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암운의 무림맹
“흐음.”
커다란 일산(日傘)의 그늘 아래 비스듬히 누운 문왕은 전장을 바라보았다.
흑도회가 흑창기마대를 향해 돌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리석군. 이미 선수를 빼앗겼는데 미련하게 돌격이라니.”
탁.
그는 부채를 접었다.
“하긴,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나온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지.”
문왕은 가늘고 흰 손가락을 뻗어 옆에 놓인 금 쟁반 위에 있던 포도알 하나를 집어 들었다.
픽.
붉은 과즙이 그의 입가에 번졌다.
“단궁대는?”
수하가 즉시 그에게 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우측으로 이동하여 이차 사격을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단궁대는 녹림 사이에서 검은 화살을 날렸던 자들이다.
문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양측의 기마대가 서로 지나치고 나면 반드시 방향을 전환할 것이다. 그 순간을 노려 쏘도록 하라.”
수하는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콰과과각.
그때 두 기마대가 충돌했다.
말과 사람이 거짓말처럼 허공을 날고, 비명과 신음이 평야를 가득 채웠다.
“쯧.”
촤락.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본 문왕은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그다음에는 실혼대를 내보내라. 그때쯤이면 남아 있는 건 아마 진무량 정도겠지만.”
“클클.”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문왕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흥을 깰 생각은 없소만 진무량 따위를 상대로 너무 공을 들이는 것 아니시오?”
문왕은 고개를 돌렸다.
말끔하게 빗어넘긴 검은 머리와 고급스러운 비단옷의 한 중년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마치 고관대작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뱀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그대가 나서 보겠나?”
문왕이 툭 던지듯 말했다.
비단옷을 입은 중년 사내는 웃음을 머금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원하신다면.”
문왕의 붉은 입술이 부채 뒤에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럼…….”
사뭇 흥미로운 어조로 문왕은 말했다.
“어디 철혈사왕의 솜씨를 한번 청해 보도록 할까?”
철혈사왕은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휘릭.
한 줄기 바람 소리와 함께 철혈사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문왕은 손을 내밀어 포도알 하나를 집었다.
“흥. 철혈사왕이라고?”
픽.
입안에서 포도알이 짓이겨졌다.
“과연 그 이름값이나 할까 모르겠군.”
말하는 문왕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헐헐헐, 저 아해가 이름값도 못 하면 또 어떻습니까?”
불룩한 뺨을 가진 키 작은 노인이 허연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도련님께 저토록 싹싹하니 그저 귀엽게 봐주는 것이지요.”
“날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잖아? 인 할아범.”
문왕의 말투는 무례했다.
상대는 연로한 어른인 데다 천지인 삼태상 중 한 명인 인태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건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부리는 투정 같기도 했다.
“어이쿠, 이거 늙은 몸이라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군요. 다음엔 조심하겠습니다. 허허허.”
인태상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다음에도 여전히 ‘도련님’이라 부를 것을 문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헌데 이렇게 되면 너무 쉽군요. 천하의 무림맹이라는 것들이 도련님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것밖에 못 하지 않습니까?”
“아니.”
문왕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인태상이 무슨 말이냐는 듯 문왕을 쳐다보았다.
문왕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바스락.
그의 손에 얇은 서찰 하나가 들려 나왔다.
“내 계획을 이미 예상한 자가 있었거든.”
“호오, 도련님의 계획을 말입니까?”
인태상이 흥미로운 듯 물었다.
“그래.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 같더군. 정말이지 얼굴을 보고 싶은 자야.”
쓴웃음을 지으며 문왕이 말했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문왕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구체적인 것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문왕이 세운 계획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누구도 모른다 여겼던 관부와 상계, 그리고 북해의 연관까지 말이다.
“그것 참 놀랍군요. 대체 그 서찰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으득.
“……운현.”
문왕은 나지막이 답했다.
그가 이를 가는 소리를 인태상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창룡검주 운현, 바로 그자야.”
문왕이 손에 든 것은 무림맹으로 보낸 운현의 서찰이었다.
무림맹으로 향하는 관도의 길목은 이미 문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던 중에 창룡검주 운현이 무림맹으로 보내는 서찰이 손에 들어온 것이다.
“호오, 창룡검주라고요?”
인태상의 눈이 빛났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창룡검주라면 일대상인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 중 한 명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지만.”
문왕이 날카로운 눈으로 인태상에게 말했다.
“그는 내 거야. 할아범.”
“……후후후.”
인태상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이지요. 도련님.”
문왕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았다.
인태상은 고개를 돌렸다.
“너도 들었지? 그놈은 도련님의 것이다. 알겠느냐? 지태상.”
후우웅.
거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의 수염이 바람에 날렸다.
삼태상의 한 명이자 길고 검은 수염을 지닌 노인, 지태상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버티고 서 있었다.
저 멀리 평야에서 벌어지는 두 기마대의 처절한 혈전은, 그들에겐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다.
***
항주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소문들 탓에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번화가에 걸린 오색 등불조차 을씨년스러웠다.
그 항주의 중심가를 지금 한 무리의 기마가 질주하고 있었다.
다가닥, 다가닥.
“뭐, 뭐야?”
“조심하게!”
사람들은 급히 몸을 피했다.
