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낭인 전설
따각, 따각.
메마른 관도에 마차 소리가 외로이 울렸다.
운현은 지나는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대인.”
문득 독고랑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상한 자들이 있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쭉 뻗은 관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어디에…….”
“조금 전 관도 저편에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독고랑은 눈이 좋다.
운현은 그제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거리가 먼 것이다.
“이런 한적한 관도에 수상한 사람들이라…….”
운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확인해 보세.”
“네, 대인.”
독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관도변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조장님.”
조장이라 불린 사내는 반쯤 졸던 참이었다.
“왜?”
짜증 섞인 조장의 말에 수하가 답했다.
“마차입니다.”
“어느 쪽인데?”
그는 눈도 뜨지 않고 심드렁하게 물었다.
“항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쯧.”
조장은 혀를 찼다.
그리고 그제야 눈을 뜨고 관도 저편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마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보낼까요, 아니면 막을까요?”
그들이 받은 명은 제법 복잡했다.
통행인이 누구인지, 진행 방향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세밀한 지침이 내려와 있었다.
얼마 전 이곳을 지나간 무림맹 척후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 밖의 경우라면 판단은 전적으로 조장에게 달려 있었다.
“위치로.”
“네.”
수하들 아홉은 즉시 관도 양측으로 흩어져 몸을 숨겼다.
조장 역시 최대한 몸을 낮췄다.
“표기가 보이냐?”
일반적으로 마차는 그 소속을 나타내는 작은 기를 단다.
어지간한 표국은 물론이고 거대 문파나 세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없습니다. 무복을 입고 있지만 잘 알려진 문파는 아닌 듯합니다.”
눈이 좋은 수하가 답했다.
마차에 호위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일 저들이 일반인이라면 모습을 드러낼 필요조차 없었다.
조장은 살짝 긴장을 늦췄다.
“무림맹으로 가는 전령 같지는 않고?”
“아닌 것 같습니다.”
전령은 보통 말을 탄다.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미친듯 관도를 달려야 옳으리라.
“……조금 더 두고 보자.”
생각하던 조장은 그렇게 말했다.
작은 마차 하나뿐이라는 것도 그가 여유를 갖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대기.”
조장이 낮게 말했다.
그들은 그대로 몸을 낮춘 채 마차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따각, 따각.
작은 마차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장이 자신의 오판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윽.’
마차를 모는 무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조장은 상대가 절대 만만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조장은 즉시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사락.
수하들은 더욱 몸을 낮추며 기척을 숨겼다.
조장 역시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제발…….’
간절한 마음으로 조장은 기원했다.
‘그냥 지나가라. 제발.’
멀리서, 그것도 단 한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 조장은 등에 섬뜩한 한기를 느껴야만 했다.
저자는 결코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숨을 죽인 조장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마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조장의 간절한 기원도 무색하게, 마차는 그들이 숨어 있는 바로 코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따각.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묵직한 음성이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져 내렸다.
“나와라.”
‘큭.’
조장은 주저했다.
하지만 이대로 버텨 봤자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잠시 후, 조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스럭.
수풀 사이로 일어선 조장은 그제야 상대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헉. 무슨 눈빛이…….’
상대는 마치 한 자루 칼 같은 사내였다.
날카로운 눈빛은 물론이고 풍겨나는 기세 또한 결코 범상치 않았다.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면…….”
“나오라고 말했다.”
사내의 시선은 아직 숨어 있는 이들의 위치를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조장은 입술을 깨물고 가볍게 손짓했다.
부스럭, 부스럭.
숨어 있던 수하들이 모두 몸을 일으켰다.
조장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신경을 거스르게 했다면 죄송하오. 허나 우리는 그대에게 위해를 가할 의사가 없소.”
최대한 공손하게 조장이 말했다.
그러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조장의 입안이 바싹 말라 갔다.
‘이거 아무래도…….’
순순히 넘어가긴 글렀다는 생각을 조장이 할 때였다.
달칵.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내렸다.
전형적인 문사 차림의 그는 조장을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
“잠시 실례합니다.”
“아, 네…….”
조장은 얼떨결에 그의 인사에 답했다.
하지만 이어진 문사의 말에 조장은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녹림의 분들 같은데, 혹 문왕의 수하에 있습니까?”
조장은 경악했다.
문왕이라는 이름은 수로채와 녹림에서도 채주들에게나 알려진 이름이었다.
조장 역시 이 임무를 맡기 전에는 들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이 문사 차림의 청년이 입에 올린 것이다.
“다, 당신은 누구시오?”
조장이 물어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사 청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운현입니다. 무림맹 서기지요.”
그 대답은 조장을 더욱 당혹하게 했다.
‘무림맹 서기?’
자신 같은 녹림도에게 무림맹 사람이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것도 처음이고, 서기가 그러는 것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조장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 혼란을 정리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직 제 질문에 답을 안 하셨습니다.”
그 말에 조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정확히는 독고랑이 쏘아 낸 살기가 그를 놀라게 한 것이다.
“우, 우리는 신녹림이오!”
신녹림, 곧 ‘새로운 녹림’이라는 뜻이다.
운현의 짐작이 맞은 것이다.
