뻗어 나갔다.
“타아!”
쉬익.
푸른 검기의 궤적은 폭풍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그에 휩쓸린 괴인들은 팔과 다리가 날아가고 목이 허공으로 솟았다.
하지만 쓰러진 자들은 다리와 목이 잘린 자들 뿐이었다.
팔이 잘리고도 괴인들은 덤벼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괴물들 같으니…….”
모용진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가요!”
“그래.”
모용미를 구했으니 목적은 이루었다.
타닥.
모용진과 모용미는 즉시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팔이 잘린 채로 꿈틀거리던 괴인들은 잠시 후 움직임을 멈추며 무너져 내렸다.
“끄어어어.”
철벅.
쓰러진 괴인들을 또 다른 괴인이 짓밟고 지나갔다.
전장은 말 그대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적이 퇴각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문왕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마지막까지 이변은 없었군.”
팔락.
공작선을 가볍게 흔들며 문왕이 조소를 머금었다.
“고작 이것이었더냐? 창룡검주.”
문왕은 사뭇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장을 내려다 보았다.
무림맹 본진은 이제 대부분 북문 안으로 퇴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끝까지 적을 추격해야 할 흑창기마대나 단궁대는 실혼대와 거리를 둔 채 대기하고 있었다.
아직 문왕의 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어찌할까요?”
수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계획대로.”
문왕의 하얀 손가락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무림맹을 포위하라.”
“네.”
수하는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펄럭.
기가 오르고 단궁대와 흑창기마대가 무림맹 양편으로 갈라졌다.
내내 서 있던 녹림 역시 그제야 무림맹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무언가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다면.”
거만한 눈빛으로 무림맹을 내려다보며 문왕이 말했다.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게다. 창룡검주.”
달칵.
문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불화살이 그대들을 방문할 테니까.”
어느새 해는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팔락.
공작선이 문왕의 얼굴을 가렸다.
문왕은 그대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강호 무림의 정점이자 최강의 연합체라는 무림맹을 방금 패퇴시켰지만, 문왕의 표정에 웃음이나 기쁨은 한 조각도 없었다.
***
무림맹의 높은 전각.
거대 문파의 장문인과 가주 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퇴각을 지켜보았다.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의 과감하고 빠른 결정 덕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무림맹이 퇴각했다는 사실이 가진 의미는 매우 컸다.
정사대전을 겪은 이들조차 한동안 침묵할 정도로 말이다.
“……이제 어찌해야겠소?”
단목세가의 가주가 물었다.
“어찌하긴.”
혁련세가의 가주, 패검 혁련철후가 툭 던지듯 말했다.
“당장 이곳을 빠져나갈 수밖에.”
“빠져나가다니?”
단목세가의 가주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하지만 이곳은…….”
천하의 무림맹이 아닌가?
그러나 단목세가 가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저쪽을 보시오, 단목 시주.”
소림 장문인 태허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무림맹을 향해 다가오는 적의 군세였다.
좌우로 천천히 산개하는 흑창기마대와 단궁대, 그리고 정면으로 다가오는 녹림의 모습은 그들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저들은 우리를 가두려 하고 있소. 이곳은 본디 농성을 염두에 두고 건축된 것이 아니니, 포위되면 단 며칠도 버틸 수 없소.”
“며칠까지 갈 것도 없소이다.”
군자검 제갈명이 말했다.
“저들이 불화살이라도 날리면, 이곳은 즉시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오.”
단목세가의 가주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허나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간단 말이오? 죽은 제자들조차 아직 수습하지 못했고 다친 제자들도 적지 않소!”
소림의 태허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그렇다고 불에 타 죽을 수는 없지 않겠소이까?”
단목세가의 가주는 어이가 없었다.
말이야 다 옳다.
하지만 마치 남의 일인 듯 말하는 이 분위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살아남은 제자들을 둘로 나누시오.”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물론 단목세가의 가주를 향한 말이었다.
“가려 뽑은 정예들로 하여금 먼저 치고 나가 적의 주위를 돌리게 하고, 그 틈을 타 부상자들이 빠져나가게 하시오.”
모용단천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저들의 포위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항주 주변만 벗어나면 안전할 것이오. 주변의 큰 성읍을 향해 달리되 장강 일대는 피하는 것이 좋소. 그곳은 이미 수로채의 손아귀에 들었다 하니까.”
