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진화타겁(軫火打劫)
손을 든 그녀는 조금 전 당문에 대해 물었던 여인이었다.
“운 서기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황보 소저.”
제갈연이 말하자 그녀가 운현을 향해 방긋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운 서기님. 저는 남해검문의 황보선혜예요.”
이곳이 무림맹 대의사청이라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로 그녀의 미소는 환했다.
유난히 앳돼 보이는 그녀는 밝고 쾌활한 성격인 데다 검술도 빼어나서 무림대회 때 상당한 인기를 얻었었다.
‘아, 남해검문.’
그녀가 호의를 보이는 이유를 운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남해검문이라면 용봉지회에서 운현이 도와준, 파진한의 문파다.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남궁세가에서 말하기를 수로채 연합과 녹림의 규모는 일만에 이른다고요.”
낭랑한 목소리로 황보선혜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한 바, 흑도회를 괴멸시킨 자들은 녹림이에요. 그 숫자도 일만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지요. 그렇다면 전력이 분산되었다는 것 같은데, 저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애초에 일만이 거짓이기 때문이겠지.”
혁련필이 불쑥 말했다.
하지만 운현도, 황보선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첫째는 그들에게 무림맹을 이길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운현은 침착하게 답했다.
“제가 보기에 문왕은 매우 신중하고 치밀한 자입니다. 항주로 향하는 모든 관도에 척후를 배치할 정도지요.”
대표자들이 웅성거렸다.
관도에 문왕의 척후가 있었다니,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전력이 분산된 이유도 명확합니다. 이길 수 있으니까 그리한 것입니다.”
“흥!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또다시 혁련필이 말했다.
평소라면 다른 대표자들 역시 혁련필에게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흑도회가 괴멸당하고 철혈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운현의 말은 사뭇 심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바로 진화타겁(軫火打劫)입니다.”
황보선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진화타겁이라면 불 났을 때 도둑질한다는……. 아!”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불 났을 때에 세게 치라고 했으니, 장강을 장악하기에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없을 것입니다.”
크게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일만의 숫자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장강 유역의 문파와 무관 들을 향했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장강은 이미 수로채 연합의 손에 넘어갔다고 봄이 옳겠지요.”
운현은 씁쓸하게 말했다.
실제로 상인들조차 장강에 배를 띄우지 않고 있었다.
“여러분이 자파에 보낸 전령 역시, 아마도 장강을 건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보선혜가 나지막이 탄식을 뱉으며 말했다.
적이 생각보다 강하고 도움의 손길조차 기대할 수 없다면 결론은 명확했다.
“우리는 정말 패배를 전제로 대책을 세워야겠군요.”
“말도……!”
“동의합니다.”
혁련필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바로 모용세가의 대표자, 모용미였다.
“또한 지금 즉시 맹 내의 일반인들을 피신시킬 것을 건의합니다. 운 서기께서 보고서를 통해 제안한 바대로요.”
대표자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모용미를 돌아보았다.
충격적인 내용과 결론 탓이었을까?
보고서에 그런 제안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이네요.”
황보선혜가 보고서를 확인하며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애초에 근거가 없다 하지 않소?”
“우선 가주께 말씀드리는 것이…….”
대의사청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정숙하시오!”
제갈연이 다시 외쳤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필요한 진술은 이미 들었으며, 그 근거가 부족함은 운 서기 역시 인정하였소. 그러니 일단 논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어차피 대표자 회의에서 결정될 사안은 아니다.
대표자들이 운현의 진술을 각 파의 수장들에게 보고하면 그제야 진짜 대책이 결정될 테니 말이다.
운현을 돌아보며 제갈연이 말했다.
“수고하셨소, 운 서기. 돌아가셔도 좋소이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표자들에게 예를 표했다.
“상황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더 급박합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그러니 패배를 전제로 대책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운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 말은 분명 경고였다.
“흥.”
혁련필이 끝까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달칵.
운현이 나오고 대의사청 문이 닫혔다.
그렇게 대표자 회의는 정회했다. 늘 그렇듯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로.
***
소림의 장문인 태허는 자신의 처소에서 대표자 진명을 만나고 있었다.
“허어.”
긴 한숨을 내쉰 태허는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무림맹이 질 것을 전제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사숙께서 그러시더냐?”
그가 말하는 사숙은 바로 운현이다.
“네.”
대표자 진명이 고개를 숙였다.
태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진명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허나 다들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일단 무림맹이 진다는 말도 너무 황망한 데다, 그…… 사숙조께서는 다른 분들과 껄끄러운 면이 있는지라…….”
태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한때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졌으며, 지금으로선 최악의 후견인인 신승 불영의 사제가 바로 운현이다.
견제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데다 성정조차 무림맹 사람들과는 크게 달라서 타협이나 협상의 손길조차 내밀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껄끄럽지 않으랴?
태허 역시 무림맹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파의 법도는 지엄한 것이나, 갑자기 나타나 사숙이 된 이 청년을 어찌 기꺼이 반길 수 있을 것인가?
가능하면 운현과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이 태허의 솔직한 속내였다.
“허어.”
또 한번 한숨을 쉬며 불호를 외운 태허는 눈을 감았다.
사실 태허가 껄끄러워하는 사람은 운현이 아니라 그 뒤의 신승 불영이다.
한평생 신승의 그림자에 덮혀 살았다.
신승이 소림을 떠나고 자신이 장문인이 되었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이제야 신승의 그림자가 조금 옅어지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운현이 나타난 것이다.
‘……사숙은 끝까지 절 괴롭히시는구려.’
태허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신승 불영이 뒤에 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진명.”
“네.”
눈을 뜬 태허는 나지막이 말했다.
