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준비된 기적
피피피픽.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와 함께 북쪽 하늘에 화살이 솟아올랐다.
“온다!”
전열의 누군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독고랑이 크게 외쳤다.
“진을 펼쳐라!”
“개진! 진을 펼쳐라!”
“개진!”
여기저기서 소리가 울리고 전열의 무인들은 순식간에 진을 이뤘다.
삼삼오오 모인 무인들은 미리 정해진 대로 방패를 모으고 몸을 낮춰 화살의 충격에 대비했다.
덕분에 그들은 화살의 파공성이 들리기 전에 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쉬이이익.
화살의 비가 만들어 내는 소리는 섬뜩했다.
그리고 곧, 검은 화살이 가차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퉁!
‘윽.’
방패를 쥐고 있던 장천호는 그 묵직한 충격에 놀랐다.
자신이 경험 해 본 화살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수많은 화살이 방패를 향해 짓쳐 들었다.
투두두두둥.
파바바박.
화살은 방패를 비껴 나가 좌우의 땅에 박혀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장천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그대로 받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투두두두둥, 파바바박.
그 순간에도 검은 화살은 끊임없이 방패를 두들기며 주변의 땅에 박혔다.
꼬리만 내민 채 부르르 떨리는 화살의 모습은 마치 검은 독사들같이 살벌했다.
일전에 본 흑도회 생존자의 처참한 모습이 떠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투둥.
한차례 쏟아진 검은 화살비가 어느새 잦아들었다.
장천호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오오!”
방패진은 건재했다.
다른 방패진 역시 상황은 비슷해서, 비 오듯 쏟아진 화살 속에서도 다친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또 온다.”
독고랑의 목소리에 장천호는 얼른 몸을 낮추며 크게 소리쳤다.
“또 온다! 준비!”
“준비!”
“준비!”
여기저기서 외침이 들렸다.
장천호는 자신의 방패를 단단히 붙잡고 진을 유지했다.
쉬이이익.
또다시 들리는 섬뜩한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둔탁한 무게감.
퉁, 투퉁, 투투퉁.
그 충격은 아까와 똑같이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이대로라면…….’
장천호는 눈을 빛냈다.
‘되겠어!’
투두두둥.
검은 화살의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지만 방패진은 굳건히 버텨 주고 있었다.
가끔 방패에 직격하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검은 화살은 헛되이 땅에 처박히고 있었다.
‘만일 각자 막아 내려 했다면…….’
이런 화살의 비를, 처음 계획처럼 방패로 각자 막으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투둥.
그렇게 몇 번이나 화살의 비를 견뎌 냈을까?
일정한 간격으로 쏟아지던 화살이 뜸해졌다.
한동안 화살 날아오는 기색이 없자 장천호가 독고랑 쪽을 살폈다.
독고랑과 정예 삼십 명이 이룬 방패진은 가장 선두에 있었다.
슥.
상황을 살피던 독고랑이 손으로 신호를 했다.
더 이상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장천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오오.”
사방이 화살로 가득했다.
흑도회를 괴멸시킨 그 끔찍한 검은 화살들이 마치 바늘처럼 촘촘히 땅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오오!”
“와아아아!”
여기저기서 탄성과 기쁨의 환호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독고랑의 목소리가 그것을 끊었다.
“부상자는 뒤로 옮겨라! 인원이 부족한 진은 옆의 진과 합치도록!”
수가 적다지만 화살을 맞은 희생자는 분명히 있었다.
몇 사람이 부상자를 옮기고 진열을 재정비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다음이 온다!”
냉정한 독고랑의 목소리에 장천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장천호는 즉시 고개를 돌려 녹림의 진을 보았다.
두두두두두.
아니나 다를까?
검은 벽처럼 늘어서 있던 흑창기마대가 천천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강인한 전마의 무자비한 돌격과 그 사이로 번뜩이는 날카로운 창날들.
저것이 곧 자신들을 향해 덮쳐올 것이다.
“기마대다.”
독고랑의 목소리에 장천호는 이를 악물었다.
공손세가의 본가를 불태우고 흑도회를 괴멸시킨 흑창기마대가, 자신들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었다.
***
팔락.
문왕은 가볍게 공작선을 저었다.
무림맹 전열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조금전까지 가득하던 불쾌감은 없었다.
“저들의 전열은 외부인들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수하가 답했다.
“무림맹이 항주 인근의 무관에서 동원한 자들과 낭인들입니다.”
“허면 본질상 오합지졸일 터인데?”
그래야 했다.
허나 결과는 크게 달랐다.
비록 복식이나 병기, 방패조차 통일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든 방패진은 질서 정연하고 효과적이었다.
쏟아지는 화살의 비 속에서도 진은 무너지지 않았고 혼란에 빠진 자나 도망치는 자들도 없었다.
흑도회를 찢어발긴 검은 화살이, 헛되이 땅에 박히며 흙먼지만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삼전무적이라 하는 자가…….”
“창룡검주.”
문왕이 눈동자를 빛냈다.
“그가 무언가 했군. 자신의 의제라던 그 독고랑을 통해서. 그래, 맞아.”
그 목소리엔 희열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이 아까 그리 연호한 것이었어. 과연, 과연!”
탁.
문왕은 부채를 거뒀다.
붉은 그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활을 거둬라. 헛되이 화살을 낭비할 수는 없지.”
문왕의 명에 수하는 즉시 작은 기를 깃대에 올렸다.
“흑창기마대를 내보내라. 단궁대는 무장을 교환하고 돌격 준비를 하도록.”
문왕의 명을 담은 여러 개의 기가 오르고 내려갔다.
