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결전 전야
“만일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된다 해도 절대 경솔히 공격에 나서면 안 되오.”
독고랑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버티는 거요. 무림맹 본진이 움직인다 싶으면 즉시 옆으로 빠지시오. 알겠소?”
“그야 당연히…….”
“싸움은 사람을 미치게 하오.”
장천호의 말을 끊으며 독고랑이 말했다.
“피가 끓는다고 공을 탐하면 죽소. 그 어떤 고수라도.”
독고랑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였다.
“명심하시오. 살아남으면, 그것이 이기는 것이오.”
그 말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자, 다들 대협의 말씀을 들었으니!”
장천호가 일어서며 크게 말했다.
“모두 움직이시오!”
객청이 순식간에 부산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방패를 가지러 뛰어가고, 문주들은 문도와 제자 들을 어떻게 편성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객청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활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바라보는 독고랑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사실은.’
지금이라도 발을 빼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그 말에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독고랑의 이 모든 노력은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일시적인 완화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 사실이 독고랑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독고 제.”
문득 들린 목소리에 독고랑은 고개를 돌렸다.
“대인!”
어느새 돌아온 것일까?
놀라는 독고랑의 눈에 운현의 부드러운 표정이 가득 들어왔다.
“과연 독고 제는 대단하군.”
운현은 북적이는 객청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바뀔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일세.”
그 말은 지극히 당연했다.
아까전만 해도 술판으로 흥청이던 객청이, 지금은 전투를 앞둔 진영처럼 긴장과 활기로 넘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리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그간 어찌 혼자 다녔나? 하하하.”
운현이 웃으며 말했지만 독고랑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마치 햇살처럼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 주고 있었다.
“……저는.”
독고랑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사뭇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저 대인의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
운현은 싱긋 웃었다.
그때였다.
“오오, 대인께서 창룡검주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장천호가 운현에게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저는 항주 심검문의 장천호라 합니다. 대인을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운현은 그의 예에 답했다.
“운현이라 합니다. 영광이라니요. 그런 말씀은…….”
“아니오, 아닙니다.”
장천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장천호는 운 대인께 깊이 감복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울 때에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는 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소이다. 운 대인.”
또 다른 사람이 옆에서 말했다.
“우리 쌍검회는 검주의 마음씀에 크게 감동했소이다. 참으로 시대의 대인이시오. 허허허.”
기회라 여긴 것일까?
객청에 있던 중년 무인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반갑소이다! 저는 항주 이가장의…….”
“용맹관의 관주외다. 평소부터 대인의 명호를…….”
운현은 당황했다.
이런 열렬한 환영은, 특히 무림맹에선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저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운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독고랑의 눈빛은 부드럽기만 했다.
***
운현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고랑을 객청에 머물게 해야 했다.
그리도 열렬한 감사와 환영을 받고 독고랑을 뺏어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오랜만에 혼자가 된 운현은 아침 일찍 서기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조두식이나 안수재, 편어두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업무로 출타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대단히 바빠 보이는 서기가 대답했다.
“아마 열흘쯤 되었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아, 감사합니다.”
운현이 예를 표했지만 서류를 잔뜩 든 그 서기는 총총걸음을 옮겨 멀어졌다.
‘인사라도 하려 했더니…….’
사직서를 냈으니 서기의 직무도 끝났다.
곧 닥칠 위험에 대해서는, 본래 눈치 빠른 편어두가 있으니 슬쩍 흘려 두기만 해도 된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이미 무림맹엔 없었다.
열흘이나 되었다면 운현이 돌아오기도 전에 이곳을 떠난 것이다.
“후우.”
어쩐지 무림맹이 텅 빈 것 같은 건 운현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리라.
운현은 터덜터덜 서기부를 나섰다.
그날 오후, 다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무림맹에 급보를 전했다.
그것은 바로 ‘적’이 반나절 거리에 나타났다는 소식이었다.
충돌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위치는?”
제갈연의 물음에 전령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답했다.
“항주 북쪽 삼십 리 밖입니다.”
“평야가 있는 곳이로군.”
대표자 중 한 명이 말했다.
무림맹 남쪽은 항주 시가지다. 기마대를 가진 적들이 북쪽을 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이미 예상한 대로군요.”
다른 대표자가 말했다.
“적들의 움직임은 어떻던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십 리 이내에 들어올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맹의 모든 불을 밝히고 경계를 세워야겠소. 저들이 혹 야습을 할지도 모르니까.”
제갈연은 대표자들을 보며 말했다.
“결전은 내일 아침이오.”
무림맹의 대처는 이미 정해진 바다.
남은 것은 결전뿐.
몸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에 제갈연은 자신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 대로 될 것이오.”
대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에서도 긴장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목표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문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군을 멈추고 영채를 세워라.”
