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검은 화살
다음 날 새벽, 동이 터 올 무렵까지도 무림맹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제갈연이 걱정했던 야습은 다행히도 없었고 경계를 서던 사람들도 아무 일 없이 새벽을 맞이했다.
그리고 사방이 환하게 밝아졌을 무렵에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적의 존재를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쿠릉, 쿠릉.
그들의 진군 소리가 마치 먼 천둥처럼 묵직하게 사방을 울렸다.
흑도회가 괴멸될 당시 천이백이라던 적의 수는 어느새 삼천에 육박했다.
녹림의 도적 떼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진열을 갖춘 삼천의 군세가 무림맹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오고 있었다.
쿠릉.
“드디어 시작입니다.”
높은 누각에 올라선 제갈연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대표자들이 있는 누각에는 각 문파를 상징하는 커다란 깃발들이 보란 듯 나부끼고 있었다.
무림맹의 위용을 과시함과 동시에, 이곳에서 싸움을 관전할 각 문파의 장문인과 가주 들을 위한 것이었다.
“도적 떼 따위를 상대로 출진이라니, 참으로 모욕적이군.”
혁련세가의 대표자 혁련필이 말했다.
“그렇네요. 게다가 그 도적 떼 따위에게 흑도회가 괴멸당했으니까요.”
낭랑한 목소리는 남해검문 대표자 황보선혜의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말보다 실력을 보여 줄 때겠지요?”
방긋 웃으며 황보선혜가 말했다.
혁련필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감히…….’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이 혁련필은 대단히 불쾌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제 남해검문은 대표자 회의에 참가하는 정식 문파다.
게다가 황보선혜는, 그 앳돼 보이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실력을 가진 후기지수다.
지금 그녀와 적이 될 필요는 없었다.
“전열의 출진을 시작으로 싸움이 시작될 것이오.”
전열을 구성하는 것은 항주 인근에서 모인 무관과 낭인 들이다.
“그 후에 좌진과 우진, 그리고 중앙진이 나서게 될 것이니,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대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 지휘는 각 파의 장문인과 가주 들이지만 실전 지휘는 사실상 대표자들이었다.
최고수인 각 파의 수장들과 외당, 외청의 책임자들이 빠진 것만 봐도 무림맹이 이번 싸움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었다.
아니면 운현의 ‘경고’ 때문이거나.
“북을 울려라!”
제갈연이 크게 말했다.
둥.
커다란 북소리가 무림맹에 퍼져 나갔다.
대표자들은 서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누각을 내려갔다.
붓 모양의 철필을 든 제갈연도, 대도를 든 혁련필도, 검을 쥔 황보선혜와 모용미도 모두가 긴장된 표정이었다.
둥.
북소리와 함께 무림맹의 북문이 열렸다.
그리고 무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중소 문파와 무관, 낭인 들로 구성된 전열이었다.
하나같이 방패를 손에 든 그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 무엇보다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수도 적지 않아서, 오백에 이르는 무인들이 범상찮은 기세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
둥, 둥.
큰 북이 계속해서 울리는 사이, 높은 누각에 무림맹 각 문파의 수장들이 올랐다.
“허허, 어서 오시오. 장문인.”
“오랜만이오. 문주.”
“가주께서도 강녕하셨소?”
누각 가장 위층에 오른 장문인과 문주 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언뜻 보아서는 나들이라도 온 것 같은 한가한 모습이었다.
“오, 이곳은 제법 풍광이 좋군.”
허연 수염을 기른 화산파 장문인이 말했다.
“그렇구려. 그리고 아마 저들이 녹림인 듯하오.”
마찬가지로 긴 수염을 가진 무당파 장문인이 답했다.
허연 눈썹 아래 빛나는 불꽃같은 눈동자는 무림맹을 향해 다가오는 녹림을 향하고 있었다.
“감히 도적 떼 따위가…….”
무당파 장문인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다른 장문인이나 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한 사람,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단천만이 심각한 눈빛으로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둥, 둥.
그사이 북문에서는 좌진과 우진이 나서고 있었다.
거대 문파와 세가 들로 구성된 그들의 모습은 한눈에도 당당하고 기세가 남달라 보였다.