“그래, 창룡검주. 네가 문서의 주인일 수도 있겠지. 허나 단 며칠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천하의 대세가 정해졌거늘 네가 홀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장을 굽어보며 문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보여 봐라, 창룡검주.”
사락.
문왕이 공작선을 들었다.
무림맹을 정확히 향한 채, 속삭이듯 문왕은 말했다.
“흑창기마대, 돌격.”
팔락.
작은 깃발과 함께 흑창기마대가 전진을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달려 나가던 기마대는 곧 쐐기꼴 진형을 이르며 무림맹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그것은 바로 흑도회를 괴멸로 몰아넣은 추형돌파진이었다.
흑창기마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자 무림맹 전열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물, 앞으로.”
“그물! 그물!”
장천호가 독고랑의 말을 크게 복창했다.
어깨에 그물을 감고 있던 자들이 즉시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앞으로 나섰다.
장천호는 독고랑을 쳐다보았다.
독고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천호가 외쳤다.
“펼쳐라!”
어깨에 두르고 있던 그물을 풀어내자 넓은 그물이 나타났다.
어부들이 던지던 것이라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주변을 덮기엔 충분했다.
그물마다 여러 갈래의 큼지막한 갈고리가 서너개씩 달려 있었는데, 바로 밤새 객청 무인들이 작업한 결과였다.
“투척!”
장천호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그물 양끝을 들고 힘껏 던졌다.
비록 무공이 삼류라 해도 기본적인 근력은 있는 자들이다.
갈고리가 무게추 역할까지 해서, 그물은 제법 멀리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다시 한번! 투척!”
남아 있던 그물들이 똑같이 허공을 날았다.
“물러나라! 어서!”
장천호가 외쳤다.
그물을 던진 자들은 지체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사이에도 흑창기마대는 전열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려오고 있었기에 감히 꾸물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방패를 버린다.”
“방패를 버려라! 방패를 버려!”
독고랑의 명을 크게 복창하며 장천호가 방패를 내던졌다.
휙, 털썩.
멀리 던진 것도 아니었다.
방패는 조금 날아가더니 저만치 앞에 떨어졌다.
털썩, 털썩.
여기저기서 방패를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이제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자칫 흑창기마대가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방패로 기마대의 돌격을 막아볼 수도 있겠지만 전속력으로 부딪혀 오는 기마의 충격 앞에선 무의미하다.
기마대가 괜히 보병의 악몽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후의 작전을 위해서도 방패를 버려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했다.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산개!”
독고랑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명령 하나에 지금 목숨이 달려 있으니까.
“산개! 절대 몰려 있지 마라!”
“최대한 퍼져라!”
“중앙을 비워! 천천히!”
여기저기서 독고랑의 명을 복창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같은 문파별로 모아 놓았기에 지휘 계통은 명확했다.
전열의 무인들은 서로 거리를 벌리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창은 대기. 절대 앞에 서지 마라.”
“창은 대기!”
창은 구하기 쉬웠지만 창병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단 사흘 만에 집단전 훈련을 마칠 수는 없었고, 벽이 되어줄 중장갑 갑주 같은 장비도 없었기 때문이다.
창은, 살아남고 난 다음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두두두두두.
그사이 흑창기마대의 가장 선두는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준비!”
독고랑이 내력을 실어 외쳤다.
“눈을 떼지 마라! 움직이는 것은 마지막 순간이다!”
그 목소리에 복창은 없었다.
무인들은 긴장 속에 침을 삼키며 흑창기마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의 목숨은 바로 자신들의 눈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창병대도, 중장갑 보병대도 없는 상황에서 기마대의 돌격을 버틸 방법은 없다.
그래서 독고랑은 객청의 무사들에게 가장 적합한 대처법을 생각해 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지금껏 수련해 온 무인의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 대처법은 바로 각자 알아서 피하는 것이었다.
두두두두두.
돌격해 오는 기마대를 보며 장천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흘간 한시도 쉬지 않고 밤새도록 연습했다.
평소에 이렇게 수련을 했으면 지금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러나 그 연습의 결과가 과연 실전에서도 통할까?
그것도 목숨이 달린 이런 전장에서?
쿵쿵쿵쿵.
발 밑에서 기마대의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과 함께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시오.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이오.
훈련 때 지겹도록 들은 독고랑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말은 쉽다.
그러나 이런 극심한 공포 앞에서 누가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어째서 모든 사람이 절정고수가 될 수 없는지 장천호는 넘치도록 납득할 수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공포 앞에 장천호의 결의가 모래처럼 무너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키히히히힝.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돌진해 오던 전마가 갑자기 땅에 처박힌 것이다.
퍽. 키히힝, 퍼벅.
기적은 연이어 일어났다.
짓쳐들어오던 전마들이 여기저기서 고꾸라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땅에 펼쳐진 그물에 발이 얽히고, 그물에 달린 갈고리가 땅에 박히며 전마를 넘어뜨린 것이다.
그것은 작전의 당연한 결과였다.
키히히힝, 퍽.
쿵, 우당탕.
그러나 전열의 무인들에게 그 광경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흑창기마대가 여기저기서 나뒹굴고, 말을 타고 있던 흑색 무인들은 낙마했다.
진을 이룬 기마대의 돌격은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
뒤따라오던 전마들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도약하거나 그대로 같은 편을 짓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 말들은 서로 충돌하고 부딪히며 땅에 나뒹굴었다.
키히히힝.
그런 와중에도 들리는 것은 전마의 울부짖음 뿐이었다.
흑색 갑옷을 입은 무인들은 낙마하고 뒹구는 중에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두두두두두.
기마대의 돌격은 일부가 나뒹군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 추형돌파진 일부는 무너졌지만, 흑창기마대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무림맹 전열을 덮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