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무림맹의 대응
문왕과 그 수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조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삼전무적 독고랑을 모르다니, 그렇다면 조금 전 그것은 무림맹 서기에 대한 물음이었단 말인가?
“그가 무어라 하더냐?”
문왕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조장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대답했다.
“삼전무적 검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사는 자신을 무림맹 서기 운현이라 밝혔으며…….”
“과연!”
문왕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왔구나, 창룡검주 운현!”
운현이 돌아올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무림맹으로 보낸 서찰이 이미 문왕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림맹은 곧 죽음의 땅이 된다. 당연히 누구라도 피하려 하리라.
실제로 운현 역시 서찰에서 모용세가에 피신을 권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무림맹으로 돌아오다니?
“정말로, 돌아왔어!”
우직.
비단 부채가 문왕의 손에서 소리를 냈다.
문왕의 눈동자는 탐욕과 희열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조장은 오히려 혼란에 빠져 있었다.
‘뭐?’
창룡검주는 삼전무적 검객의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독고랑이 스스로 그의 제자이자 은인이며 의제를 자처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 창룡검주가, 그 서기라고?’
삼전무적 검객만큼은 아니지만 창룡검주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소문과 추측이 무성했다.
그런데 그 창룡검주가 자신이 만났던 서기라니?
조장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왕이 재촉하듯 물었다.
“또 무어라 했느냐?”
조장은 자신이 보고를 하던 중임을 기억해 냈다.
“아, 네. 그는 우리에게 녹림이냐고 했으며 문왕 저하의 수하에 있는지도 물었습니다. 저는 물론 아무 말도…….”
문왕의 눈동자가 번뜩 빛났다.
“그가.”
희열을 숨기지 않으며 문왕이 말했다.
“내 이름을 알더란 말이냐?”
“……아, 네.”
부채 뒤에 숨은 문왕의 붉은 입술에 미소가 걸렸다.
문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후, 후후후.”
나지막한 웃음 소리가 부채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지긋이 조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리고?”
“어, 그리고…….”
조장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항주로 가는 관도가 모두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습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문왕은 코웃음을 흘렸다.
팔락.
“흥, 창룡검주라면 그 정도야 당연하지.”
부채를 가볍게 팔락이며 문왕이 말했다.
상대는 문왕 자신의 모든 계략을 꿰뚫어 본 자다.
정찰조가 깔린 길목이 한 곳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알아채고도 남을 것이다.
“허, 허나.”
그러나 조장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삼전무적 검객의 의형이자 스승이라면 엄청난 고수거나 아니면 신선 같은 대단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비범함과는 한참이나 멀었던 그 무림맹 서기의 인상을 떠올리며 조장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 서기는 아주 젊어 보였습니다만…….”
조장은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을 짓누르던 기세가 살벌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죽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는 경고를 어겼다.
조용해진 천막 안에서 조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기 때문에.”
팔락.
문왕이 부채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그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젊다는 것은 천하 패권을 논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연륜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있지만 발전 가능성과 과감한 도전성 그리고 그의 시대가 오래 지속될 것을 분명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 외에 그가 한 말이 있더냐?”
문왕이 물었다.
“어, 없습니다.”
조장이 얼른 답했다.
문왕은 만족한 표정으로 부채를 가볍게 저었다.
수하는 즉시 그 뜻을 받들어 조장을 물러나게 했다.
몸을 일으킨 조장은 고개를 조아린 채 뒷걸음으로 천막을 나갔다.
사박, 사박.
수하와 단둘이 남게 된 문왕은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창룡검주라니, 창룡검주라니!”
그가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인의 절대적 관심사는 바로 ‘문서의 주인’이다.
그리고 창룡검주는 그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아닌가?
“그를 손에 넣는다면…….”
문왕은 희열을 숨기지 못했다.
하얀 손을 문왕은 갈퀴처럼 강하게 그러쥐었다.
“모든 것은 내 뜻대로 된다.”
옆에 있던 수하가 나지막이 말했다.
“상인께 보고를…….”
“안 돼!”
고개를 홱 돌리며 문왕이 말했다.
수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아직은 아니야.”
으득.
문왕은 이를 갈았다.
“보고는 한다. 그러나 창룡검주를 내 손에 쥔 후다. 알겠나?”
번들거리는 문왕의 눈동자 앞에서 수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존명.”
문왕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내렸던 부채를 천천히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크큭, 크크큭.”
의자에 몸을 기댄 문왕은 허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수하는 묵묵히 예를 표한 후 그 자리를 물러났다.
이제 문왕에겐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륵.
화려한 천막 안에는 이제 문왕 혼자밖엔 남지 않았다.
“큭큭큭.”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그 나지막한 소리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멈추지 않았다.
***
항주에 들어선 운현과 독고랑을 맞이한 것은 유난히 흥청거리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마치 커다란 축제가 열리기라도 한 듯, 항주 거리는 환한 등불과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응?”
마차에 탄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항주야 원래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가게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사람들로 북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히 수로채와 녹림이 무림맹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도, 항주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시끌벅적해 보였다.
따각, 따각.
“이건 예상외로군.”
운현은 마차를 모는 독고랑에게 말했다.
아무리 무림맹이 있다 해도 최소한의 위기의식 같은 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운현과 독고랑은 장강을 건너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모든 배와 장사치들이 몸을 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 펼쳐진 항주의 모습은 걱정이나 불안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소식은 들었을 텐데, 다들 걱정조차 안 하는 걸까?”
