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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42화 (242/530)
  • 242화. 객청의 무인들

    운현은 신승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몸조심 하십시오. 대사님.”

    “끝까지 사형이라고는 안 하는구나?”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 십 년쯤 지나면 생각해 보지요.”

    “헐헐, 십 년이면 내가 세상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아주 오래 사실 테니까요. 아마 저보다 더요.”

    ‘두 분’이라고 한 것은 신승 불영과 스승인 와불 선사다.

    “클클클.”

    신승은 주름진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오래 살 거라는 말에 좋아하는 걸 보니, 그도 늙긴 한 모양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그래라. 아, 잠깐.”

    막 돌아서려던 운현이 멈칫하는데 작은 주머니 하나가 날아왔다.

    휙, 턱.

    운현은 엉겁결에 주머니를 받았다.

    “이게 무슨…….”

    “선물이다.”

    신승의 말에 운현은 주머니를 살펴보았다.

    삼베로 만든 투박한 주머니 안에는 마른 찻잎이 들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쪽지 같은 건 없었다.

    “왜? 차 싫어하냐? 그럼 말고.”

    신승은 손을 뻗었다.

    운현은 얼른 주머니를 챙겼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먹을 때 내 생각해라.”

    신승이 입술을 비죽이더니 말했다.

    “귀한 차니라. 이 땅에선 구경도 할 수 없는 것이지. 맛은 그저 그렇지만.”

    맛이 그저 그러면 아무리 귀해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운현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신승이 선물을 줬다는 것이 기뻤다.

    나중에 이게 무슨 함정이 될지 몰라도 말이다.

    “뭐하고 섰어? 어여 가라니까?”

    “아, 네.”

    운현은 가볍게 예를 표하고 발을 옮겼다.

    혹시 또 부르는 것 아닌가 싶어 뒤돌아보았지만 신승은 아예 고개까지 돌린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와룡헌을 나왔다.

    슥.

    운현의 모습이 사라지자 신승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운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허어.”

    신승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손으로 찻잔을 꼭 쥔 채 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백척간두 진일보…….”

    그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신승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 역시,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

    와룡헌을 나온 운현은 지객당으로 향했다.

    관지부와 변기량에게 예를 표한 후, 운현은 지객당의 서탁에 앉아 지필묵을 펼쳤다.

    “후우.”

    마음을 가다듬은 운현은 조심스럽게 붓을 들었다.

    사락.

    천천히 시작했지만 곧 붓은 일필휘지로 종이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그러기를 잠시 후, 운현은 붓을 내려놓았다.

    달칵.

    습관처럼 가볍게 숨을 불어 먹을 말리고 나서 운현은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퇴고해야 할 곳이 있는지 살폈다.

    어찌 보면 서기의 일반적인 업무였지만 운현에겐 의미가 남달랐다.

    ‘음. 이 정도면…….’

    딱히 고칠 것이 없음을 확인한 운현은 조심스레 접어 봉투에 넣고 밀봉했다.

    생각보다 두툼해진 보고서를 쳐다보던 운현은 다시 붓을 들었다.

    붓은 종이 위를 잠시 내달리다 곧 멈췄다.

    탁.

    “후.”

    숨을 분 후 운현은 마찬가지로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봉인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두 번째로군. 누구는 이걸로 역사에 남을 명문장을 만들었는데…….”

    한숨이 나왔다.

    처음은 황궁에서, 그리고 두번째는 무림맹에서.

    하지만 그 어느것도 명문장은 되지 못하리라.

    두 통의 서류를 내려다보던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객당 책임자이자 상사인 관지부에게 다가갔다.

    “관지부 님.”

    서류에 파묻혀 있던 관지부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첫번째 서류를 내밀었다.

    “남궁세가에 다녀온 일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보고서요? 그런 건…….”

    관지부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어차피 정식 업무도 아니었으니 보고서를 올릴 필요는 없다.

    “대표자 회의에 올려 주십시오.”

    “대표자 회의요?”

    관지부는 이 두툼한 보고서가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관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운현은 밀봉하지 않은 얄팍한 봉투를 꺼냈다.

    “이건 제 사직서입니다.”

    관지부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그러나 사직서를 든 운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

    관지부는 즉시 대의사청으로 향했다.

    대의사청에선 이미 대표자 회의가 열리고 있었지만 관지부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회의를 방해할 정도로 이것이 중요한 안건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관지부가 대의사청에 들어간 것은 대표자 회의가 잠시 정회했을 때였다.

    “무슨 일인가?”

    제갈세가의 대표자이자 진행자인 제갈연이 물었다.

    고수인 그조차 연일 계속된 회의와 업무로 피로한 표정이 역력했다.

    “운 서기가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운 서기가?”

    “얼마 전 남궁세가에서 돌아왔습니다.”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세가라……. 그것도 하필 이런 시기에.’

    운현이라면 무얼 하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남궁세가에, 그것도 이런 때에 다녀오다니 공교롭기 이를 데 없다.

    ‘신승이 뭔가 또 꾸미고 있나?’

    그런 의심은 당연했다.

    하지만 제갈연은 결국 관지부가 내민 두툼한 보고서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바스락.

    밀봉을 열며 제갈연이 물었다.

    “운 서기는 지금 어디있나?”

    “지객당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기?’

    마치 자신이 운현을 부르기라도 할 듯한 말이다.

    ‘흠.’

    제갈연은 서류를 펼쳤다.

    심드렁히 읽어 가던 제갈연의 안색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파삭.

    제갈연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관지부 자네, 이 보고서를 보았나?”

    제갈연의 기세는 사뭇 심각했다. 관지부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운 서기가 봉인한 그대로 올린 것입니다.”

