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보았을 뿐입니다
당설련의 분노는 당장이라도 운현을 향해 터져 나올 듯했다.
“네가 감히……!”
“그만.”
독선의 묵직한 목소리가 당설련을 막았다.
“이제 되었다.”
“할아버지!”
당설련은 고개를 홱 돌려 독선을 바라보았다.
귀화가 일렁이던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애처러운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저자가 소녀를…….”
울먹이는 그 목소리에 독선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말했지 않느냐?”
부드러운 눈빛으로 손녀를 바라보며 독선이 말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당설련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당설련을 지긋이 바라보며 독선은 말을 이었다.
“불영은 처음에 그를 이검학의 후계로 오해케 하였다.”
불영은 신승의 법명이다.
독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자신의 사제라 공언하였지. 그 차이를 알겠느냐?”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독선이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운현이다.
지금 여기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독선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독선은 그런 사람이니까.
“후계자는 아랫사람이나 사제는 형제다. 불영은 그를 자신과, 아니 우리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운현을 바라보는 독선의 시선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러니 충분히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지.”
“감사한 말씀이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운현은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가 당설련 소저를 용서한 것은 독고 제가 복수를 원치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설련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 원독 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말을 이었다.
“본래 용서란 그런 것입니다. 오직 당사자, 혹은 그 뜻을 대리할 자격이 있는 자만이 하는 것이지요. 강하든 약하든 간에 말입니다.”
“허허.”
독선은 마른 웃음을 흘렸다.
“네 어리석음은 여전하구나.”
지긋이 운현을 쳐다보며 독선이 말했다.
“허나 그조차 지조 없이 떠다니며 입장을 바꾸는 자들보다는 낫겠지.”
그 목소리는 어딘가 허탈하게 느껴졌다.
“지금 네가 가려는 길은 매우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런 느낌도 잠시, 독선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뜻만으로 갈 수 있는 길이 결코 아니야.”
“허나 뜻이 없다면 힘도 단지 폭력일 뿐입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힘없는 뜻이 그저 무능에 다름 아니듯 말입니다.”
“그래, 진정 그러하다.”
독선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나는, 네게 뜻을 관철할 힘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겠다.”
훅.
독선의 눈빛이 변했다.
그와 함께 주변의 느낌이 단번에 변했다.
어딘가 여유롭던 분위기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방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이, 풀과 나무는 물론 지나는 바람까지 독선과 운현을 주목하고 있는 듯했다.
운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를 막으려 하십니까? 어르신께서는 분명…….”
“화산지약은 깨지지 않았어.”
당설련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무림맹은 아니야. 이미 알고 있지? 무림맹이 불영과 결별을 선언한 것을.”
조소를 머금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이제 화산지약은 더 이상 할아버지를 구속하지 못해. 검성도, 불영도, 그리고 너도.”
“아니, 제가 말하려는 건 그것이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독선을 똑바로 쳐다보며 운현은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어째서 저를 막으려 하십니까?”
독선이 정말 무림맹을 적대하기 위해 운현을 막아섰단 말인가?
손짓 한 번이면 무림맹을 독으로 뒤덮을 수 있는 독선이 어째서 운현을 찾아온 것일까?
“강호 무림은 힘없는 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독선은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대답을 얻고자 한다면.”
스륵.
뒷짐을 지고 있던 독선이 한 손을 운현에게 내밀었다.
마치 무엇을 요구하는 듯, 그의 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네 힘을 보여라.”
훅.
독선은 가볍게 손짓했다. 마치 이리로 오라는 듯 작은 동작이었지만 그 결과는 절대 작지 않았다.
콰과과곽.
엄청난 기운이 관도를 할퀴며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독고랑의 검이 푸른 기운을 뿜으며 울음을 흘린 것 역시 동시였다.
후우웅.
“하아!”
독고랑은 지체 없이 한 발을 내디디며 검을 그었다.
콰아앙.
폭음과 충격이 관도를 휩쓸었다.
조금 전 당설련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파라라락.
흙먼지가 관도를 휩쓸고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곧 결과가 모두의 눈앞에 드러났다.
후우우.
독고랑의 머리카락과 의복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독고랑은 마치 혈전을 치른 듯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무언가 할퀴고 지나간 듯한 상처 역시 여기저기 가득했다.
“호오.”
독선의 눈동자가 흥미를 보였다.
독고랑은 여전히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그의 검에 서린 검기 역시 여전했다.
우우우웅.
“기개만큼이나 실력 또한 뛰어난 아이로구나.”
독선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독고랑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격돌로 그의 내부가 완전히 진탕되어 버린 것이다.
이를 악물고 있는 독고랑의 얼굴은 창백했다.
“후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독고랑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슥.
“다시는 이러지 말게.”
마치 책망하듯 운현은 말했다.
“이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독고랑은 독선에게서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이 제 일입니다.”