단목세가의 가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분들의 계획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모용단천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단목세가의 가주는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설마 당신들 처음부터…….”
“말을 삼가시오!”
군자검 제갈명이 엄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문파를 이끄는 자라면 그 어떤 상황에도 대비를 하는 것이 옳은 것. 자신의 불찰을 어찌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려 하시오?”
서슬 퍼런 그의 면박에 단목세가의 가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것은 바로 ‘신승의 사제’ 운현의 경고였다.
‘내가 어리석었군. 내가, 어리석었어.’
모두가 그 경고를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단목세가도 그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정작 그 경고를 따르지 않은 문파는 자신뿐이었다.
으득.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단목세가의 가주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들 모용 가주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셨을 것이오.”
제갈명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포위를 완성하기 전에 탈출해야 하오. 방법 역시 모용 가주께서 말씀하신 대로요.”
모용단천을 바라보는 제갈명의 눈동자가 순간 빛났다.
하지만 그 눈빛은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본래라면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병법이겠으나, 지금은 포위가 완성되기 전에 탈출해야 하니 시간이 없소. 각 문파별로 준비가 되는 대로 이곳을 빠져나가도록 합시다.”
제갈명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각기 다른 방향으로 탈출하는 것이 적을 교란하기에 더 효과적일 것이오. 남은 것은 어느 문파가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사락.
제갈명은 품 안에서 고급스러운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미 모두의 동의를 확신한 듯한 태도였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달그락.
비단 주머니 안에서 상아패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중 하나를 제갈명이 들었다.
“이 상아패에는 숫자가 적혀 있소. 각 숫자에 방향을 정하고 패를 하나씩 뽑도록 합시다.”
제갈명은 적의 상황을 살핀 후 탈출 가능한 방향들을 정했다.
북쪽이 적에 의해 봉쇄된 터라 가능한 방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음, 방향이 중복될 수도 있겠소. 그리되면 탈출 이후에 흩어지도록 합시다. 이의가 있으시오?”
시간은 급박하고 할 일은 많으니 다른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다들 정사대전의 혼란을 겪어 보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촤락.
제갈명은 상아패를 다시 비단 주머니 안에 넣고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럼 원하는 분께서 먼저 뽑으시오. 나는 가장 마지막에 하겠소.”
제갈명이 한 발 물러섰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곧 혁련세가의 가주 혁련철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하지.”
달그락.
비단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혁련철후가 상아패를 쥐었다.
뒤이어 다른 가주들과 장문인들이 나와 한 명씩 상아패를 꺼내 갔다.
“다 가지셨소? 그럼…….”
군자검 제갈명이 비단 주머니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관일검 모용단천이 말했다.
“상아패가 남으니 객청의 무사들에게도 기회를 줌이 어떻소?”
제갈명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객청의 무사들은 항주 인근의 중소 문파와 낭인 들이다.
“오늘 그들의 전투는 훌륭했소. 이 정도의 대접은 받을 수 있지 않겠소?”
“찬성하오.”
혁련세가의 가주 혁련철후가 말했다.
“저들까지 움직인다면 포위망을 흐트러트리는 데도 도움이 될 테니까.”
소림의 태허도 말했다.
“오늘 저들이 크게 수고하였으니 활로를 열어 줌이 옳소.”
군자검 제갈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다른 의견이 없으시면 그리합시다.”
이의도, 반대도 없었다.
군자검 제갈명은 비단 주머니에서 자신 몫의 상아패 하나를 꺼내 품에 넣었다.
그리고 제갈세가의 제자를 불러 세 개의 상아패를 더 꺼내 건네주었다.
제갈세가의 제자가 객청으로 떠나자, 혁련세가의 가주 혁련철후가 물었다.
“언제 시작하는 것이 좋겠소?”
“빠를수록 좋소.”
홀쭉해진 비단 주머니를 갈무리하며 제갈명은 말했다.
“한 시진이면 포위가 완성될 듯하니, 적어도 반 시진 내에 이곳을 떠나야 하오.”
“반 시진이라고!”
단목세가의 가주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남은 제자들을 추스르고 부상자를 옮길 준비에 반 시진은 너무나 벅찬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은 그들이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