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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41화 (241/530)
  • 241화. 오지선풍 옥애발휘

    독고랑은 차를 홀짝이던 신승에게 문득 말했다.

    “신승께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라.”

    신승이 와락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널 삼전무적이니, 우제니 하면 좋겠냐?”

    독고랑의 안색이 슬쩍 붉어졌다.

    “……선사께서는.”

    “클, 같이 다니더니 비위 맞추는 법이라도 배웠냐? 검객의 혀가 아주 칼보다 더 잘 돌아가는구나. 클클클.”

    웃던 신승이 문득 말했다.

    “걱정 마라.”

    담담한 목소리로 신승은 말을 이었다.

    “저놈에겐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신승의 눈동자도, 독고랑의 눈도 빛났다.

    그건 독고랑의 묻고자 했던 것이자, 듣고 싶었던 답이었다.

    “뭐, 못난 사제의 뒷바라지는 세상 모든 사형의 업보니까 말이다. 클클클.”

    독고랑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 감정 표현이 없는 그로서는 파격적일 정도였다.

    그 모습을 신승은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며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어쩌면 독고랑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기도 했다.

    바로 그때였다.

    탁, 탁.

    운현이 찻주전자와 찻잔을 차반에 받쳐 들고 돌아왔다.

    또르르륵.

    빈 찻잔에 새로 차가 차올랐다.

    신승이 만족한 표정으로 차를 음미하는 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독선 어르신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

    모르는 척했지만 신승은 이미 알고 있으리라.

    “무림맹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무너진다는 것은 패배와 또 다른 이야기다.

    운현은 무림맹이 무너질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반평생을 바치신 일인데…….”

    “되지, 걱정이 되고말고.”

    차를 한 모금 마신 신승은 긴 탄식을 내뱉었다.

    “어찌해야 이 세속의 집착을 벗고 깨달음을 얻어 훌훌 날아갈 수 있을지, 자나 깨나 걱정이다. 걱정이야.”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기, 그게 아니라 무림맹이…….”

    지긋이 자신을 쳐다보는 신승의 시선에 운현은 말을 삼켰다.

    신승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이제껏 없던 신승의 눈빛에 운현은 귀를 쫑긋 세웠다.

    “어떤…….”

    “한 청년이 있었다.”

    신승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는 무공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절기를 여럿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는 바로 지풍이었다.”

    “지풍요?”

    지풍이라면 손가락으로 내력을 쏘아 내는 것이다.

    깊은 내공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 가히 절기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의 지풍은 곧 강호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지. 그는 뼈를 깎는 수련을 거듭하여 자신의 절기를 갈고닦았다. 마침내 그는 검지 뿐만아니라 다섯 손가락에서 마음대로 지풍을 쏘아 내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신승은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생각해 봐라. 청년의 손에서 옥빛 기운이 일렁이면 여지없이 다섯 놈이 거꾸러지니, 어찌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확실히 그랬다.

    피어오르는 옥빛 기운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적들이라니, 생각만해도 꽤나 호쾌한 장면이 될 듯하다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절기를 옥애발휘(玉靄發揮, 옥빛 아지랑이가 빛나다)라 칭했고, 사람들은 청년을 오지선풍(五指旋風)이라 불렀다. 오지선풍 옥애발휘라는 명호는 곧 강호를 울리기 시작했지.”

    “오지선풍 옥애발휘…….”

    운현은 가만히 되뇌었다.

    과연 멋지긴 하지만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명호였다.

    “허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그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과 함께 적들도 많아졌다. 애초에 그는 자만하고 나서기 좋아하며, 남을 함부로 무시하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친구도 늘었지만 적은 그보다 더 빨리 불어나고 있었지.”

    착잡한 목소리로 신승이 말했다.

    운현은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의 실력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은 과도한 자신감을 가지거나 타인을 무시하기 쉽다.

    자신은 했는데 남이 못하니, 다른 이들을 눈 아래로 보는 것이다.

    게다가 성격조차 좋지 못하다면 시기와 질투도 자연히 많을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설상가상, 청년에게 문제가 생겼다. 옥애발휘를 완성한 후부터 수련을 계속할수록 그의 손가락이 점점 오그라들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렇게.”

