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전장의 광기
“와아아아!”
쾅. 히히히힝.
무림맹의 좌진이 흑창기마대와 충돌했다.
포위를 피하기 위해 흑창기마대가 먼저 돌격을 선택한 것이다.
과연 거대 문파의 제자들이어서인지, 혹은 흑창기마대의 속력이 그리 빠르지 못해서인지 몰라도 좌진은 흑창기마대를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전열이 일방적으로 밀리던 것과 사뭇 다른 모양새였다.
독고랑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주군.”
“좋지 않네.”
언뜻 보아서는 무림맹이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전황을 살피던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녹림의 군세 뒤에 불길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네. 아직 무언가 더 남아 있는 것이 틀림없어.”
“무언가라면…….”
“모르겠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좋은 건 아니겠지.”
독고랑은 녹림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불길한 기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운현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독고랑은 확신하고 있었다.
쾅, 히힝. 콰장창.
“우아아아!”
흑창기마대와 검은 무복의 무리들, 그리고 무림맹의 세 진이 접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말과 사람이 뒤엉키는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짐승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비명과 고함 소리, 그리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이곳까지 아련하게 들려오는 동안에도, 운현은 불길하게 일렁이는 기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피와 살육이 펼쳐졌던 전열의 전투.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거대 문파의 제자들은 가슴이 뛰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는 긴장을 했다.
전열에서 사상자가 나올 때는 그 잔혹한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피에 흐르던 본능이 꿈틀대기 시작한 건 금방이었다.
‘이곳은…….’
죽음과 공포, 폭력과 잔혹이 눈앞에 펼쳐졌다.
살육과 유린이 당연한 듯 허락된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목숨을 잃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격적인 광경.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당연한 듯 깨닫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힘이 지배하는 곳이다.’
강호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비록 의협이니, 명문 정파니 말하지만 그 본질은 힘의 우위에 기반한 폭력과 강제다.
그래서 강호는 비정하다.
그 잔혹한 실상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근.
거대 문파 제자들의 가슴은 뛸 수밖에 없었다.
강호 무림을 힘이 지배한다면 자신들은 그 정점에 위치한 자들이다.
압도적인 문파의 세력과 누구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닌,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위치한 포식자들 말이다.
“전진! 전진하라!”
둥, 둥.
북소리가 울리고 전진의 기가 올랐을 때 주저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자신들을 위한 곳이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번뜩이는 그들의 눈빛은 모두가 동일했다.
어쩌면 그것은 과도한 전장의 긴장이 주는 일종의 흥분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열기는 이미 개개인을 넘어, 무림맹 본진 천오백 제자들을 모조리 휘어감고 있었다.
“전진하라!”
“우와아아아아아!”
전장의 외침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후욱.
강한 기세를 실은 창이 짓쳐 오자, 화산파 제자는 크게 검을 휘둘렀다.
콰앙.
“으윽.”
상대의 내력이 생각보다 컸다. 화산파 제자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멈칫했다.
그 순간, 섬뜩한 창날이 그를 향해 짓쳐 들었다.
쉭.
‘윽.’
카앙.
옆에서 끼어든 칼날이 화산파 제자의 목숨을 구했다.
흑색 갑주를 입은 무사가 뒤로 물러서고 화산파 제자 앞에 그의 사형이 내려앉았다.
“절대로 혼자 나서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
“죄, 죄송합니다. 사형.”
쉬리릭.
그의 사과를 듣지도 않은 채, 사제의 목숨을 구한 사형은 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라라락.
한순간 검 끝에서 매화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적의 갑주 틈새에서 피가 솟았다.
혼란한 싸움의 와중에서도 화산파의 검이 적의 약점을 정확히 찌른 것이다.
“큭.”
흑색 갑주의 무사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미 움직임이 봉쇄당한 그는 자신의 눈앞으로 짓쳐드는 검을 막을 수 없었다.
퍽.
흑색 갑주를 입은 무사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화산파의 제자들은 그 모습을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와아아아!”
뒤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은 무복을 입은 무리들과 무림맹의 우진이 충돌한 것이다.
“신경 쓰지 마라.”
사형이 사제에게 말했다.
“지금은 흑창기마대의 씨를 말려야 할 때다.”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검은 무복 무리의 목적은 흑창기마대를 구해 내려는 것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남은 기마대를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네! 사형!”
좌진에 속한 화산파의 사형과 사제는 곧 새로운 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익, 챙, 카앙.
“크악!”
“우아아아!”
사방에 피가 흩뿌려지고 비명과 쇳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실력을 따지자면 분명 거대 문파 제자들의 수준이 더 위였다.
그러나 흑창기마대와 검은 무복의 단궁대, 무림맹의 좌진과 우진이 뒤섞인 난전 상황에서는 개인의 무력이 발휘되기 어려웠다.
그렇게 비명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한데 얽혀드는 가운데, 싸움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단궁대가 적과 교전에 들어갔습니다.”
수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전장을 살피던 문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뿐이냐?”
“네?”
수하의 반문에 문왕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네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냔 말이다. 창룡검주.”
그제야 수하는 그것이 문왕의 혼잣말임을 알아차렸다.
“전열의 대응은 훌륭했다. 허나 정작 본진이 이런 뻔하고 고리타분한 대응이라니…….”
