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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40화 (240/530)

240화. 패배를 전제로 한 대책

변기량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른 문파의 분들이 나서 주신 덕에 흑도회 분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안 그랬으면 다들 길에서 죽었을걸요?”

운현은 마음이 착잡했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나올 것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더욱 마음이 무겁다.

“게다가 철혈사왕까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맹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장 항주와 인근 무관들에 협조 공문을 보냈습니다. 물론 거대 문파와 세가들에도 전령을 보냈고요. 어쩌면 벌써 이곳을 향해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변기량은 들뜬 표정이었지만 운현은 여전히 착잡했다.

거대 문파와 세가에 보낸 전령은 아마도 장강조차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또 이렇게 바쁩니다. 이러다간 수적 떼 손에 죽기 전에 일에 치여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요. 하하하.”

웃는 변기량을 바라보며 운현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네? 뭐가요?”

“흑도회 분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러다 혹 해를 당하기라도 하면…….”

“아이고, 무슨 농담을.”

변기량이 손을 내저었다.

“천하의 무림맹이 어찌 수적 떼에 당하겠습니까? 설령 만의 하나 그런 일이 벌어져도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며 변기량은 말했다.

“적당한 곳에 숨어 있다가 슬그머니 도망가면 그뿐이니까요. 누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잡으려고 하겠습니까?”

적이 노리는 바는 무림맹이다.

그리고 그 목표에 하인이나 서기 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특별한 고위직이 아닌 한 말이다.

“뭐, 실직이 뼈 아프긴 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천하의 고수들이 모여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제아무리 철혈사왕이라도 무림맹은 못 건드립니다. 지금 객청에 모여 있는 무사들도 같은 생각일 거고요.”

“객청요?”

“네. 인근 무관에서 온 무사들 말입니다. 상황은 좀 위험해 보여도 지금이 기회라는 걸 알고 있는 거죠. 혹시라도 이참에 높은 분들 눈에 든다면 인생 역전이니까요.”

중소 무관과 무림맹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이 기회에 무림맹과 연이 생긴다면 문파의 위세는 단번에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시끄럽습니다.”

변기량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시장통처럼 다들 먹고 마시고, 아주 난리가 아닙니다. 무례하게 행동하는 자들은 없지만 수발하는 하인들이 아주 허리가 휠 정도라니까요? 아이쿠, 그러고 보니 이거 빨리 가져다줘야 하는데!”

서류 무더기를 들고 변기량이 일어났다.

운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룡헌은, 그대로지요?”

혹시 싶어 운현이 물었다.

변기량은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으니, 그대로겠지요?”

“모용세가 분들은요?”

“모용세가요?”

반문한 변기량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대론데요?”

***

지객당을 나온 운현과 독고랑은 모용세가 사람들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운 대인! 독고 대협!”

때마침 나오던 모용진이 운현을 보곤 반색을 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운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한달음에 운현에게 다가온 모용진은 예를 표한 후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모용진이 운현을 보며 말했다.

“마침 잘됐군요. 어서 드시지요. 다들 안에 있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운현은 가주 모용단천과 대제자 모용진, 그리고 외당당주 모용미와 자리를 마주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오, 운 대인.”

가주 모용단천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부드럽게 주위를 감싸 안았다.

“남궁세가에 갔던 일은 어찌 되셨소?”

“그 전에, 혹시 제가 보낸 서찰을 받으셨습니까?”

“서찰?”

모용단천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따로 받은 것은 없소.”

“역시 그랬군요.”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왕의 수하들이 관도를 지키는 것을 보았을 때 짐작했던 대로였다.

남궁세가를 출발할 때 운현이 보낸 서찰은 무림맹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다.

모용미가 운현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궁세가에 가셨던 일이 그리 좋지 못했던 모양이군요.”

“남궁세가의 일 자체는 잘 끝났습니다만.”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결과적으로는 좋지 못하군요.”

달칵.

찻잔을 들어 올리며 운현이 모용미에게 물었다.

“무림맹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지요?”

“이곳도 그리 좋지는 않았어요.”

모용미는 그간 무림맹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말해 주었다.

수로채 연합의 선전포고를 무시하던 무림맹이 흑도회의 괴멸에 충격을 받았고, 마침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려요.”

눈을 빛내며 모용미는 말했다.

“첫째는 도지휘사를 비롯한 지방관이 전부 자리를 비웠다는 거예요. 포정사와 안찰사까지, 전부요.”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예상대로 일대상인이 관부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 변화를 주목한 모용미의 안목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둘째로, 저는 무림맹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비록 관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지만…….”

“문제는 있었습니다.”

“네?”

“저는 남궁세가를 출발할 때 여러분께 서찰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서찰은 도착하지 못했지요.”

운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무림맹은 완벽하게 고립된 상황입니다. 심지어 군사, 행정, 감찰의 권한을 가진 지방관들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림맹은 적의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요.”

나지막이 운현은 말했다.

“결국 무림맹은 패배할 겁니다. 이것이 저와, 남궁세가의 결론입니다.”

모든 사람의 표정이 일시에 굳었다.

가주 모용단천도, 대제자 모용진이나 모용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살짝 입술을 깨문 모용미가 말했다.