운현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자네의 일은 나 대신 다치는 게 아닐세. 알겠나? 한 번만 더 이러면 나는 화를 내겠네.”
그 목소리는 사뭇 엄중했다.
하지만 독고랑은 전혀 알아들은 표정이 아니다.
여전히 한 발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독고랑의 모습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독선을 바라보았다.
“어르신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운현은 똑바로 서서 말했다.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독선의 눈빛이 반짝이고 당설련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전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끼어들 곳은 이제 없었다.
운현을 바라보는 독선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운현은 독고랑에게 말했다.
“뒤를 부탁하네.”
독선을 상대하는 것은 주위를 살피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뜻을 독고랑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독고랑은 뒤로 물러섰다.
저벅, 저벅.
몇걸음 걸어나간 운현이 멈춰 섰다.
이제 운현과 독선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한 자루 미명을 들고 운현은 텅 빈 관도에서 독선과 마주섰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관도 위를 스쳤다.
움직이는 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도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관도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독선 정도의 고수라면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여유 정도는 보일 만했지만, 독선은 결코 운현을 아래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했던 말처럼.
슥.
어느 순간 독선의 손이 움직였다.
그는 운현을 향해 검지와 중지를 동시에 튕겼다.
퉁.
‘아!’
당설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난홍십이엽!’
지금 독선이 쓴 수법은 바로 난홍십이엽이었다.
한번 펼쳐지면 붉은 꽃잎이 휘날리듯 피를 뿌린다는 난홍십이엽은 독선의 절기 중 하나다.
첫수부터 독선은 절기를 펼쳐 낸 것이다.
웅.
그러나 독선이 난홍십이엽을 펼치는 순간 운현의 검, 미명 역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칼날에 은은하게 어린 푸른 기운은 바로 검기였다.
쉭.
미명이 허공을 갈랐다. 수평으로 그어진 검은 다시 비스듬히 위를 향해 솟았다.
휘릭.
아무런 기교도, 현란함도 없는 지극히 단순한 검로.
그것은 마치 시험 삼아 검을 휘둘러 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콰과과광.
열두 개의 폭음이 운현의 뒷편에서 연달아 터져 나왔다.
관도가 패이고 나무 파편이 어지러이 사방을 날았다.
‘맙소사.’
당설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독선의 난홍십이엽이 어떤 것인지 당설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조차 셋 이상을 만들어 내지 못한 독선의 절기, 난홍십이엽.
그것을 운현이 단 일검으로 흘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이미 독선의 두 번째 출수가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욱.
독선의 소맷자락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운현은 그가 무엇을 펼쳐 내려는지 즉시 깨달았다.
슥.
운현은 검 끝을 하늘로 세웠다.
한 자루 미명이 그와 세상 사이에 버티고 섰다.
파라락.
독선의 손이 춤을 추듯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운현을 향해 모습을 나타내었다.
후웅.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관도 전체를 뒤덮을 듯 펼쳐진 죽음의 날갯짓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화라락.
천향접이 그 날개를 펴고 운현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이전에 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세. 그야말로 독선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절기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운현의 검 미명에선 오히려 검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미친!’
당설련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 내력을 끌어 올려도 부족한데 검기조차 거두다니?
설마 스스로 죽으려는 것인가 당설련이 생각한 그때였다.
스릉.
운현의 검이 천천히 원을 그렸다.
당장이라도 짓쳐 들 듯한 천향접 앞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무력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당설련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운현의 검이 원을 완성해 나가는 동안 천향접은 너무나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세상이 온통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때로 고수에게는 상대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설련은 그렇다치더라도 독선의 천향접이, 아니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다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당설련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사이 운현의 검은 어느새 원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스윽.
미명의 칼날이 천천히 원을 그렸다.
그 아름다운 칼끝이 다시 하늘을 향하는 순간, 독선의 천향접이 미명의 검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당설련은 보았다.
운현의 검, 미명의 칼끝에 그 거대한 천향접이 나비처럼 가볍게 내려앉는 것을.
그것은 운현의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銳劍)이었다.
콰아아앙.
충격이 사방을 뒤덮고 폭풍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윽.”
당설련은 즉시 내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충격은 금방 사라졌다.
“이, 이럴 수가…….”
당설련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충격이 있었다. 후폭풍도 불었다.
하지만 정작 천향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독선의 천향접이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한 채 그대로 소멸한 것이다.
“……놀랍구나.”
독선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흰 수염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찌한 것이냐?”
“보았을 뿐입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축이 되는 중심을 잃으면 그 어떤 힘이라도 흐트러지게 마련이지요.”
“허!”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독선은 알고 있었다.
천향접은 말 그대로 흐트러져 버렸다.
하지만 어떻게?
“나 자신조차 보지 못하는 것을 네가 보았단 말이냐?”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와불 선사께서 제게 그러시더군요.”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제가 심안을 열어 지극한 경지를 바라보고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