문왕은 조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날 놀라게 하려면 무림맹에서 화차(火車)라도 튀어나왔어야지. 실망이다. 창룡검주.”
수하는 묵묵히 서 있었다.
“쯧.”
문왕은 혀를 차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팔락.
공작선으로 입을 가리며 문왕은 말했다.
“실혼대를 내보내라.”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수하의 안색은 굳었다.
그러나 어찌 감히 문왕의 명에 토를 달까?
“존명.”
수하는 고개를 숙이며 문왕의 명을 받들었다.
펄럭.
작은 기가 오르고 녹림의 군세가 좌우로 물러섰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아예 옆으로 멀찍이 비켜선 듯한 모습이었다.
처벅, 처벅.
그 사이로, 실혼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어어어어.”
얼굴까지 눌러 쓴 복면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같은 녹림조차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릴 정도로 처참한 모습.
이제껏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문왕의 한 수, ‘실혼대’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적이오.”
소림 장문인 태허의 목소리에 다른 장문인과 가주 들도 시선을 돌렸다.
“저건…….”
아미파 장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로 나타난 적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사뭇 괴기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데다, 손에는 커다란 대도나 묵직한 철퇴를 들고 있었다.
움직임도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앞서 흑창기마대의 추형돌파진이나, 진을 이루고 습격해 왔던 검은 무복의 무리와 달리 매우 흐트러진 진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건 진형이라 할 수도 없었다.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던 그들은 그저 앞으로 마구 달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앞선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이, 아니면 무언가에 쫓기듯이.
“괴이하오.”
아미파 장문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찌 저런 무리를…….”
언뜻 오합지졸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격전 한복판에 저런 무리를 내보내다니, 아미파 장문인이 수상쩍게 여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금 지켜봅시다.”
제갈세가의 가주가 말했다.
“아무래도 실수는 아닌 듯하니.”
녹림의 도적 떼라고 무시하던 생각은 이미 사라졌다.
고고한 문파의 자존심은 한치도 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상대를 경시하지는 않았다.
이제껏 이어진 적의 대처는, 결코 도적 떼들이라 폄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이런저런 무복을 입은 자들은 거침없이 전장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장문인과 가주 들은 보았다.
‘응?’
검은 무복의 단궁대가 길을 비켜 주고 있었다.
흑창기마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새로 나타난 저 무리와 섞이는 것을, 아니 그 진로에 있는 것조차 명백히 기피하고 있었다.
챙, 채앵.
단목세가의 제자는 검은 무복의 사내와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신흥오대세가라는 이름에 걸맞은 전공을 올리기 위해, 그리고 끓어오르는 자신의 피와 야망을 위해.
지금 단목세가의 제자는 모든 내력을 담아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타하!”
후웅.
단목세가 제자의 검이 상대를 향해 짓쳐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검은 무복의 사내는 갑자기 뒤로 몸을 날렸다.
탓.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상대가 갑자기 사라지자 단목세가의 제자는 당황했다.
그는 즉시 검을 세워 방어 자세를 취한 후 주변을 살폈다.
이곳저곳에서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자리를 이탈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악착같이 덤비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뭐지?’
그때였다.
“크아아아아!”
괴이한 외침과 함께 복면을 눌러쓴 자가 단목세가의 제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들기조차 쉽지 않아 보이는 커다란 도가 쥐어져 있었다.
‘이런 미친.’
단목세가의 제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법도, 초식도 없었다.
상대는 그저 커다란 도를 막무가내로 휘두를 뿐이었다.
후웅.
엉성한 움직임과 달리 도에 실린 공력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어딜.’
사락.
단목세가의 제자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도를 피했다.
그리고 즉시 반격을 가했다.
쉭. 퍽.
그의 검은 상대의 어깨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단목세가의 제자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맹한 기운이 실린 도가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후욱.
‘헉!’
단목세가의 제자는 급히 몸을 틀었다.
간발의 차로 대도가 그의 허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회였다.
“이놈!”
쉬익. 퍽.
단목세가 제자가 내지른 검은 상대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당장 절명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급소였다.
하지만 상대는 죽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멈추지조차 않았다.
“크아아아!”
상대는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거대한 도를 내리찍었다.
서걱.
“아아악!”
거대한 도는 단목세가 제자의 어깨에 그대로 박혀 버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분명 내가 먼저…….’
자신의 검이 먼저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랑곳없이 대도를 내리찍은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상대는 막거나 피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대체 이자는…….’
단목세가의 제자는 처음으로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깊이 눌러쓴 복면 사이로 상대의 눈과 얼굴 일부가 보였다.
그 순간 단목세가의 제자는 눈을 부릅떴다.
“크르르륵.”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초점을 잃은 채 희번덕거리는 눈동자, 골격이 무너져 형태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얼굴, 그리고 피가 흘러내리는 뒤틀린 입.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괴, 괴물…….”
“크아!”
그러나 단목세가 제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후웅, 퍽.
옆에서 날아온 철퇴가 단목세가 제자의 머리를 으깨 버렸다.
단목세가의 제자는 절명하고, 두 괴물은 또 다른 희생자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 가슴에는 여전히 단목세가의 검이 박힌 채 덜렁덜렁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