“이제 어찌해야 하지요?”

“그건 여러분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아!”

되묻던 모용미가 무엇인가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문파나 무림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무림맹이 질 것을 전제로, 말이지요?”

“정확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싸움에서 무림맹이 지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맹의 패배는 그저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무림맹 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승이라는 구심점마저 없어진 지금, 무림맹의 패배가 가져올 후폭풍은 가히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알았어요.”

단호한 눈빛으로 모용미는 말했다.

“대책을 세우겠어요. 무림맹이 질 것을 전제로.”

“운 대인, 그럼 지금 쳐들어오는 자들이 일대상인의 세력입니까?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대제자 모용진이 물었다.

“정확히는 문왕이라는 자입니다만, 일대상인의 세력이 맞습니다.”

모용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철혈사왕까지 끌어들였다는 이야기군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문제는 철혈사왕이 아니라 삼태상이라는 자들입니다.”

“삼태상요?”

생소한 명호에 모용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철혈사왕 염중부가 그들의 공격을 채 십 초식도 받아 내지 못했다고, 독선께서 말씀하시더군요.”

“독선이라 하셨소?”

가주 모용단천이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철혈사왕조차 놀라운데, 환우오천존의 또 다른 한 사람 독선의 이름이 거명된 것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독선께서 제게 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모용미 역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설마 당문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뒷말은 잇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당문은 공손세가의 진상 조사를 위해 떠난 이후 아무런 연락도 없다.

어쩌면 운현의 서찰처럼 그들의 연락 역시 중간에서 탈취당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당문이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란 의심은 너무나 당연했다.

“철혈사왕이 채 십 초식도 받아 내지 못했다니…….”

가주 모용단천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철혈사왕 염중부는 환우오천존 중 한 명이다.

하늘 아래 가장 강하다는 다섯 명의 고수. 비록 검성이나 신승보다는 낮은 평가를 받지만 철혈사왕 염중부 역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절대 강자다.

그런 그가 십 초식도 채 받아 내지 못했다는 건 그야말로 천하를 뒤흔들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저들 중에 그런 고수가 있다면…….”

모용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림맹은 아무도 전력을 다해 싸우려 들지 않겠군요.”

“그게 무슨 소리냐?”

모용진의 말에 모용미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무림맹은 본질적으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협의체예요. 큰 손해를 볼 것이 분명하다면 과연 어느 문파가 앞장서려 하겠어요? 무림맹보다 문파의 안위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럴 수가…….”

모용진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용미의 말이 옳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림맹이 압도적 우위에 있을 때는 모두가 충성을 바친다.

그러나 무림맹의 패배가 분명해지면, 그 순간 맹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것이다.

이것이 무림맹의, 아니 무림과 강호의 생리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찻잔을 매만지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무리겠지요.”

“네, 그건 절대 무리예요.”

모용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무림맹이 수로채를 상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간다는 것은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데다.”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아무도 납득하지 않을뿐더러,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기반한 무림맹의 근간이 뒤흔들릴 테니 말이다.

“아무도 운 대인의 말을 믿지 않을 테니까요.”

“뭐?”

모용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이냐? 운 대인을 믿지 않을 거라니? 운 대인은…….”

“오라버니.”

모용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우리에겐 증거라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일대상인이나 문왕, 삼태상은 제쳐 놓더라도 철혈사왕이나 독선 역시 마찬가지예요. 물론 남궁세가에서 확인해 줄 수 있겠지만 시간이 걸리지요.”

굳은 표정으로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패배를 대비해야 한다는 운 대인의 경고는, 무림맹으로서는 그저 악의적인 저주나 마찬가지예요.”

그건 아주 냉정한, 그러나 대단히 현실적인 분석이었다.

“괜찮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저는 무림맹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하려 온 것입니다. 제 말을 믿어 주는 사람들을요. 그러니 다른 이들이 믿건, 믿지 아니하건 제게는 상관없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는 운현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음, 하지만.”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운현은 말했다.

“그래도 제 직무는 해야겠지요.”

“직무요?”

모용미의 물음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운현은 말했다.

“무림맹 대표자 회의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운현의 눈동자는 단호하게 빛나고 있었다.

***

모용세가의 거처를 나온 후,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와룡헌으로 향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름한 와룡헌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 운현을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딘지 외로워 보이는 것은, 무림맹이 신승과 결별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저벅.

“클.”

운현이 들어서자마자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지 말랬더니 기어이 찾아오는구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신승 불영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평상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구부정한 어깨와 앙상한 손, 주름진 얼굴에 가득한 불쾌한 표정 역시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정다워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제가 와도 없을 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없었다.”

신승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하지만 네가 오는 바람에 있게 됐잖아. 없었는데 있었다고. 에잉.”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신승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니어서 그저 그러려니 했다.

“차를 드릴까요?”

“마시고 있잖아. 안 보여?”

“그럼…….”

“그래도 가져와.”

투덜거리며 신승이 말했다.

“네가 해 준 차가 제일 괜찮으니까.”

무심한 그 목소리는 운현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운현이 얼른 집 뒤편으로 뛰어가고, 마당에는 독고랑과 신승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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