    본래라면 상사인 관지부가 먼저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신승의 사제인 운현이 밀봉한 것을 뜯을 담력은 관지부에게 없었다.

    “잘했네.”

    제갈연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대표자 여러분.”

    제갈연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의사청에 울렸다.

    대표자들은 이미 제갈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운 서기’라는 관지부의 말에 모두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소림은 물론이고 모용세가와 남해검문, 그리고 모든 대표자들이 하나같이 말이다.

    “다시 회의를 시작해야겠습니다. 지금, 즉시.”

    나지막한 한숨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지만 불만은 없었다.

    제갈연은 관지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네는 지금 가서……. 그건 뭔가?”

    관지부가 아직 봉투 하나를 더 들고 있음을 제갈연은 알아차렸다.

    “아, 이건.”

    봉투를 내밀며 관지부가 말했다.

    “운 서기의 사직서입니다.”

    제갈연은 물론, 대표자들의 표정이 한꺼번에 일그러졌다.

    ***

    관지부가 제갈연을 만나고 있는 그 시간.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대의사청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차피 날 부를 테니까.’

    괜한 관지부를 고생시키느니 아예 대의사청에 가서 기다릴 셈이었다.

    그렇게 대의사청으로 발을 옮기던 운현은 문득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하하하! 그야 이를 말인가? 내가 소싯적만 해도 말이야…….”

    “이봐! 여기 술 좀 더 가져오게!”

    그것은 객청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대의사청으로 가는 길에 객청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지객당의 변기량이 말한 적이 있다. 인근에서 모여든 무사들이 객청에 있다고.

    과연 객청에는 수많은 무인들이 있었다.

    차림새는 물론 병기도 다양해서, 그 넓은 객청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아니, 실제로 좁았다.

    말 그대로 항주 인근의 모든 문파들이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예 마당까지 판을 벌린 그들은 서로 크게 웃으며, 혹은 은근히 경계심을 내비치며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저들도 긴장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군.’

    그들의 눈빛에서 긴장이 엿보이는 건 당연했다. 자신들이 제일 먼저 적을 상대하게 될 것쯤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림맹이 은자까지 풀며 자신들을 모을까?

    그러나 그만큼 기대감도 컸다.

    위험하지만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위험이란 칼 든 자들에겐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슥.

    운현은 고개를 돌려 길을 재촉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독고랑이 아직도 객청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응?’

    저들 중에 독고랑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다.

    딱히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운현은 넌지시 물었다.

    “독고 제도 저런 적이 있었나?”

    “……낭인의 형편은 다들 비슷하니까요.”

    객청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독고랑이 대답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나? 어차피 대의사청에는 나 혼자 들어가야 하니까.”

    “아닙니다.”

    독고랑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제가 대의사청까지 모시겠습니다.”

    운현은 웃었다.

    “괜찮네. 이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자네가 한번 알아보게. 저들을 도와줄 수 있다면 더 좋고.”

    독고랑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그는 변방에서 난전과 집단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저들을 도우라니?

    “이들은, 말하기는 그렇지만 아마도 화살받이일 걸세.”

    객청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조금 도와준다 해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닐 테지. 안 그런가?”

    독고랑이 저들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꼈음을, 운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운현이 서기들을 염려하듯 말이다.

    그래도 독고랑은 머뭇거렸다.

    “저들을 도와주게.”

    운현이 쐐기를 박았다.

    독고랑은 즉시 답했다.

    “네, 대인.”

    그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

    객청은 시끌벅적했다.

    사람 한둘 아무리 드나들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엇.”

    “저, 저 사람은…….”

    객청을 메운 무사들 일부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순식간에 객청 전체로 번져 갔다.

    저벅, 저벅.

    조금 전까지는 들리지도 않았을 발소리가 모두의 귀에 또렷이 울렸다.

    마당에 앉은 이들은 물론 객청에 있던 이들조차 다가오는 한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삼전무적.”

    누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치 한 자루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뿜어내며 걸어오고 있는 사람, 그는 바로 삼전무적 독고랑이었다.

    턱.

    독고랑은 객청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무사들을, 자신을 향하는 그들의 시선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덜컹.

    “어서 오시오, 대협.”

    객청에 앉아 있던 중년 무인이 일어섰다.

    그는 독고랑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나는 항주 심검문의 장천호외다. 혹 삼전무적 검객이 아니시오?”

    그건 이미 알고 묻는 소리였다.

    “그렇소.”

    독고랑은 두 손을 들어 가볍게 예를 표했다.

    “독고랑이라 하오.”

    그의 예와 동시에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인사를 받았다는 것은 그에게 적의가 없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건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하하, 역시 그러셨군. 그러면 혹 대협께서도 이번 무림맹의 일에 함께하려고 오신 것이오?”

    묻는 장천호는 물론 다른 무인들의 눈에도 기대가 역력했다.

    “아니.”

    독고랑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주군을 모시고 왔을 뿐이오.”

    그 대답에 무인들은 실망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인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주군? 삼전무적의 주군이 누구지?”

    “창룡검주잖아. 자넨 그것도 몰랐나?”

    “아아, 그 스승이자 의형이라는…….”

    심검문 문주 장천호는 급히 표정을 관리하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럼 잠시 식사라도 함께하시는 것이 어떻소? 여기 있는 분들은 모두 항주의 영웅호걸들이시니, 기꺼이 대협을 환영할 것이오.”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낯뜨거운 말이었지만 독고랑은 상관하지 않았다.

    “필요없소.”

    그리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나는 이곳에 먹고 마시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순식간에 모든 무인들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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