“아닙니다.”
독고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긴장과 불안을 덮어 버리려고 과도하게 들뜬 거리 말입니다.”
흥청거리는 번화가를 쳐다보는 독고랑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 말에 운현은 새삼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아.’
독고랑의 말대로였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엔 하나같이 여유가 없었다.
웃는 사람도, 떠드는 사람도, 모두가 무언가로부터 도피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마치 변방에 온 것 같군요.”
독고랑의 말에 운현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변방이라…….”
변방은 전란의 위험이 가득한 곳이다.
군을 유지하기 위해 조정은 돈과 물자를 풀고, 그 돈과 물자는 변방 지역을 흥청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된 번영일 리가 없다.
똑같은 일이 지금 이곳 항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앞의 화려한 모습은 역설적으로 저들의 불안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각, 따각.
말없이 거리를 지켜보던 운현이 문득 독고랑에게 물었다.
“변방에 있었나?”
“잠시 흘러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본래 천하를 홀로 떠돌던 독고랑이니 변방이라고 가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생각보다는 만족스럽지 못하더군요.”
그것이 보수나 환경이 아니라 적수에 대한 것임을 운현은 알았다.
“그랬을 걸세.”
의형 일충현이 해 준 말들을 떠올리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이 최고의 수련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짧은 시간에 작은 차이로도 승패가 갈리다 보니 한계가 명확하거든. 깊이 있는 무학과 정교하고 섬세한 검로는 오히려 체계적인 수련이나 비무가 아니고선 얻기 힘드네.”
변방의 실전은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목표다.
물론 전투 자체가 길어질 수도 있지만, 경지에 이른 무인에겐 그저 단순한 칼질의 반복에 불과해진다.
정교한 검식이라든가 깊이 있는 무학이 발전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독고랑이 동의를 표했다. 그가 적수를 찾아 천하를 헤맨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그래도 여러 가지를 겪어 볼 수 있었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랑이라면 결코 의미없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각, 따각.
그사이 마차는 어느새 무림맹에 이르렀다.
“무림맹입니다.”
운현은 무림맹 정문을 쳐다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 앞은 번화가보다 더 번잡했다. 드나드는 사람과 물자를 실은 마차가 주위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
“역시 무림맹이 돈을 풀었군.”
사람들은 신분 확인도 없이 검을 차거나 짐을 지고 무림맹 정문을 드나들었다.
정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눈을 부라리며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제지하거나 짐을 확인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운현의 경우는 예외였다.
“멈춰라.”
두 사람의 무사가 운현의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그들의 창날은 마차를 겨누고 있었지만 다분히 형식적이었다.
다른 무사들은 물론 분주히 드나드는 사람들도 이쪽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따각.
마차가 멈추고 운현은 마차에서 내렸다.
“수고하십니다. 저는 지객당 소속 운현입니다.”
운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예를 표했다.
“아, 운 서기.”
무사 중 한 명이 운현을 알아보았다.
“어디 갔다 오는 모양이구려. 들어가시오.”
창을 거두며 그가 말했다.
자리로 돌아가려는 그를 운현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맹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응? 아직 소식 못 들었소?”
무사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수로채와 녹림이 쳐들어온다 하오. 그래서 맹에서 항주와 인근 무관에 협조 요청을 내렸소.”
‘협조 요청’과 ‘내렸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느 의미에선 사실이었다.
감히 무림맹의 요청을 무시할 간 큰 문파는 없을 테니 말이다.
“덕분에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로 지금 맹이 난리도 아니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지급하겠다는 은자가 얼마인데…….”
분주한 정문을 바라보며 무사는 혀를 찼다.
“덕분에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운 서기도 어서 들어가 보시오.”
“알겠습니다.”
운현이 예를 표했지만 무사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무림맹이 생각보다 제대로 대응하는군요.”
독고랑이 말했다.
무림맹의 대응은 운현이 보기에도 적절했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사람을 모으고 은자를 풀어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 은자가 항주 거리를 흥청이게 만든 것이고 말이다.
“그렇군. 제대로 된 대응이야.”
운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다만 현실 인식에선 큰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네.”
사람과 물자로 북적이는 무림맹 정문을 보는 운현의 씁쓸한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
무림맹으로 돌아온 운현은 우선 지객당으로 갔다.
지객당은 예전 천하무림대회 때만큼이나 바빠 보였다.
항주 인근의 모든 문파와 무인들은 물론이고, 무림대회를 보러 왔던 낭인 무사들까지 몰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운 서기님!”
관지부는 자리에 없었지만 변기량이 운현을 보고 반색을 했다.
평소 운현을 추종하듯 따르던 변기량은 하소연처럼 그간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흑도회 분들은 온몸에 시커먼 화살을 박은 채로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왔습니다.”
이미 독선의 말을 통해 대강 짐작하고 있던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흑도회가요?”
“네. 회주이신 진무량 대협께서 돌아가시고 묵혈엽 대협도 크게 다쳤습니다. 살아 돌아온 흑도회 분들도 간신히 숨만 붙어 있더군요. 의원들이 밤새도록 그 시커먼 화살을 뽑아냈는데……. 허이구.”
변기량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검붉은 피가 엉겨붙은, 유난히 짧고 굵은 그 화살들은 마치 몸을 파고 들어간 독사처럼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