문왕의 수하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장의 반응이 이미 대답을 해 주었다.
“그렇군요. 그럼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조장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독고랑의 살기가 자신의 살갗을 찌르고 있어도 이것만은 말할 수 없었다.
“흠.”
그 반응을 지켜보던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슥.
관도 저편을 지긋이 바라보던 운현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항주로 가는 관도가 모두 이런 상황이겠군요.”
조장은 흠칫했다.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의 말을 확인해 주는 셈이 될 것이다.
결국 조장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운현은 몸을 돌렸다.
“가세, 독고 제.”
바로 그때였다.
“자, 잠깐!”
조장이 급히 말했다.
독고랑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번에 날아왔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물어야 했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그냥 가게 했다고 보고했다간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살려면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내 이름이라면 이미 밝혔습니다만…….”
의아해하던 운현이 문득 독고랑을 보았다.
“아, 이쪽은 독고랑입니다.”
‘독고랑.’
조장은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사이 운현이 마차에 오르고, 독고랑 역시 조장을 한번 쳐다본 후 마부석에 올랐다.
따각, 따각.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석상처럼 굳은 조장과 수하들을 뒤로하고, 마차는 관도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차가 관도 저편으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조장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조장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우.”
“조, 조장님. 저들은 대체…….”
수하가 말했지만 조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고랑, 분명 들어 본 이름인데? 독고랑, 독고랑……. 헉!”
조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삼전무적!”
“네?”
“삼전무적 독고랑!”
“사, 삼전무적 검객요?”
수하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천하를 낭인처럼 홀로 떠돌다 마침내 검기발현의 절정고수가 된 사람.
무림맹 한복판에서, 그것도 내력을 전혀 쓰지 않고 공손세가의 대제자를 꺾어 버린 진짜 무인.
삼전무적 독고랑의 이야기는 강호 무림에 이미 자자했다.
비록 수로채와 무림맹의 사태에 묻힌 감은 있으나, 낭인들이나 중소 문파의 무인들에게 독고랑의 이름은 말 그대로 전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고독객이라는 과거의 명호보다 이제는 삼전무적으로 더 유명한, 검객 독고랑.
수하는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저 사람이 바로 그 삼전무적 검객이었다니…….”
그의 살벌한 눈빛과 기세가 넘치도록 납득이 가는 순간이었다.
조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삼전무적 검객이라면 아무것도 못 하고 통과시킨 것을 문책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누굴까요?”
“뭐?”
조장이 돌아보는데 수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 말입니다. 그 뭐더라……. 운영?”
“무림맹 서기인 운현이라고 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조장이 말했다.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 대화의 주도권은 분명 그 운현이라는 사내가 쥐고 있었다.
바로 옆에 삼전무적 독고랑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정체가 뭘까요?”
조장도 그걸 알 수 없었다.
서기라고는 했지만 정말일까?
그가 침묵하자 수하가 넌지시 말했다.
“……그대로 보고해도 될까요?”
“해야지.”
조장은 나지막이 답했다.
이미 관도 저편으로 사라진 마차를 떠올리며 조장은 낮게 말했다.
“가자.”
휙.
조장은 수하 한 명과 함께 즉시 자리를 떴다.
남은 여덟 명의 수하들은 다시 몸을 숨기고 관도 양편을 주시했다.
그러나 오늘 하루 내내 그러했듯, 관도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화려한 휘장 앞에 앉아 있던 문왕은 고개를 들었다.
“창룡검주라고?”
수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정찰조의 보고에 따르면 무림맹 서기 운현이라 하는 자가 항주로 향했다고 합니다.”
문왕의 눈동자가 빛났다.
“정찰조의 조장을 데려와라.”
사락.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문왕이 말했다.
“직접 들어야겠다.”
문왕이 일개 정찰조의 조장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수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이미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문왕을 만족하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찰조 조장이 문왕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우와.’
조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이 천막이지 사방으로 휘장을 두른 모습은 마치 커다란 대전에라도 들어온 듯했다.
그때 조장의 귓가에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짧고 간결하게, 여쭈시는 것만 대답하도록.”
그 차가운 목소리에 조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쿵.
그는 지체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무, 문왕 전하를…….”
“네가 그를 보았느냐?”
조장의 예가 끝나기도 전에 문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여인처럼 가느다란 목소리였지만 조장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문왕의 곁에 선 수하의 기세가 자신을 지긋이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 네. 그러니까 제가…….”
상황을 설명하려던 조장은 움찔했다.
무형의 기세가 갑자기 날카롭게 변했기 때문이다.
‘아차.’
그제야 조장은 조금 전의 경고를 떠올렸다.
짧고 간결하게, 묻는 것만 대답할 것.
“네, 그렇습니다.”
“모습이 어떠하더냐?”
“삼전무적 검객은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그 기세가 사뭇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일행이라는 무림맹 서기는 평범한 문사였습니다.”
문왕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 서 있던 수하가 즉시 말했다.
“삼전무적 검객은 독고랑입니다. 무림맹 장외 비무에서 공손세가의 대제자를 꺾은 이후 삼전무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창룡검주의 의제라 하던 자 말이구나.”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