다가닥, 다가닥.
기마는 난폭한 기세로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사람들이 본 것은, 바로 피에 젖은 사람과 말의 모습이었다.
“헉!”
“무,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제대로 살펴볼 사이도 없이 기마는 거리 저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언가 큰 일이 터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피에 젖은 기마가 달려간 방향이 바로 무림맹이었기 때문이다.
“서, 설마…….”
사람들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무림맹이 수로채 연합에 대패했다는 소문은 다음 날이 되기도 전에 이미 항주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콰당.
“관지부!”
제갈세가의 대표자 제갈연이 거칠게 문을 열며 말했다.
부상당한 무인을 부축하고 있던 관지부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제갈연 님!”
제갈연은 피에 젖은 무인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즉시 손을 뻗었다.
탁, 탁.
제갈연은 차례대로 혈도를 짚어 상처를 지혈했다.
그리고 무사를 넘겨받아 바닥에 천천히 누였다.
관지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흑도회의 무사입니다.”
“아네.”
제갈연은 굳은 표정으로 무사의 상처를, 정확히는 그 상처를 만든 흉기를 쳐다보았다.
피에 젖은 무복에 아직도 박혀 있는 그 흉기는 바로 검은색의 짧은 화살이었다.
“다른 분들은 이미 의국으로 옮겼습니다. 허나 이분이 반드시 제갈연 님을 뵈어야 한다고…….”
“나를?”
두 사람의 목소리 때문일까?
무사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으.”
“정신이 드나?”
제갈연이 급히 말했다.
“이곳은 무림맹이네. 그러니 이제 염려하지 말고…….”
덜컹.
문이 열리고 다른 대표자들이 들어왔다.
관지부의 긴급한 연락을 받고 모여든 것이다.
“무슨 일이오!”
“저런!”
“아미타불.”
소림의 진명이 불호를 외고 무당의 청진이 눈을 찌푸렸다.
모용미는 외마디 신음을 흘렸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당장 의국으로 옮겨야 해요. 우선 상처를…….”
말하던 모용미는 그의 상처에 박혀 있는 검은 화살을 보았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다른 대표자들 역시 표정이 굳었다.
“이, 이게 무슨…….”
모용미가 중얼거릴 때였다.
“……회, 회주님을.”
흑도회 무사가 가늘게 목소리를 흘렸다.
제갈연이 급히 귀를 기울이고, 대표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회주님? 진무량 대협 말인가?”
흑도회의 회주는 흑월도 진무량이다.
“회주님을, 구해야…….”
제갈연은 눈을 부릅떴다.
흑도회의 무사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목소리는 대단히 작았다.
제갈연은 급히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흑도회 무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녹림이……, 흑창……, 철혈사왕…….”
순간 제갈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하지만 결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안색이 변한 건 다른 대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혈사왕!”
“설마!”
순간 흑도회 무사가 피를 쏟았다.
“커헉.”
“더 이상 말하면 위험해요.”
모용미의 말에 제갈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연은 흑도회 무사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알았네. 걱정하지 말게. 이제 뒷일은 무림맹이 맡겠네.”
흑도회 무사의 표정에 일순 안도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착찹한 표정으로 무사를 내려다보던 제갈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의국으로 옮기게.”
“네.”
관지부는 고개를 숙였다.
제갈연은 다른 대표자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옷이며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지만 제갈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긴급히 구조대를 보내 주십시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낙오했을 것입니다. 한시바삐 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아미타불. 즉시 소림의 제자들을 보내겠소.”
“무당에서도 제자들을 보내겠습니다.”
“우리 모용세가에서도 보내겠어요.”
제갈연은 감사의 예를 표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혹 적을 만나더라도 절대 싸움을 피하십시오. 지금 상황에서는 희생자만 늘어날 뿐입니다.”
“알겠소.”
소림의 진명이 답했다.
“진무량 대협은요?”
모용미가 물었다.
“진강 유역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허나…….”
제갈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으로선 흑도회 회주가 무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제갈연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당장 긴급 대표자 회의를 열 것을 제안합니다.”
굳은 표정으로 제갈연이 말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림의 진명도, 무당의 청진도, 그리고 모용세가의 모용미도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깊은 밤, 무림맹의 문이 열리고 무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낙오한 흑도회를 구하기 위한 구조대였다.
대략 열다섯 명 정도의 무사들로 구성된 십여 무리의 구조대는 밤새도록 무림맹을 출발하고, 또 돌아왔다.
그때마다 그들의 말에는 부상당하고 피에 젖은 흑도회 무사들이 실려 있었다.
무림맹에 밝힌 불은 날이 밝도록 꺼지지 않았고, 항주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갔다.
“여러분의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철야로 구조 작업을 지휘한 제갈연이 대표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구조대를 편성하고 상황을 파악했으며, 항주 시내의 의약품을 확보하는 동시에 일대의 경계를 지시했다.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대처였다.
평소라면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문파와 세가 들도 제갈연의 지휘에 적극 협조했다.
덕분에 낙오했던 흑도회와 무림맹 소속 무인들도 상당수 구할 수 있었다.
“제갈연 대협께서도 수고하셨소이다.”
소림의 진명이 불호를 외며 말했다.
제갈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대표자 중 누군가 물었다.
제갈연은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