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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36화 (236/530)

236화. 후수(後手)의 선(先)

와불은 운현이 심안을 열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 후에 와불이 말하기를 ‘그래서 눈만 높아졌다’느니, ‘그 꼴에 황실의 공주만 쳐다본다’느니 하며 투덜거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와불의 비유니까.

“그러면 그다음은 그저 검을 가져갈 뿐입니다. 강한 힘일수록 조금만 뒤틀려도 쉽게 길을 잃거든요.”

슥.

독선이 손가락으로 운현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독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 검식은 무엇이었더냐?”

운현이 심안으로 천향접을 보았음은, 비록 도저히 믿어지진 않았지만, 이제 알았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운현의 검식이다.

천향접, 아니 온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는 듯하던 바로 그 검로 말이다.

“그건.”

조금 쑥스러운 듯 운현은 말했다.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날카로운 검이지요.”

검기조차 실리지 않은 검으로 운현이 펼쳐 낸 것은 백호실전검의 첫번째, 예검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다만 상대보다 조금 먼저 도달할 뿐인, 그런 검입니다.”

빠르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또한 빠르다는 것은, 적어도 검에 있어서는 결과가 전부다.

그러므로 해답은 간단했다.

상대보다 절대적으로 먼저 도달하는 검, 가장 먼저 생각했으나 북해의 검을 본 이후에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던 검.

그것이 바로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이었다.

“허어.”

독선은 탄식했다.

“네가 나의 천향접을 헛것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후수의 선’에 이르렀다 말하는 것이냐?”

먼저 움직인 측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선수(先手)의 선(先)이라 한다.

반면 후수(後手)의 선은 상대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먼저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불영이 너를 우리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지만…….”

‘후수의 선’은 상대와 절대적인 격차가 나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는 경지다.

독선이 분노하고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으득.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파라라락.

독선의 옷자락이 미친 듯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운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납득하실 수 있을 때까지 하셔야겠군요.”

말하는 운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가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을 것을 독선도, 당설련도, 그리고 독고랑도 알았다.

“오냐.”

독선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수염과 눈썹이 휘날리고 옷자락이 폭풍을 만난 듯 펄럭였다.

“그리할 참이다!”

끼이이이잉.

섬뜩한 소리가 관도를 뒤덮었다.

독선의 기세에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풀도, 나무도, 바위도, 그리고 지나는 바람조차도.

“큿.”

지켜보던 당설련의 입에서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리고 이를 악물었건만 당설련은 독선의 기세를 더 이상 버텨 낼 수가 없었다.

“하, 할아…….”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말하려 할 때였다.

탁.

독선이 두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이 관도를 뒤덮었다.

콰콰콰쾅.

관도가 뒤집어지고 폭음이 대지를 울렸다.

그것은 마치 상처 입은 맹수처럼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리고 운현의 미명은 이미 하늘로 솟구쳐 있었다.

후우우우웅.

하늘을 향해 뻗어 나온 운현의 검기, 그것은 마치 하늘을 향해 솟은 기둥 같았다.

그 광경이 북해에서 펼쳐졌던 것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오직 독고랑뿐이었다.

그리고 독고랑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탁.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기세 속에서 독고랑은 즉시 몸을 날렸다.

그가 향한 방향은 운현도, 독선도 아닌 바로 당설련이었다.

팍.

독고랑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당설련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즉시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관도를 뒤덮었다.

‘큭.’

당설련조차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은 독고랑이 자신을 안고 질주하는 것과 섬뜩한 파공음이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파바박, 탓.

독고랑은 관도에 내려서며 당설련을 풀어 주었다.

칭.

당설련은 즉시 연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감히!”

수치와 분노로 붉어진 당설련이 소리쳤다.

하지만 독고랑의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지 않았다.

‘아!’

당설련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후우우우.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도, 풀도, 바위도, 심지어 관도의 자취조차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파괴와 폭력의 흔적뿐.

웅.

그리고 운현의 검, 미명이 도도한 미녀처럼 그 아름다운 칼날을 빛내고 있었다.

운현과 독선 모두 여전히 서 있었지만 당설련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졌어.’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설련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운현이 독선을 꺾은 것이다.

팔락, 파라락.

‘이건?’

무언가 차가운 것들이 사방에 내려앉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먼지 같은 것인가 했지만 닿는 순간 녹아내리는 그것은 분명 눈이었다.

“……어찌하여.”

독선의 메마른 소리가 관도, 아니 폐허 위에 울렸다.

“검을 거두었느냐?”

그 가공할 기운을 두른 운현의 검을 독선은 분명히 보았다.

자신의 모든 내력을 담은, 순수한 폭력 그 자체인 힘을 운현의 검이 내려찍는 것도.

