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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43화 (243/530)

243화. 감사 그리고 조소

독고랑의 말은 분명 무례했다.

장천호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고, 다른 이들 역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아무리 독고랑이 검기발현의 고수라지만 이런 식으로 면박을 주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 언짢은 심사가 결국 누군가의 목소리로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흥. 누군 먹고 마시려고 왔나?”

“크흠.”

장천호가 급히 헛기침을 했지만 그 목소리는 이미 객청에 똑똑히 울려 퍼진 후다.

애써 웃으며 장천호가 무어라 하려고 할 때였다.

“지나가는 개도 웃겠군.”

독고랑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객청 가득한 무인들을 바라보며 독고랑은 말했다.

“적이 누군지도 모르고, 대책은 생각조차 안 하면서 먹고 마시러 온 것이 아니라고?”

후욱.

무인들의 날카로운 적의와 살기가 삽시간에 객청을 가득 채웠다.

중소 무관이라지만 그들의 경지는 결코 일반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낭인이라면 칼 밥을 먹고사는 이들이다.

그들이 한꺼번에 뿜어내는 기세는 절대 만만치 않았다.

심검문의 문주 장천호 역시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대협께서는 우리를 모욕하러 오신 것이오?”

그의 기세는 사뭇 남달랐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무인들을 대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주군께서는 내게 당신들을 도우라 하셨다.”

그러나 독고랑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객청 모두의 살기조차 독고랑에게 위협이 되진 못했다.

“허나 당신들은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니, 나도 주군께 그리 말씀드릴 수밖에.”

독고랑은 말을 마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자, 잠깐!”

장천호가 급히 말했다.

“지금 분명, 우릴 돕겠다 하셨소?”

다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 대단한 검기발현의 고수, 삼전무적 검객이 자신들을 돕겠다는 말만이 귀에 울리고 있었다.

“그렇다.”

장천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것이었다.

“허나 무의미하다. 그대들은 준비는커녕 각오조차도 전혀 없으니까.”

독고랑의 목소리에 장천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도 나름 준비는…….”

“적이 누군지 아나?”

심기가 불편한 장천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수로채 연합 아니오? 총채주인 철면무심 이무심이…….”

“수로채 연합이 아니다.”

독고랑이 장천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상관없겠지. 날아오는 건 이름이 아니라 화살이니까.”

객청에 침묵과 긴장이 내려앉았다.

흑도회를 괴멸시킨 검은 화살은 이들에게도 이미 공포의 대상이었다.

“크흠! 그에 대한 대책은 이미 세워져 있소이다!”

장천호는 짐짓 강한 어조로 말했다.

객청이 필요 이상으로 왁자지껄했던 건 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후한 보수를 약속했지만 결국 자신들은 화살받이로 쓰이게 될 것이라는 잔인한 현실과, 생각만 해도 섬뜩한 그 검은 화살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지금도 떨칠 수 없는 그 공포가 객청의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고 있었다.

“맹은 우리에게 방패를 주겠다고 약조했소. 이미 일부가 도착했고…….”

“크기는?”

갑작스러운 독고랑의 말에 장천호가 흠칫했다.

“그 방패가 온몸을 가릴 정도로 크던가? 아니, 그렇지 않겠지.”

독고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중요한 장비를 외부인에게 내어 줄 리가 없으니까.”

장천호는 말문이 막혔다.

독고랑의 지적대로였다.

온몸을 가리는 대형 방패는 매우 중요한 장비다. 관군 외에는 보유하기도 어렵고 물량도 많지 않다.

“바, 방패가 너무 크면 오히려 움직이기도 어렵고…….”

당황한 장천호가 수습하려 했지만 독고랑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방패를 들었다고 화살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대로 된 진(陣)을 이루지 않으면 방패는 짐에 불과하지.”

독고랑은 가차없이 말을 이었다.

“화살의 비가 쏟아지고 나면 대부분 땅에 쓰러져 신음하게 될 것이다. 방패로 가리지 못한 어딘가에 화살을 맞고.”

장천호는 신음을 흘렸다.

방패로 진을 이루어야 한다니, 생각도 못 한 일이다.

사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중소 무관의 제자들과 낭인들이다.

집단전이라고 해 봐야 소규모 분쟁일 뿐, 본격적인 전투를 경험한 바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엔.”

말을 잇는 독고랑의 눈빛은 서늘했다.

“적의 기병이 쓰러진 이들을 짓밟고 지나가겠지.”

“흑창기마대!”

누군가 탄식하듯 말했다.

공손세가의 본가를 불태웠다는 흑창기마대.

그 소문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다.

흑도회의 기마대를 패주시킨 것도 바로 흑창기마대 아니었던가?

“그러면 그 후에 과연 몇이나 살아남을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쏟아지는 검은 화살의 비와 흑창기마대의 말발굽이 마치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과연 그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공포와 불안이 그들을 짓누른 건 너무나 당연했다.

쾅.

객청에 있던 누군가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섰다.

“이게 무슨 짓이오! 대체 무슨 저의로…….”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슥.

심검문 문주 장천호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장천호가 독고랑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협께서는 전투에 익숙하시오?”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독고랑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변방에서 떠돌았던 적이 있소.”

“변방이라…….”

장천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변방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늘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당연히 군대와 군대 간의 본격적인 전투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통상적인 문파 간의 분쟁이라기보다는 전투라고 해야 옳았다.

화살이 쏟아지고 기마대가 난무하는데 전투가 아니면 무엇이랴?

으득.

장천호는 이를 악물었다.

술기운 같은 건 진작에 날아가 버렸다.

“……대협께 우리를 도울 호의가 있소?”

묻는 그의 눈빛에 웃음기는 전혀 없었다.

