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고립
낮은 목소리로 제갈연이 답했다.
“……현재까지 구조된 흑도회와 무림맹 소속 무사들은 모두 서른여섯입니다.”
“허!”
탄식이 나올 만도 했다.
이백오십 명이 출진했는데 돌아온 자들이 서른여섯이라니?
하지만 제갈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부분이 중상이며, 그나마 의식이 있어 대화가 가능한 자는 일곱뿐이었습니다.”
대다수가 중상자라는 것은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흑도회 회주이신 진무량 대협이나 묵혈엽 대협은…….”
제갈연은 주저했다.
하지만 반드시 말해야 했다.
“……철혈사왕 염중부의 손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표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철혈사왕이 나타났다는 말은 이미 대표자들 가운데 돌고 있었다.
그것을 지금 제갈연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허어.”
“그 노괴가 어찌하여…….”
여기저기서 탄식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한가요?”
모용미가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척후가 돌아오지 않아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생존자들의 증언이 모두 일치합니다.”
제갈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은 녹림과 흑창기마대, 그리고 단궁을 사용하는 궁병대이며 흉수는 철혈사왕 염중부입니다.”
궁병대라는 말에 모용미는 부상당한 흑도회 무사를 떠올렸다.
그 상처에 박혀 있던 것은 분명히 짧고 흉측한 검은색의 화살이었다.
“소승은 이해할 수가 없소.”
소림의 진명이 입을 열었다.
“철혈사왕을 비롯한 오존은 이제껏 그 어떤 강호 무림의 행사에도 관여치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그가 녹림의 무리와 함께한단 말이오?”
그건 진명뿐 아니라 모든 대표자들의 의문이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가지 더.”
달칵.
모용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대표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모용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분 중에 혹 자파로부터 연락을 받은 분이 계신가요?”
대답은 없었다.
제갈연의 안색도 굳어졌다.
수로채 연합과 녹림이 무림맹을 치려한다는 소문은 천하에 파다하다.
지리적으로 아주 먼 몇 문파를 제외하면, 당장 연락을 보내 안전과 후속 조치를 문의하는 것이 옳다.
“아니면 지금 상황에 대한 새로운 소식은요?”
역시 대답은 없었다.
“흑도회가 출진할 때만 해도 수로채 연합이 진강 유역에 나타났다는 것 외에 정확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철혈사왕이 나타났다는 보고조차 그 진위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지요.”
모용미의 말에 반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눈도, 귀도 가려진 채로요.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에요.”
침묵이 대표자들 사이에 흘렀다.
“그 말씀은 분명 일리가 있소.”
소림의 진명이 조용히 말했다.
“허나 과도한 우려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오. 지금 장강이 혼란스러우니 연락이 늦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소?”
“옳은 말씀이에요. 그래서 저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해요.”
모용미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째, 소수의 척후를 보내 항주로 들어오는 주요 관도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것.”
‘문제’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녀가 ‘포위’를 의미한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소림의 진명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필요성에 대해서는 납득했다.
하지만 이어진 모용미의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둘째, 도지휘사와 포정사, 안찰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 대처를 촉구하고 가능한 정확한 첩보를 확보할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눈살을 찌푸린 사람은 진명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표자들은 물론, 회의를 진행하는 제갈연부터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 제안은 이미…….”
“도움을 요청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모용미가 제갈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상황의 심각함을 알리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만일 도지휘사 측에서 도움을 요청해 온다면 거절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으음.”
제갈연은 신음을 흘렸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 말이고 명분이다.
도지휘사가 무림맹의 협조를 요청한다면 명분으로선 충분하다.
“그리고 포정사와 안찰사를 통해 첩보를 입수하는 건, 이미 하고 있는 것 아니던가요?”
모용미의 지적이 쐐기를 박았다.
제갈연은 대표자들을 돌아보았다.
“이의가 있으십니까?”
반대나 다른 의견은 없었다.
“좋습니다. 모용세가의 제안대로 실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갈연이 결의의 통과를 알리고, 모용미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제갈연은 대표자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잠시 휴회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제갈연은 한숨을 쉬었다.
밤을 새워 이어진 구조 작업과 회의 끝에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제갈연의 휴식은 길지 못했다.
그날 오후, 무림맹에는 세 가지 소식이 날아들었다.
첫째는 흑도회의 대표자였던 열혈도 묵혈엽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었다.
무당의 제자들에 의해 발견된 묵혈엽은, 비록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었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구출된 흑도회와 무림맹 무사들도 오십여 명을 넘었다.
둘째는 척후들의 보고에 의해 주요 관도에 이상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었다.