“존명.”
수하가 즉시 명을 이행하기 위해 나갔다.
마치 침상처럼 보이는 커다란 마차에 앉은 문왕은 느긋한 표정으로 부채를 펄럭였다.
“후후.”
웃음을 흘리는 문왕의 눈은 무림맹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맹의 상황은 어떠하냐?”
마차 옆에 서 있던 수하가 지체 없이 답했다.
“모든 문을 닫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을 밝히고 횃불을 피워 대낮같이 환합니다. 곧 어둠이 내리면 이곳에서도 보일 것입니다.”
“쯧.”
문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처소 앞에 휘장을 쳐 무림맹의 불빛이 내게 닿지 않게 하라. 알겠나?”
그건 의외의 명이었다.
그러나 수하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이유 같은 건 묻지 않았다.
문왕의 명 중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둘이 아니니까.
탁.
수하가 자리를 뜨고, 문왕은 찡그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대낮같이 환한 불빛이라고? 그런 것 따위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거대한 불길에 휩싸인 마을, 사람들의 비명과 통곡,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
우직.
문왕의 손 아래서 부채가 소리를 냈다.
“흥.”
악몽을 쫓아내기라도 하듯 문왕은 코웃음을 흘렸다.
“내일은 특별한 날이 될 거야. 아주, 특별한 날이.”
문왕은 조소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기괴한 표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
깊은 밤에도 무림맹은 대낮처럼 환했다.
사방에 피운 횃불과 모닥불이 소리를 내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타닥, 타닥.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객청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결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걸었고 말을 나눠야 할 때도 소리를 낮췄다.
그것은 아마도 결전 전야가 주는 긴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쉬시지요.”
문득 들린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독고랑이었다.
조금 전까지 객청의 문파들과 회의를 하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괜찮네. 그보다 이야기는 잘되었나?”
독고랑은 고개를 저었다.
“……떠나겠다는 문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운현의 충고에 따라, 독고랑은 각 문파의 수장들에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무림맹이 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아 보였고 무엇보다 이미 기호지세라고, 그리 말하더군요.”
“그랬군.”
운현이 한숨을 쉬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건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탈한다는 건 무림맹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도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무림맹의 힘을 오랜 시간 눈앞에서 보아 온 이들이니, 어찌 무림맹의 패배가 쉽사리 납득되랴?
“괜찮네.”
운현이 독고랑을 보며 말했다.
“자네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최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독고랑은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들 중에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죽어 간 이들에게 최선이라는 말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사람이 최선을 다한 후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고 하지만, 저는 가끔 하늘이 아주 잔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목소리엔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을 홀로 떠돌며 그가 보아 온 것들은, 그리고 그가 느꼈을 감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적수를 찾아 천하를 헤매었으나 함부로 죽이지 않고, 무리 짓지 않은 채 고독한 검객으로 세상을 떠돈 것은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독고랑의 말에 담긴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운현은 알았다.
그래서 천천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은 던져진 존재라고 하더군.”
운현의 목소리에 독고랑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세상에, 아무것도 모른 채 내던져진 존재 말일세.”
분주한 무인들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네.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던져 의미를 만들고, 선택을 통해 가능성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말이지.”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횃불 아래서 운현은 말했다.
“내던져진 채로 살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던질 것인가. 그것을 선택했다면, 하늘이 무엇을 해 주었는지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지 않나?”
완전한 세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주저앉아 있어도 된다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독고랑은 이미 최선을 다해 자신을 던진 사람이다.
그러니 하늘의 뜻이나 사람의 평판이 무슨 상관이랴? 독고랑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사람인 것이다.
“……과연.”
독고랑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갔다.
“저는 선택을 잘했군요.”
“그래. 자네는 이미 충분히…….”
“감사합니다.”
독고랑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인께서 이러한 분이셔서, 그리고 제 앞에 나타나 주셔서요.”
운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평소 표정조차 없던 독고랑이 미소까지 지으니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당황하던 운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하긴,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잘도 저런 말을,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한다 싶었지만 독고랑은 본래 그런 사람이다.
지나치게 진지하고, 그래서 더욱 좋은 사람 말이다.
“……그런 말은 맘에 든 아가씨에게나 하게.”
가볍게 웃으며 운현은 고개를 돌려 객청을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넘어올 걸세.”
사실 운현도 경험은 없으니 확신은 못한다.
하지만 독고랑은 절정고수인 데다가 웃으면 상당히 훈훈한 분위기의 미남이다.
어지간한 아가씨라면 대번에 호감을 가질 것이다.
잘 웃지 않아서 문제지만 말이다.
“명심하지요.”
독고랑은 고개를 돌려 객청을 바라보았다.
타닥, 타닥.
머리 위에서 횃불 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말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객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생각을 품은 채, 결전 전야가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