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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49화 (249/530)
  • 249화. 불길한 기운

    “본진이 움직이고 있소.”

    전황을 지켜보던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싸움은 곧 끝나겠구려. 허허허.”

    경계해야 할 대상은 검은 화살과 기마대뿐이다.

    그들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접근전이 시작되었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애초에 각 문파의 핵심 전력이 모인 무림맹에 덤빈 것 자체가 저들의 패착이다.

    처음부터 말했듯이 말이다.

    “허나 흑창기마대의 무위가 생각보다 상당해 보입니다만…….”

    단목세가의 가주가 불안한 어조로 말했다.

    “허어, 가주께서 어찌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시오?”

    혁련세가의 가주, 패검 혁련철후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저들은 도적 떼에 불과하오. 저들 따위는…….”

    “아니, 그렇지 않소이다.”

    소림 장문인 태허가 나지막이 불호를 외며 말했다.

    “저들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아니 되오. 더구나 적에겐 철혈사왕이 있다 하니…….”

    “하하하! 철혈사왕 말이오?”

    패검 혁련철후는 호탕하게 웃었다.

    “철혈사왕 따위, 이미 지나간 퇴물에 불과하오. 게다가 저들을 보시오.”

    그가 가리키는 곳은 바로 살아남아 퇴각하고 있는 전열이었다.

    “흑창기마대요? 삼류 문파와 낭인 들로 급조한 자들조차 전멸시키지 못한 자들이오. 그런데 어찌 적을 과소평가한다 하시오?”

    혁련철후는 코웃음을 흘렸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도적 떼들이오. 근본이 어디 가겠소이까? 허허허.”

    태허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은 호탕하기 그지없으나 혁련세가의 제자들은 중앙진의 가장 후열을 맡았다.

    온갖 변명과 억지를 부려 가며 결국 안전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렇지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소이다. 도적 떼건, 노괴건 말이오.”

    나지막이 불호를 외운 태허가 말했다.

    “철혈사왕을 퇴물이라 하셨으니, 혁련 시주의 활약을 크게 기대하겠소이다.”

    패검 혁련철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러나 태허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와아아아.”

    둥, 둥.

    무림맹 본진과 적의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살아남은 전열의 퇴각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다.

    무림맹 본진은 전열이 물러나는 것을 방관했고, 흑창기마대 역시 진형을 가다듬느라 전열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전열의 무사들은 부상자를 부축하고 무림맹 북문으로 물러났다.

    “다친 이들을 옮겨라!”

    “무림맹 의국에 연락해!”

    의국의 의원들 역시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거대 문파의 제자들이 우선이겠지만 지금 다친 이들은 전열의 무인들 뿐이니 일단 치료를 받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빨리 움직여라! 빨리!”

    퇴각에 성공했지만 전열의 무인들은 정신없이 바빴다.

    부상자를 후송하고 사망자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남은 무기와 장비 들도 챙겨야 했다.

    이것들 역시 독고랑이 명령한 대로였다.

    저벅, 저벅.

    “독고 대협!”

    누군가 외쳤다.

    독고랑과 그와 함께한 정예들이 북문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지막까지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습한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 나찰이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시퍼렇게 일렁이는 눈빛들은 귀화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그들을 바라보는 무인들의 눈에는 감격과 신뢰가 가득했다.

    저들이야말로 그 끔찍한 전장에서 무수한 목숨을 구해 낸 이들이다.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삼전무적!”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삼전무적!”

    “삼전무적!”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살아남은 전열의 무사들은 독고랑과 그의 정예들을 보며 소리쳤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남았다는 환호 같기도 했지만, 죽음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통곡 같기도 했다.

    “삼전무적!”

    하루에 세 번을 싸우되 반드시 이긴다는 삼전무적.

    그 명호에는 이제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졌다.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에서 결코 패하지 않은 무적의 검객.

    그가 바로 독고랑이었다.

    저벅, 저벅.

    독고랑은 묵묵히 걸었다.

    함께한 젊은 무인들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했지만 독고랑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사람들의 외침도 곧 사그라들었다.

    지금은 환호보다 애도가 필요한 때였기 때문이다.

    “감사하오. 감사하외다. 대협.”

    장천호가 독고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검은 화살과 흑창기마대를 이기고 우리를 구해 내셨으니 참으로 삼전무적이시오.”

    말하는 장천호의 눈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독고랑은 나지막이 말했다.

    “피해는?”

    장천호의 안색이 침통하게 변했다.

    “……삼분지 일이 죽고, 나머지 절반이 다쳤소.”

    독고랑의 눈빛 역시 가라앉았다.

    “허나 삼분지 이가 살았소!”

    장천호는 강하게 말했다.

    “대협께서 살려 주신 것이오! 감사하오, 감사하오, 대협!”

    슥.

    독고랑은 손을 움직였다.

    피에 젖은 그의 손은 쉽게 장천호의 손을 빠져나왔다.

    “혹 모르니 진형을 정비하시오. 그리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소이다.”

    독고랑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북문에서 멀리 떨어지시오. 아주 멀리.”

    난데없는 말에 장천호는 눈을 껌뻑였다.

    북문에서 멀어지라니?

    오히려 끝까지 여기 남아 있어야 자신들의 활약을 무림맹에 내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독고랑은 나지막이 말했다.

    “살아남으면 그것이 이기는 것이오. 공을 탐하면 우리 같은 사람은 죽소.”

    말하는 독고랑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였다.

    “내 말, 명심하시오.”

    장천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

    독고랑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 어디로…….”

    “대협!”

    장천호의 말을 끊고 누군가 독고랑을 불렀다.

    독고랑과 지금껏 함께했던 젊은 무인들이었다.