“허어, 과연 명문의 제자들이로다.”
아미파 장문인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좌진과 우진을 이루는 문파는 여섯, 중앙진은 일곱이다.
지금 무림맹에 있는 각 파의 제자들이 작게는 오십에서 많게는 칠십에 이르니 좌진과 우진의 숫자는 사백에서 오백에 달했다.
가장 숫자가 많은 중앙진과 중소 무관인 전열까지 합하면 총 이천을 넘는다.
“흑도회가 마주했던 적이 천이백이라 했소?”
혁련세가의 가주, 패검 혁련철후가 물었다.
그 말에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답했다.
“숨겨 두었던 자들까지 합하면 모두 삼천 정도라 하더이다.”
“삼천이라.”
소림사 장문인 태허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본래 예상보다 많구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신승의 사제, 운현의 말이 일정 부분 옳다는 뜻이다.
물론 태허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숫자는 의미가 없소.”
패검 혁련철후가 짐짓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본래 도적이며 오합지졸이오. 선봉을 꺾으면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이오.”
꺾어야 하는 그 선봉이 단궁대와 흑창기마대라는 것은, 그리고 그 후에는 철혈사왕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수장들 역시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둥, 둥.
그사이, 북문에서는 이제 각 진을 이끌 대표자들이 나서고 있었다.
각 문파의 대제자이자 다음 세대를 이끌 신진 고수들인 그들의 출전에 좌진과 우진, 중앙진의 기세는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모용단천 역시 모용미와 모용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디 조심하거라.’
손자 손녀를 바라보는 모용단천의 눈빛이 염려로 물들어 가던 때였다.
“와아아아!”
갑작스러운 환호성이 전열에서 터져 나왔다.
“응? 무슨 일이지?”
수장들은 사뭇 여유로운 표정으로 북문을 살폈다.
혹시 자파의 제자가 나오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그들의 눈살을 살짝 일그러지고 말았다.
지금 막 북문을 나서고 있는 자는, 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용단천만은 달랐다.
‘저 사람은…….’
거리가 먼 이곳에서도 분명히 보이는 비범한 기세, 그저 걷고 있을 뿐인 단순한 움직임에서도 느껴지는 단호한 의지.
“삼전무적!”
“삼전무적!”
전열의 무인들은 미친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한 자루의 칼날 같은 그는 바로 삼전무적 독고랑이었다.
“삼전무적!”
뒤에서 들린 환호성에 장천호는 움찔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판국에 뒤에서 큰 소리가 나니 누군들 놀라지 않을까?
그러나 장천호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뒤를 돌아본 장천호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독고 대협!”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장천호가 외쳤다.
설마 싶던 녹림의 도적들은 그 수가 삼천에 이르렀다.
눈앞에 펼쳐진 그 엄청난 위용 앞에 장천호의 간담이 서늘해 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자신들 뒤에 출진한 무림맹 역시 장천호를 더욱 긴장시켰다.
뒤로는 천오백의 무림맹, 앞에는 삼 천에 이르는 녹림의 군세.
가운데 끼어 있는 장천호는 마치 전장 한복판에 내던져진 듯한 느낌이었다.
문주인 장천호가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인데 다른 무인들은 어떠랴?
전열을 이루는 중소 문파와 낭인 들의 긴장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바로 그때 독고랑이 나타난 것이다.
검기발현의 절정고수, 내력조차 쓰지 않고 공손세가의 대제자를 꺾어 버린 검객 삼전무적 독고랑이.
“와아아아아!”
“삼전무적!”
“삼전무적!”
전열의 무인들 중에 그 명호를 외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어쩌면 전투의 과도한 긴장 탓인지도 모르지만, 독고랑은 그들을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자 절정의 고수였다.
무인들의 환호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삼전무적!”
“삼전무적!”
전열의 무인들은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장천호는 급히 독고랑을 맞으러 뛰어갔다.
“대혀어업!”
그 목소리는 감격으로 벅차오르고 있었다.
“오셨구려! 과연 오셨구려! 대협!”
장천호는 체면조차 잊은 채 몇 번이고 예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다른 문주들은 독고랑의 충고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패배할 테니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그의 마지막 충고를 말이다.