    신승은 자신의 손가락을 갈퀴처럼 쥐어 보였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허탈한 탄식을 흘린 신승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청년은 미칠 것만 같았다. 밤낮으로 지법과 내공을 갈고닦았지만 손가락은 점점 더 굽어만 갔다. 결국 그는 수련을 중지하고 은밀히 의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지.”

    “허어, 저런…….”

    얼마나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을까?

    청년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아서 운현은 탄식을 흘렸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신승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그런 증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은밀히 찾아간 명의들조차 고개를 저을 뿐이어서 청년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청년의 적들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가 은밀히 약과 의원을 찾아다니는 걸 알아차린 것이지.”

    심각한 표정으로 신승은 말을 이었다.

    “적들은 함정을 팠다. 깊은 산중으로 유인당한 청년은 자신이 천라지망에 갇혔음을 깨닫게 되었지.”

    천라지망(天羅地網)은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포위를 뜻하는 말이다.

    “천라지망이라니, 그렇게 적이 많았습니까?”

    운현의 말에 신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원한을 산 놈 중에 제법 큰 세력을 거느린 놈이 있었다. 설마 개인적인 원수가 수백, 수천이 되겠냐? 있다 해도 그놈들을 언제 다 모아?”

    하긴 그렇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신승의 말이 이어졌다.

    “청년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옥애발휘뿐, 굽어가는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붙들고 그는 죽을 힘을 다해 옥애발휘를 펼쳤다. 그러나 적들은 점점 포위망을 조여 왔고, 청년의 손가락 역시 더욱 굽어만 갔지.”

    직접 손가락을 쥐어 보이며 신승은 사뭇 처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미친듯이 활로를 찾았다. 하지만 적은 집요했고, 죽어 가면서도 절대 길을 열지 않았다. 그때마다 청년의 상처는 늘어 갔고 손가락은 점점 더 굽어 갔다. 약지와 소지가 완전히 굽어 버린 후에는 이런 방법까지 사용했지.”

    신승은 엄지, 검지, 중지 셋을 갈퀴처럼 오그린 채 운현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슥.

    어쩐지 당장이라도 심장을 파낼 것 같은 느낌이라 운현은 슬쩍 몸을 피했다.

    “알겠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승은 손을 거두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새벽이 다가올 무렵, 하늘이 밝아올 때 청년은 결국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하늘을 바라보는 신승의 눈빛은 마치 그날의 하늘빛을 회상하는 듯했다.

    “청년의 온몸은 자신과 적의 피로 물들었고, 두 손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했다. 지풍을 쏘아 내던 손은 이미 완전히 굽어져서 마치 주먹을 쥔 것처럼 되어 버렸고 말이다.”

    찻잔을 매만지며 신승은 말을 이었다.

    “그가 탈진하자 마침내 배후도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날카로운 검을 들고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마치 사신처럼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원수의 모습을 보며 청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완전히 탈진한 탓인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인지 죽음의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신승은 지긋이 눈까지 감았다.

    “그 순간, 청년의 눈앞에 자신의 지나온 삶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청년은 깨달았다.”

    신승은 눈을 떴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삶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명성을 날리며 강호를 종횡하는 것도, 사람들의 선망과 질시가 섞인 시선도, 꽃 같은 아가씨들의 달콤한 목소리도 모두가 덧없었다. 그토록 화려하고 치열하게 달려왔는데, 정작 마지막 순간 뒤돌아 본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나지막이 불호를 외운 신승은 손에 든 찻잔을 매만졌다.

    “알겠느냐? 그 순간 청년을 두렵게 한 것은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자신의 생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그것이 청년으로 하여금 절망하게 한 것이다.”

    그 말은 운현의 가슴을 울렸다.

    출세를 위해 책을 파고들고, 황궁에 들어와 성공했다며 뿌듯해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음을 깨달았던 그날의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너라면 어찌했겠느냐?”

    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백 척 장대의 끝에서 한 발을 내디뎌라. 그리하면 세계가 그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리라[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 現全身].”

    신승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모든 집착을 버렸다. 살고 싶다는 미련도 내려놓았다. 그 순간, 움켜쥔 그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적을 향했다. 적은 흠칫했지만 그것이 최후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고 조소했지. 그대로 옥애발휘를 펼친다면 다섯 지풍은 틀림없이 청년 자신의 손바닥과 팔을 꿰뚫어 버릴 테니까.”