    턱.

    독고랑은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서른 명의 빛나는 눈동자가 그를 맞이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지고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젊은 무인들.

    독고랑과 함께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섰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냈으며, 마지막까지 독고랑의 곁을 지켰던 이들이었다.

    “수고했다.”

    독고랑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저 그뿐이었지만 젊은 무인들에겐 그 무엇보다 가슴 벅찬 일이었다.

    독고랑이, 검기발현의 절정고수이자 삼전무적의 별호를 가진, 그 누구보다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검객이 자신들을 인정한 것이다.

    어찌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있으랴?

    “나중에 한번 찾아오도록.”

    젊은 무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문파도 다르고 성별도 섞여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독고랑의 무인들이었다.

    척.

    가장 앞에 서 있던 젊은 청년이 예를 표했다.

    그와 동시에 서른 명 모두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네, 대협!”

    슥.

    독고랑은 그들에게 마주 예를 표했다.

    마주하는 눈빛 속에 가득한 것은 함께 사선을 넘은 자들만이 알 수 있는 ‘유대’였다.

    “그럼.”

    돌아선 독고랑은 즉시 몸을 날렸다.

    젊은 무인들은 아쉬움은 듯 탄식을 흘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군, 창룡검주를 향한 독고랑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자.”

    젊은 무인 중 한 명이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그의 말은 옳았다.

    무림맹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할일은 앞으로 더욱 많아질 터였다.

    저벅, 저벅.

    “어서 움직여! 다들 객청으로 간다!”

    장천호가 소리치고 있었다.

    독고랑의 충고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던 그가 전열을 객청으로 아예 이동시키려는 것이다.

    물론 자신과 몇몇 문주들은 끝까지 북문에 남아 있을 터였다.

    그래야 무림맹에서 하나라도 더 많이 줄 것 아닌가?

    이제 노력의 과실을 맛볼 시간이 가까워졌다고 여기며, 장천호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

    무림맹의 또 다른 누각.

    “허어.”

    운현은 착잡한 눈빛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탄식이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리도 허무하게 목숨이…….”

    사람이 죽는 모습은 이미 보았다.

    그러나 피가 튀고 시신이 짓밟히는 전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생지옥 그 자체였다.

    난간을 힘껏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지만, 운현은 눈앞에 펼쳐지는 참상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욱.’

    갑작스러운 욕지기가 치솟아 올랐다.

    비릿한 피 냄새가 이곳까지 번져 오는 듯했다.

    하지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바로 독고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디.’

    간절한 마음으로 운현은 기원했다.

    ‘부디 무사하시게.’

    살아돌아오라고 명했다.

    독고랑이 제아무리 절정고수라지만, 죽음이 난무하는 저런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감히 생사를 논하다니.

    자신의 명이 얼마나 경솔하고, 또 무거운 것이었는지 운현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무림맹은 죽음의 땅이 될 것이네.

    남궁세가의 가주 철검 남궁벽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죽음의 땅.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았을까?

    “후우.”

    마침내 전열이 퇴각을 시작하자 운현은 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전열의 피해는 크다. 하지만 독고랑은 무사했다.

    다치고 죽어 간 사람에게 애도를 표하면서도, 운현은 내심 안심이 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둥, 둥.

    다시금 울려 퍼지는 북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전황을 살펴보았다.

    흑창기마대를 중심으로 서서히 좁혀드는 무림맹의 본진.

    그리고 녹림에서 새로 쏟아져 나오는 검은 무복의 무리들.

    보이는 것만으로 평하자면 무림맹의 우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 천오백 본진은 모두가 거대 문파의 정예들이니까.

    ‘으음.’

    그러나 운현은 불안했다.

    그건 흑창기마대나 검은 무복의 무리들 때문이 아니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후우우웅.

    질서 정연한 녹림의 군세 너머로 불길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바로 저 정체 모를 기운이, 운현을 계속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엔 그저 기분 탓이려니 했는데…….’

    어쩌면 흑창기마대의 기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은 무복의 무리까지 쏟아져 나온 지금까지도 음침한 저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커져 가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강호의 경험은 얕아도 유독 기의 흐름엔 민감한 운현이다.

    소림의 와불 선사나 독선조차 ‘심안’이라며 놀라지 않았던가?

    그러니 저 불길하게 일렁이는 기운에는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나 무림맹에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닌, 그런 의미가 말이다.

    ‘혹 철혈사왕이나 삼태상이라는 자들의…….’

    그러나 운현은 곧 고개를 저었다.

    설령 신승이라 해도 저 정도의 기세를 뿜어내진 못한다.

    녹림의 군세 너머로 일렁이는 불길한 기운은, 여전히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운현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탁.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운현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 돌아왔습니다.”

    피로 뒤범벅이 된 독고랑이 나지막이 말했다.

    “주군.”

    “독고 제!”

    운현은 독고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주저없이 독고랑의 양 어깨를 쥐었다.

    “괜찮나?”

    독고랑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허나 피가 무슨 상관이랴? 더러워진 옷인들 어떠하랴?

    저 지옥에서 독고랑이 살아 돌아와 줬다는 것만으로도, 운현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네, 주군.”

    “수고했네. 정말, 수고했어. 정말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고맙고 또 미안해서 운현은 그렇게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었다.

    굳어 있던 독고랑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독고랑이 말했다.

    그제야 감정을 수습한 운현이 독고랑의 어깨를 놓았다.

    옷 소매가 엉망이 되었지만 운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괜찮나? 다친 곳은 없고?”

    “네.”

    독고랑의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따뜻한 감정을, 운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리 오게. 우선 여기 앉아서…….”

    “괜찮습니다.”

    자리를 거절한 독고랑은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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