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먼 곳의 격변들
“약속하겠습니다.”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내용은 듣지도 않은 채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선은 희미하게 웃었다.
“……당문을 부탁한다.”
“네?”
그건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말이었다.
“저기, 저는 천하제일문 같은 건…….”
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게다가 이미 한번 거절한 것이 아닌가?
“그런 건 필요없다.”
독선은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택했으나 당문은 너를 택하지 않았다. 연아가 이 자리를 떠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당설련이 떠난 것은 그저 자리를 비킨 것이 아니었다.
“이제 당문은 너의 적이 되고 결국은 네게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네 손에 당문의 명운이 달리게 되거든.”
슥.
독선은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운현이 급히 제지하려 했으나 독선의 고개는 이미 숙여진 다음이었다.
“나를 보아 부디 당문의 이름만은 보전케 해 다오.”
“어르신, 이러지 마십시오.”
간곡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으나 독선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르신!”
그러나 독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운현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이 하나뿐임을 알았다.
“……반드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깊이 명심하여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어르신.”
독선이 고개를 들었다.
“……고맙다.”
말하는 독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가문에 대한 그의 애정과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운현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락.
독선이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가 꺼낸 것은 은은한 보라색이 도는 옥패였다.
“이것은 당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태상령패다. 본래 외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지만.”
슥.
독선은 운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에 보라색 옥패를 쥐여 주었다.
“이것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당문은 무엇이든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외인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에 무심코 받았던 운현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런 건…….”
“내가 줬다는 말은 하지 마라.”
독선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던 것인데 우연한 기회에 되찾을 수 있었다. 나도 노후에 믿을 만한 구석 하나는 있어야겠다 싶어서 말을 안 했을 뿐이지. 클클.”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사실 외인에게 의미가 없다는 독선의 말은 옳았다.
이걸 들고 운현이 명을 내린다 한들 당문의 사람은 아무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행여 이 옥패가 운현에게 있음이 알려진다면 당문의 체면은 땅에 나뒹굴 테니 말이다.
즉, 운현은 당문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게 된 것이다.
“왜?”
멍하니 바라보는 운현에게 독선이 묻는다.
“아니, 그게…….”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쩐지 불영 어르신과 비슷하신 것 같아서…….”
독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운현은 얼른 입을 다물고 슬그머니 옥패를 품에 넣었다.
“크흠.”
독선은 불편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한 가지 더, 네게 알려 줄 것이 있다.”
운현을 보며 독선이 말했다.
“일대상인의 목적은 무림맹이 아니라 ‘문서의 주인’이다.”
그건 운현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창룡검주가 바로 그 문서의 주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다행히 저들은 너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니 삼태상과 마주치지도 말고, 저들에게 네 이름을 밝히지도 마라.”
심각한 눈빛으로 독선은 말을 이었다.
“네가 창룡검주라는 것을 아는 순간 저들은 결코 너를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니 말이다. 알겠느냐?”
독선이 다짐하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무림맹보다 창룡검주를 더 원한다.
즉 어찌 보면 무림맹보다 운현이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운현은 독선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죽음의 땅이 될 항주 무림맹을 향하여.
***
사박.
북해빙궁의 거대한 대전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가벼운 발소리와 옷자락 끌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발걸음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대전을 가득 메운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박, 사박.
삼궁주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감격해하는 사람도, 적의를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감탄하는 시선도, 혐오하듯 바라보는 눈길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북해빙궁의 대전에 있는 모든 용사와 부족장, 그리고 소궁주들은 삼궁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박.
삼궁주는 발을 멈췄다.
그곳에 상아로 조각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비록 의자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 의자의 무게는 수많은 생명보다 더 무거웠다.
바로 북해의 일궁주, 다음 빙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락.
삼궁주는 몸을 돌렸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며 삼궁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혹독한 땅에서 우리는 전사로 살아왔습니다.”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빙궁의 대전에 울려 퍼졌다.
“우리는 설령 패배할지언정 비굴하지 않았고, 승리했을 때에도 탐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삼궁주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대전을 가득 메운 북해의 용사와 부족장 들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북해의 고귀한 기상은 더럽혀졌습니다.”
삼궁주의 눈빛이 처연하게 일그러졌다.
그 매력적인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게 할 정도였다.
“적들의 간교한 모략은 북해를 분열시켰고, 우리는 서로 다투었으며 형제를 향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전사의 긍지는 땅에 떨어졌으며 북해의 율법은 모욕당했습니다.”
젊은 용사들은 물론이고 나이 든 부족장들조차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삼궁주의 눈빛에 떠오른 수치와 분노, 그리고 모욕감이 그들의 표정에도 가득했다.
슥.