“무림맹이 패배할 경우의 대책을 세우시게. 최우선으로.”
“네?”
대표자 진명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허나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네.”
장문인 태허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 이 시점에 운 사숙이 무림맹에 있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네.”
진명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허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랬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정사대전 당시에도 그랬다.
우연히 나타난 사람들이 사건의 핵심이 되었고, 별것 아닌 일들이 결정적인 문제가 되곤 했다.
그리고 그 믿을 수 없는 우연들의 뒤에는 항상 신승 불영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허, 허나…….”
대표자 진명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태허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 말해도 모르리라.
신승 불영이 관계된 일이라면 무조건 그와 같은 줄에 서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른 문파들도 그리할 걸세. 그러니 그것도 염두에 두고 대책을 세우도록 하시게.”
“다른 문파들이 말입니까? 하지만 그들은…….”
태허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의 무서움을 진명은 아직 모른다.
다른 세가와 문파 들은 이미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운현의 경고가 더해졌으니 그 대책은 더욱 신중하고 철저하게 준비될 것이다.
즉 운현의 경고는 내뱉어진 순간,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이미 자신의 일을 다한 셈이다.
신승 불영의 계략이 늘 그러하듯 말이다.
“할 일이 많을 테니 어서 나가 보시게.”
“……네.”
진명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장문인의 뜻을 받들었다.
탁.
그가 나가고 홀로 남은 태허는 나지막이 불호를 읊조렸다.
“허어.”
오랜만에 신승 불영의 그림자를 느낀 탓일까?
정사대전이라도 다시 시작될 것 같은 까닭 모를 불안감이 가슴 한편에 어른거렸다.
태허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안감이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속으로 불호를 되뇌었다.
***
“진(陣)을 짜야 한다 하셨소이까?”
장천호의 말에 독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패로 화살을 막으려면 진을 짜는 것이 최선이오. 셋, 혹은 다섯 정도면 될 것이오. 그리고 방패에 반드시 끈을 다시오. 그것만으로도 움직임이 크게 자유로워지니까.”
객청 가득한 이들은 진지하게 독고랑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미심쩍은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독고랑의 한마디는 그들의 생명을 좌우할 만한 이야기였다.
“방패는 항상 비스듬히 세우시오. 그 검은 화살에 직격당했다가는 얇은 나무 방패쯤 가볍게 뚫리고 말 거요.”
장천호는 섬뜩한 검은 화살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난히 짧고 단단했던 그 화살은 무공을 익힌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조악한 방패라면 독고랑의 말처럼 단숨에 뚫리고 말 것이다.
“비스듬히 세우라는 건…….”
“이렇게.”
독고랑은 자신의 손바닥을 세워 보여 주었다.
“막는 것이 아니라 흘린다는 생각으로.”
“오호라, 과연…….”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지 않고 흘린다는 건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무학의 이치였다.
검은 화살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이들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
“저기, 흑창기마대는 어찌합니까?”
누군가 물었다.
독고랑은 장천호를 보았다.
“준비한 것이 있소?”
“그게…….”
장천호는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우리도 몇 가지 생각은 해 봤습니다만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
“한번 말해 보시오.”
독고랑의 말에 장천호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미리 풀이라도 묶어 두면 어떠냐고 누가…….”
객청 무인들의 얼굴에 일시에 실망이 떠올랐다.
결초보은이라는 옛 이야기에서 떠올린 모양인데, 현실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네? 아니, 정말로 풀을……?”
장천호의 물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소. 허나 그들의 기동력을 봉쇄하자는 건 좋은 착상이오.”
독고랑이 손을 벌리며 말했다.
“이 정도의 갈고리와 그물을 모아 보시오. 예전에 변방 부대가 썼던 건데, 효과가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장천호가 즉시 일어났다.
“자네! 그리고 자네! 즉시 맹에 가서 갈고리와 그물을 요청하게. 그리고 자네들은 사람들을 이끌고 항주 시내로 가서 갈고리와 그물을 있는 대로 전부 가져오게.”
갈고리와 그물은 주로 어업에 사용된다.
항주에는 호수와 강이 있으니 물량은 넉넉했다.
맹에 요청하는 동시에 직접 사람을 보낸 것은 그편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몇 사람이 즉시 객청에서 뛰어나갔다.
술판 따위는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중요한 것은 집단 행동, 통일성, 그리고 신속성이오.”
독고랑의 말에 사람들은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결코 주저하지 말고, 미리 약속된 대로 움직이시오.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오. 대열의 이탈은 자신과 동료의 죽음을 의미할 뿐이오.”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문파별로 진영을 나누시오. 그래야 호흡도 맞추기 쉽고 상하 관계도 명확하니까. 전장에서 지휘 계통이 흐트러지는 건 치명적이오.”
독고랑의 지적은 사람들이 생각 못 하던 부분까지 명확히 짚고 있었다.
“아, 그리고 각 문파에서 뛰어난 몇 사람을 뽑아 따로 훈련하는 것도 좋겠소. 상황에 따라 긴급 지원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장천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슬며시 독고랑의 눈치를 보았다.
“……혹 대협께서 그들을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독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소.”
장천호는 화색이 돌았다.
훈련과 통솔을 맡는다는 건 독고랑도 직접 싸움에 나서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독고랑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허나 훈련뿐이오. 내게는 섬겨야 할 분이 계시니까.”
장천호의 눈동자에 실망이 스쳤다. 그러나 곧 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기회야 또 있겠지.’
이 모든 일의 중심은 독고랑이다. 그가 아니면 그 누가 전장의 한복판에서 이들을 통솔할 수 있단 말인가?
장천호 자신이? 아니면 다른 문파의 문주들이?
이미 독고랑이 중심이 된 지금 상황에선 어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