―장 문주는 그 말을 믿으시오? 무림맹이 진다고?
―허나 철혈사왕이 있을 정도라면…….
―철혈사왕을 우리가 상대할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오? 무림맹은 우리에게 도적 떼들을 상대하라는 거지, 철혈사왕의 목을 따라는 게 아니오.
―그리고 한번 밀렸다고 무림맹이 무너지기라도 하겠소? 어차피 우리가 살길은 무림맹 편이 되는 것밖에 없소이다. 혹여 사기가 저하될까 두려우니 말이 새지 않도록 입단속 철저히 하시오.
하나같이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독고랑의 충고를 거절한 셈이 되었으니 면목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주군을 모셔야 한다고 독고랑이 말했던 터라, 장천호는 그의 참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장천호의 감격은 더욱 컸다.
전열의 다른 무인들은 그런 사정을 몰랐지만, 독고랑이 자신들을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만으로도 환호하고 있었다.
저벅.
“감사하오! 대협!”
“내가 섬기는 주군께서.”
독고랑이 여느 때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전열의 오백 무인들이 한꺼번에 조용해졌다.
“내게 이르시기를 반드시 살아오라 하셨소.”
사실 운현은 독고랑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독고랑은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운현은 독고랑을 보내야 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는 명을 내리면서까지 말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무인들의 시선을 담담히 맞받으며 독고랑은 말을 이었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것이오. 여러분과 함께.”
“와아아아!”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열의 오백여 무인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탁탁탁.
“대협!”
삼십여 명의 젊은 무인들이 독고랑 옆으로 달려왔다.
각 문파에서 특별히 가려 뽑은 자들로 이루어진 정예였다.
비록 함께한 시간은 사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독고랑을 향한 분명한 존경과 신뢰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중 한 청년이 독고랑에게 방패를 내밀었다.
독고랑은 묵묵히 그 방패를 받아 들었다.
척.
“……가자.”
독고랑의 말에 삼십여 청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당당하게 전열의 선두로 걸어갔다.
저벅, 저벅.
“삼전무적!”
“삼전무적!”
“삼전무적!”
전열의 환호 소리는 무림맹은 물론, 문왕의 영채까지 똑똑히 들렸다.
그때였다.
펄럭.
커다란 깃발이 무림맹 누각에서 올라갔다.
바로 개전의 신호였다.
전열의 환호에 의아해하고 있던, 중앙진의 제갈연은 즉시 내력을 담아 외쳤다.
“기를 올려라!”
이해할 수 없는 전열의 환호에 대한 의문은 뒤로 미뤘다.
지금은 싸움을 시작할 때였다.
펄럭 펄럭.
좌진과 우진, 중앙진은 물론 전열에서도 깃발이 올랐다.
“전열, 전진!”
그의 외침에 답하듯 전열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저벅, 저벅.
방패를 든 전열의 오백여 무인들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정사대전 이후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무림맹이 전면전을 시작한 것이다.
***
“쯧.”
문왕은 혀를 찼다.
그는 녹림의 군세 뒷편,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삼전무적’이라는 외침이 들린 때에는 사뭇 흥미로운 표정이었지만, 전열이 진군을 시작하자 문왕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각기 다른 복식과 제멋대로인 방패들을 보면 전열은 급히 끌어모은 자들이 분명했다.
문왕은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보듯 눈살을 찡그렸다.
팔락.
공작 깃털로 만든 문왕의 부채, 공작선이 그의 입과 코를 가렸다.
“단궁대는?”
수하가 즉시 답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미 사정거리에 들었으나…….”
“쏴라.”
수하는 잠시 머뭇거렸다. 본래라면 좀 더 끌어들이는 것이 옳다.
그러나 문왕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단궁대, 발사.”
수하는 문왕의 명을 전했다.
펄럭.
자그마한 기가 오르고, 이미 대기하고 있던 단궁대가 화살을 쏘았다.
투두두둥.
음산한 소리와 함께 하늘이 화살로 뒤덮였다.
흑도회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검은 화살.
바로 그 화살의 비가 무림맹의 전열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