객청 가득한 무인들의 시선 역시 독고랑을 향해 있었다.

슥.

독고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지막한 경탄이 객청 전체에 흘렀다.

독고랑을 쳐다보는 눈동자는 하나같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만 더 묻겠소.”

장천호는 진지하게 물었다.

“어째서 우리를 돕고자 하시오?”

객청에 침묵이 감돌았다.

검기발현의 고수이자 삼전무적의 명호를 가진 검객, 독고랑이 왜 자신들을 도우려 하는 것일까?

독고랑이라면 거대 세가들조차 극진히 대접하며 모시려 할 텐데 말이다.

“이미 말했듯이.”

독고랑은 조금도 주저없이 답했다.

“주군의 명이오.”

‘주군……. 창룡검주 말인가?’

장천호는 급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창룡검주가, 명호밖에는 아는 것이 없는 그가 왜 그런 명을 내렸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분이 왜…….”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독고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가득한 충정은 모두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주군의 뜻이오.”

객청은 침묵했다.

장천호 역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남자라면, 그리고 칼을 든 무인이라면 지금 독고랑의 눈빛 앞에서 똑같은 것을 느낄 테니까.

주군을 향한 뜨거운 충성과 신뢰를 말이다.

“감사하오, 독고 대협.”

장천호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리로 오르시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말이오.”

그가 권한 자리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객청 중앙의 상석이었다.

저벅.

독고랑은 천천히 걸어갔다.

모든 무인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삼전무적 검객, 독고랑이 객청에 올랐다.

***

대의사청은 조용했다.

그러나 운현을 향한 대표자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이곳이 무림맹 대표자 회의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운 서기.”

제갈세가의 제갈연이 운현을 맞이했다.

그의 태도는 사뭇 정중했다.

운현 역시 예를 표했다.

“앉으시겠소?”

제갈연이 말했다. 대표자들을 마주보는 위치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감사의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락.

호기심과 경계, 혹은 적의가 뒤섞인 대표자들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그중에는 모용미의 부드러운 눈빛 역시 분명히 있었다.

“운 서기의 보고는 보았소. 그중에 확인할 내용이 있어 이처럼 운 서기를 부르게 되었소.”

제갈연은 신중히 말을 고르고 있었다.

애초에 이처럼 설명을 해 준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자 특례였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독선을 만난 것이 사실이오?”

누군가 툭 던지듯 말했다. 운현은 대표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입니다.”

“그럼 당문도 연관되어 있다는 뜻인가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뭇 젊고 활기차 보이는, 운현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모릅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당문의 일에 대해서라면, 제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독선은 분명 당문의 선택에 대해 언급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운현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당문이 아니다.

“남궁세가의 견해는, 정확히 누구의 것이오?”

“현 가주이신 철검 남궁벽 대협께 들었습니다.”

대표자들이 웅성거렸다.

남궁세가는 본디 자존심이 강한 데다 불가나 도가 문파와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다.

더구나 사실상 봉문한 상태인 지금, 신승의 사제인 운현에게 그런 것까지 말해 주었을까 싶은 것이다.

“사실이오?”

“남궁세가에 사람을 보내 확인하시면, 제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으음.”

사람을 보내 확인할 여유가 있다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 누군가 또 물었다.

“삼태상이 누구요?”

“모릅니다.”

운현은 대답했다.

“허나 철혈사왕 염중부를 꺾을 정도로 강한 자들입니다.”

“하! 철혈사왕을 꺾었다고?”

조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혁련세가의 대표자, 혁련필이었다.

“그런 얼토당토 않은 말을 우리더러 믿으란 말인가?”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철혈사왕은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다.

그를 꺾을 정도의 강자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독선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흥, 그러니 독선께 사람을 보내 확인하라는 것인가? 참으로 구차한 변명이로군.”

독선은 아무도 만날 수 없다.

운현이 독선의 이름을 빌려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혁련필은 그렇게 여겼다.

“우리 솔직히 말해 봅시다.”

혁련필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신승이 시켰소?”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혁련필은 멈추지 않았다.

“가서 거짓말로 불안을 조장하고, 가짜 소식으로 겁을 주어서 다시 신승께 매달리게 하라고, 그리 시켰느냔 말이오.”

‘혁련세가라…….’

운현은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문파 장문인들에게 취조 비슷한 것을 당할 때 가장 먼저 호통치며 윽박지른 사람도 혁련세가의 가주였다.

나중에 소림 장문인 태허가 운현에게 말해 주었다.

혁련세가는 신승과 악연이 있다고.

지금 혁련필의 태도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승께서 시키셨다면.”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 말입니다.”

본래 하고 싶은 말은 삼켰다.

‘그렇다고 한들 네가 감히 어찌하겠느냐’라는 말은 너무 천박하니까.

혁련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다른 대표자들은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사실 혁련필의 말은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문왕은 누구요?”

누군가 물었다.

“아니, 그보다 일대상인이 누구인지 밝혀야 하지 않겠소? 암천무제가 그의 수하라면…….”

“말도 안 되오! 그런 세력이 어찌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대의사청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숙하시오!”

제갈연이 말했다.

소란이 잦아들자 제갈연은 운현에게 물었다.

“운 서기의 말을 뒷받침할 증거나 증인이 있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주장의 신뢰성 자체를 문제 삼아 전부를 부인해 버리는 것 말이다.

“증인은 있으나, 아마도 이곳에 오시진 않겠지요.”

독선이 있고 남궁세가의 가주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모든 것은 끝난 후일 터이다.

혁련필이 득의의 미소를 머금고, 제갈연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운 서기의 보고는 근거 없음으로…….”

“잠깐만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하얀 손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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