삼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빙궁의 일궁주이자 빙제님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대궁주로서 나는 선언합니다.”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복수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적의에는 적의로, 증오에는 증오로 기꺼이 되갚을 것입니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의 목소리는 격동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지금 대전에 있는 모든 이들의 눈빛이 그녀와 함께 격동하고 있었다.
“이제 북해는 두 번 다시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며 결단코 모욕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천하는!”
펄럭, 차앙.
금빛 수실을 수놓은 소맷자락이 화려하게 나부끼고 날카로운 검 한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빛 아래 곧게 솟은 서늘한 칼날은 단번에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북해의 진정한 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대전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오오오오오!”
엄청난 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웠다.
젊은 용사들도, 나이 든 부족장들도, 여자든 남자든 할 것 없이 모두가 손을 치켜들며 격정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선언으로 인해 북해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와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용사들은 환호하고 포효했다.
대전을 메운 용사들의 부르짖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한가운데 당당히 선 그녀, 빙궁의 새로운 일궁주이자 북해 빙제를 대리하는 대궁주의 시선은 머나먼 남쪽을 향해 못 박혀 있었다.
***
자금성의 밤.
어둠과 침묵 속에 온갖 모략이 꿈틀거리는 이곳에서 한 사람이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탁탁탁탁.
붉은색 태감의와 옷자락 사이로 흔들리는 옥패는 그가 상당히 높은 신분임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는 흔한 시종 하나 없이 홀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자금성의 궁과 전 들 사이를 능숙하게 빠져나간 그는 잠시 후 커다란 대전 앞에 멈춰 섰다.
“부르셨나이까? 마마.”
“들어오게.”
안에서 들린 목소리에 태감의를 걸친 이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깊숙히 허리를 숙인 채 공손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사박.
대전 안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용포를 걸친 중년의 사내는 용이 조각된 붉은 의자에 앉아 상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자박.
중년인 앞에 선 태감이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께 소신…….”
“예는 필요없다 하지 않았는가?”
용포를 걸친 중년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감은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소신이 어찌 마마께 무례를…….”
슥.
그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중년인이 붉은 비단으로 된 두루마리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황상 폐하의 어보성지(御寶聖旨)일세.”
태감은 즉시 반응했다.
팍, 팍.
과장된 동작으로 소매를 턴 태감은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쿵.
어보성지는 황제의 어보, 즉 옥새가 찍힌 칙서다.
황제를 직접 배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태감이 극진한 예를 행한 것도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신이 황상의 성지를 받드나이다.”
태감이 머리를 찧으며 말했다.
사뭇 진지한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은 마치 여자나 어린아이의 것처럼 가늘었다.
“받게.”
용포를 입은 중년인이 말했다.
태감은 고개를 숙인 채 무릎걸음으로 걸어왔다.
지극히 경건한 태도로 두 손을 뻗은 태감은 중년인이 내민 붉은 비단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중년인이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는 동창 병필태감일세.”
동창은 황제 직속의 특무기관이다.
설령 대신이라 할지라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투옥할 수 있으며, 금의위조차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절대의 권력 기관, 그것이 바로 동창이다.
비록 동창의 수반은 제독동창이지만, 실무를 전담하는 병필태감이야말로 실세 중의 실세라 할 수 있었다.
“이젠 자네를 공공이라 불러야겠군. 하하하.”
공공은 태감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태감은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렸다.
“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 감히 말로 다할 수 없나이다.”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조차 습관적인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을 중년인은 알고 있었다.
태감은 고개를 들었다.
“신(臣), 미력하오나 목숨을 바쳐 반드시 마마의 뜻을 이루겠나이다.”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태감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용이 조각된 붉은 의자에 앉은 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넓은 천하에서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네뿐이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태감을 똑바로 바라보며 중년인이 말했다.
“자네가 쓰러지는 날이, 내가 죽는 날일세. 알겠나? 박 공공.”
쿵.
태감은 바닥에 고개를 찧었다.
이마가 피로 물들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쿵, 쿵.
세 번 고개를 조아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가 흐르는 이마 아래로 보이는 그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신은 반드시 마마의 세상을 보고야 말 것입니다.”
그 대답은 중년인을 흡족하게 했다.
태감은 조용히 대전을 물러나왔다.
탁.
문이 닫히고 태감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붉은 담과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이중 지붕.
달빛 아래 빛나는 그 모습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듯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감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푸른 달빛 속에 태감이 떠올리는 것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평범한 문사의 모습이었다.
“호홋.”
문득 가느다란 목소리로 태감이 웃었다.
하지만 상념도 잠시,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은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탁탁탁탁.
태감의 모습은 전과 궁 사이로 금방 사라졌다.
뛰는 듯 빠른 걸음걸이와 가느다란 웃음소리, 그것은 예전 박 환관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버릇이었다.
1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