    운현은 슬쩍 주먹을 쥐어보았다.

    그러곤 곧 고개를 갸웃했다.

    네 손가락은 손바닥을 향해 있지만, 엄지만은 옆을 향하고 있지 않은가?

    “어, 저기 다섯이 아니라…….”

    신승의 날카로운 눈빛에 운현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이런 걸 따져 물을 때는 아니다.

    “청년은 손을 적에게 향한 채, 무념무상으로 옥애발휘를 펼쳐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말이다.”

    신승은 주먹을 쥐고 운현을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완전히 오그라든 그의 손에선……. 콰앙!”

    “으악!”

    운현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신승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주먹에서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왜, 왜 이러십니까!”

    신승이 뿜어낸 기세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외친 신승의 목소리에 더 놀랐다.

    그러나 신승은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흘렸다.

    “엄청난 권풍이 나가더라 이거다. 크크크크.”

    “네?”

    운현이 인상을 쓰며 반문했다.

    “뭐야, 이해가 안 되냐?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든 건 뭔가 잘못되서가 아니라 더 높은 경지를 향한 자연스러운 변화였다는 거다. 이렇게, 이렇게 말이다.”

    신승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설명했다.

    운현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럼 그 청년은…….”

    “당연히 엄청난 고수가 되어서 잘 먹고 잘살았지. 아, 그러면 너무 뻔한가? 차라리 동터 오는 여명을 향해 홀로 떠나는 게 낫나? 아니면 아예 열린 결말로…….”

    사뭇 심각한 신승의 표정에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대사님의 과거사라면서요?”

    “내가 언제?”

    신승은 인상을 썼다.

    “처음부터 말했잖느냐. 이야기라고. 이런 이야긴 들어 본 적 없지? 재미있지 않냐?”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는 듯했다.

    ‘백척간두 어쩌고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백척간두 진일보는 이미 신승 불영의 사부, 와불 선사가 써먹은 수법이다.

    그리고 와불이 말하기를, ‘남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이야기는 왜 하신 겁니까?”

    신승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라니,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한 거지. 너 나중에라도 이 이야기를 쓰려면 꼭 내게 허락을 득해야 하느니라. 마음대로 써먹었다간 크게 경을 칠 테니까.”

    “안 씁니다.”

    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운현은 신승을 지긋이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냥 재미로 하신 겁니까?”

    “헐, 녀석. 쳐다보는 눈초리하고는…….”

    신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이 이야기의 참뜻을 모르는 걸 보니, 너도 도를 깨닫기는 참으로 먼 인생이로구나.”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놈아.”

    신승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의 인생에는 죽고 사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있다는 것이다. 너는 무림맹이 어쩌니 저쩌니 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아직 도를 얻지 못했는데, 무림맹이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더 중요한 일’이라면 아마도 분명 불도를 닦는 것이리라. 조금 전 도를 얻지 못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운현은 물었다.

    “더 중요한 일이라면…….”

    그러나 신승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감조차 잡을 수가 없으니.’

    신승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그저 둘러대는 것인지, 혹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러니까 무림맹의 일에는 상관하지 않으시겠다는 거지요?”

    “그래. 너 때문에.”

    “저요?”

    운현이 반문하자 신승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벌써 말했잖냐. 본래 없었는데 네가 오는 바람에 여기 있게 되었다고. 없었는데 있었다니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 버렸다.

    운현이 인상을 쓰는데 신승이 짜증을 냈다.

    “대체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해야 만족하겠냐? 차 공양 끝났으면 어여 가! 소년은 쉬이 늙고 연애는 이루기 어려우니, 일촌광음이라도 아껴서 열심히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녀야 할거 아냐?”

    “끄응.”

    성현의 교훈을 이상하게 꼬아 버린 신승의 말에 운현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지적했다간, 인생의 의미는 학문 따위가 아니라 자손 보존에 있다는 둥 대화가 옆길로 빠져 버릴 것이 뻔했다.

    “알겠습니다. 여하튼…….”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신승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무림맹에 대해선 이미 마음을 비운 듯하고, 신승이라면 운현이 걱정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강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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