그 압도적인 검 앞에 독선의 죽음은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다.

마지막 순간 운현이 검로를 뒤틀지 않았다면 말이다.

“어째서.”

독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를 살린 것이냐?”

말하는 독선의 어깨 위에도, 허연 머리에도 서리가 내려앉고 있었다.

운현은 천천히 검을 거뒀다.

“첫째는 이미 제 힘을 보였기 때문이며.”

스릉.

독선을 똑바로 쳐다보며 운현은 말했다.

“둘째로 어르신께는 마땅히 존중받을 만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운현의 머리카락은 깨끗했다.

사방을 뒤덮은 서리와 휘날리는 눈이 오직 운현에게만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있었다.

“어르신의 무공은 한 평생 올곧게 정진하지 않고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입니다.”

운현은 무인을 존경한다.

그 기개를 동경하고, 그 놀라운 무위를 선망하며, 그 뜨거운 열정에 감동한다.

지금도 운현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는 의형, 일충현처럼 말이다.

“그러니 저는.”

사락.

운현은 자세를 바로하고 손을 모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의 그 경지에 기꺼이 예를 표하겠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운현도, 독선도, 당설련과 독고랑도 아무 말이 없었다.

사락, 사락.

독선의 어깨에 눈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긴 한숨이 독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허어.”

독선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조용한 목소리로 독선이 말했다.

“이제는 내 마음까지 훔치려 드는구나.”

독선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먼저 제게 호의를 보이신 분은 바로 어르신이시지요.”

철정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독선은 운현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비록 거칠고 난폭하고 제멋대로이긴 했어도, 독선이 운현에게 보여 준 것은 오히려 호의에 가까왔다.

그가 지금 운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그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독선은 운현과 신승의 대적자가 아니다.

“크흠.”

짐짓 헛기침을 하며 독선은 운현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였다.

사박, 사박.

당설련이 단아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왔다.

운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독선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당설련은 그 자리에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락.

당설련이 독선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는 이만 떠나겠어요.”

독선은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네 선택이더냐?”

“네, 할아버지.”

“으음…….”

당설련을 바라보는 독선의 눈동자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설련은 담담히 독선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알았다.”

독선은 말했다.

“가 보거라.”

“고마워요. 할아버지.”

사락.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탁.

당설련의 모습은 금방 관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독선과 운현을 돌아보지 않았다.

운현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설련의 말은, 비록 과장이 있기는 했으나 은원으로 얽힌 강호 무림의 생태를 정확히 말해 주고 있었다.

“후우.”

나지막이 한숨을 쉰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독선을 향해 운현이 말했다.

“어째서 저를 막으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힘을 보였고 자격을 증명했다.

이제 운현이 대답을 들을 차례였다.

독선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충격적인 말이 독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염중부는 일대상인의 수하가 되었다.”

운현의 얼굴이 굳었다.

독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삼태상 중 한 명인 지태상의 공격을 채 십 초도 받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나 또한.”

잠시 말을 멈춘 독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을 이기지 못했다.”

운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환우오천존 중 한 명이자 운현에게 천하를 주겠다고 단언하던 독선이 패배했다니?

“문왕은 염중부에게 무림맹주를 약속했다. 그는 나에게도 당문을 천하제일문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

“어째서 거절하셨습니까?”

독선이 승낙했다면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당설련이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후후.”

독선은 나지막이 미소를 피워 올렸다.

“나는 염중부가 아니다.”

그 목소리에서 운현은 독선의 자부심을, 평생 한 길을 걸어온 그의 긍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진 천하제일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독선의 선택은 분명 옳았다.

“허면 어찌하여 제게 오셨습니까?”

“불영이 네게 뒤를 맡겼으니까.”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신승 불영이 와룡헌에 오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네가 가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독선의 말은 남궁세가의 가주, 철검 남궁벽이 한 말을 확증해 주고 있었다.

남궁벽의 목소리가 운현의 귓가에 울렸다.

―그렇다면 무림맹은 사지가 되겠군.

“소림으로 가라.”

독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와불에게 도움을 청해라. 그러면 너는 이후 천하를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하를 도모한다는 것은 곧 천하의 패권에 도전한다는 의미다.

하기에 따라서는 강호 무림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후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슥.

텅 빈 관도가 앞뒤로 곧게 뻗어 있었다.

한쪽은 항주 무림맹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반대쪽은 하남성을 통해 숭산의 소림사로 이르는 길이다.

“어쩌면 저는.”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운현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저는 이 길을 가겠습니다.”

독선을, 그리고 독고랑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지켜야 할 약속과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러한가?”

독선이 나지막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독선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게 한 가지를 약속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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