비록 반나절 거리까지만 확인했으나 우려했던 포위도 없었고 별다른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그 보고는 무림맹과 항주 사람들의 우려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었다.
그러나 세번째 소식은 무림맹 대표자들의 안색을 굳게 하기에 충분했다.
관청으로 갔던 이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도지휘사는 물론이고 포정사와 안찰사도 없었다.
양민을 지켜야 할 지방 군정과 행정, 감찰의 총책임자들이 하나같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대표자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림맹을, 항주를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수로채와 녹림이 무림맹을 치겠다고 했는데 어찌 무림맹을 떠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눈에는 도적 떼들이 무서워 도망간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무림맹 문파들은 깨달았다.
수로채 연합이 포고문을 보낸 순간부터 이미 자신들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을.
짙은 암운이 무림맹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
운현과 독고랑의 마차는 거침없이 관도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에 잠겨 있던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멈추게.”
독고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즉시 말고삐를 당겼다.
“워어!”
다가닥, 다각.
푸르르.
질주하던 말이 거친 숨을 내뿜으며 멈춰 섰다.
이리저리 목을 비트는 말을 진정시킨 독고랑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운현의 모습을 발견했다.
“대인?”
“독고 제도 내리는 편이 좋네.”
운현은 독고랑을 보고 있지 않았다.
관도 저편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어르신께서 불편해 하실지 모르니까.”
독고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즉시 운현의 말에 따랐다.
탁.
독고랑은 말에서 내려 운현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푸르르.
말이 투레질을 했다.
관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운현은 아무 말이 없고, 독고랑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문득 운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독고랑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리고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관도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군요.”
사박.
“하지만 반갑지는 않네요.”
붉은빛이 감도는 비단옷을 입은 그녀는 바로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었다.
아무도 없던 관도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매력적이었다.
빛나는 눈동자와 붉은 윤기가 도는 입술이 사뭇 요염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운현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중히 예를 표하며 운현이 말을 이었다.
“독선 어르신.”
당설련의 뒷쪽에 독선이 서 있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허연 수염과 길게 자란 흰 눈썹, 그리고 담담한 눈빛.
마치 세속을 벗어난 도인과도 같은 풍모였지만 독고랑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독선이 뿜어내는 기세가 지금 독고랑의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다.”
묵직한 목소리로 독선이 말했다.
“운현.”
순간 당설련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독선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그런데 지금 독선이 운현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흥, 어르신이라 말하면서 그런 뻣뻣한 태도라니.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해요?”
당설련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과례는 비례라 하였으니, 지나친 예의는 오히려 예가 아닙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그런 것을 원하실 것 같지는 않군요.”
“하! 감히 당신이 할아버지의 뜻을 안다고 말하는 건가요?”
당설련은 독선을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이자가 감히…….”
“괜찮다.”
당설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독선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으니까.”
당설련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하얀 이 아래서 일그러졌지만 독선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던 독선의 시선이 지금 이 순간 운현에게 못 박혀 있는 것이다.
당설련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솟았다.
그 분노는 당연히 운현을 향했다.
“……할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운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당설련이 말했다.
“그런 것이겠지요.”
당설련은 고개를 돌리며 옷소매로 입을 가렸다.
마치 더 이상은 이야기하기도 싫다는 듯이.
사락.
하지만 그 순간 당설련의 하얀 손끝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은 똑바로 운현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바로 독선에게서 배운 당설련 비장의 용독술이었다.
쉬릭.
그것은 마치 가느다란 독사처럼 은밀하게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하지만 독고랑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
훅.
독고랑은 지체 없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그대로 그어 내렸다.
파앙.
한 줄기 날카로운 충격음이 관도를 울렸다.
흙이 튀고 먼지가 휘날리는 사이로 독고랑의 검에 어린 푸른 검기가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우우우웅.
당설련의 용독술은 독고랑조차 지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
독고랑을 노려보며 당설련은 코웃음을 쳤다.
“감히 할아버지 앞에서 검을 빼 들다니 참으로 무례하군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당설련은 말했다.
“당장 한 팔을 잘라 사죄하세요.”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당설련이 노린 것은 독고랑이 아니었다.
“아니.”
운현이 말했다.
“독고 제가 사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설련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과도한 요구는 운현의 거절을 유도하여 독선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예상대로 운현은 독고랑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당설련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물론 당설련 소저도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소저께 그런 요구를 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당설련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건 운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요구하면.”
가시 돋힌 목소리로 당설련이 말했다.
“내가 팔을 잘라 사죄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당설련의 말을 긍정하고 있었다.
이 일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네가…….”
아득.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단번에 푸른 귀화가 피어오르고, 온몸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나를 용서하겠다고?”
파라락.
그녀의 비단옷이 펄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