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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32화 (232/530)
  • 232화. 충돌

    흑도회 대표자 묵혈엽의 선언에 소림의 진명이 눈을 감고, 제갈연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먼저 나서겠다는 뜻이군.’

    하지만 한숨은 잠깐이었다.

    ‘그래도 흑도회라면…….’

    흑도회의 핵심 전력은 기마대다.

    쐐기꼴의 추형돌파진은 평지에서는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했다.

    무력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 정찰에는 더없이 적격이다.

    물론 흑도회는 저들과 한판 붙을 생각밖에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쁘지 않군.’

    제갈연은 그렇게 판단했다.

    무림공적을 선언하고 흑도회가 저들의 기세를 꺾는다면 허황된 소문도 단번에 잦아들 것이다.

    대표자들의 눈빛 역시 비슷한 생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소림과 흑도회의 제안을 들으셨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이의는 없었다.

    그날, 무림맹 대표자 회의는 두 가지 결의를 통과시켰다.

    첫째는 녹림과 수로채 연합을 무림공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두 번째는 흑도회의 단독 출전을 승인하는 것이었다.

    흑도회는 다음 날 이백오십여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무림맹을 나섰다.

    그중 흑도회 무인들은 칠십여 명 정도였고 백삼십 명은 항주 무림맹 소속의 무인들이었다. 타 문파 중 흑도회와 함께 출전하기를 원하는 자들도 오십여 명에 이르렀다.

    그렇게 흑도회는 위풍당당하게 수적과 녹림 들이 있다는 진강으로 향했다.

    ***

    흑도회는 대운하를 따라 움직였다.

    육로 대신 물길을 이용한 것은 말과 무인들의 피로를 막고, 항주 일대에 흑도회의 출진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사람과 말을 실은 배는 순조롭게 북상했다. 그리하여 다음 날에는 진강 유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강과 항주 무림맹은 말 그대로 지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도회가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수로채 연합이 아니라 오직 녹림뿐이었다.

    “녹림?”

    “네, 그렇습니다.”

    간이 천막 아래 앉아 있던 흑도회의 회주, 흑월도 진무량은 수하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로채 연합의 황천대 역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회주 옆에 있던 묵혈엽이 물었다.

    “암천무제라 하는 자는? 혹시 그가 있더냐?”

    “찾을 수 없었습니다.”

    “흐음.”

    회주인 흑월도 진무량은 노골적으로 실망을 드러냈다.

    암천무제, 남궁세가의 가주를 죽인 그와 대결할 것을 내심 기대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암천무제도, 황천대도 없다.

    “저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더냐?”

    묵혈엽이 다시 물었다.

    “보이는 바로는 천이백을 넘지 못합니다.”

    회주인 진무량과 묵혈엽의 눈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허, 수만이 넘는다더니 겨우 천이백이라고?”

    천이백이라도 흑도회의 이백오십과는 다섯 배 차이다.

    그러나 본래 흑도회는 수적 열세 따위는 연연하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는 암천무제도, 황천대도 없는 산적 떼에 불과하지 않는가?

    “흑창기마대로 보이는 자들은 있었느냐?”

    묵혈엽이 물었다.

    녹림은 공손세가를 불태운 것이 자신들의 흑창기마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하는 고개를 저었다.

    “찾지 못했습니다. 기마가 있기는 했으나 오직 녹림도들 뿐입니다.”

    “쯧.”

    듣고 있던 회주 진무량이 혀를 찼다.

    ‘운이 없군.’

    아무래도 이번 싸움에서 흑도회의 명성이 높아질 기회는 없는 듯했다.

    상대가 천이백이라고 하지만 녹림의 도적 떼들을 죽여 봐야 무슨 자랑이 있으랴?

    “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운하 좌편에 모여 진형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저들도 우리를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냐?”

    슥.

    회주 진무량이 일어섰다.

    평생 적을 피해 본 적이 없는 진무량이다.

    녹림의 도적 떼들 따위야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

    “가자.”

    흑월도 진무량이 말했다.

    수하가 즉시 고개를 숙여 명을 받들고, 열혈도 묵혈엽이 회주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이제 싸움의 때였다.

    ***

    “저들은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말에 탄 흑도회 회주, 진무량이 크게 외쳤다.

    흑도회와 무림맹 소속의 기마대는 모두 이백오십, 반면 앞에 있는 녹림의 숫자는 천이백을 넘는다.

    그러나 흑도회나 무림맹 무인들 중에 위축된 이는 없었다.

    혈전을 눈앞에 둔 열혈도 묵혈엽과, 회주 흑월도 진무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우리는 저들을 부수고! 깨뜨리고! 짓밟을 것이다!”

    푸르르르.

    진무량이 타고 있는 말이 투레질을 했다.

    말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스릉.

    온통 시커먼 색의 대도가 하늘로 솟았다.

    바로 그의 애도, 흑월이었다.

    회주 진무량의 우람한 팔은 그 커다란 도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차차창.

    말을 탄 흑도회 제자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그들 뒤에 있던 무림맹 소속 무사들과 자원자들 역시 말 위에서 일제히 도검을 빼어 들었다.

    촤라라랑.

    이백오십여 도검이 햇빛 아래 번뜩였다.

    “형제들이여!”

    회주 흑월도 진무량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의 칼은 적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리니!”

    그 우렁찬 목소리는 이백오십여 무사들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자! 우리는 흑도회다!”

    “우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흑도회도, 흑도회가 아닌 무사들도 지금 이 순간만은 한마음으로 고함을 터트렸다.

    그리고 말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따각, 따가닥.

    흑도회의 칠십여 기마가 앞서고, 무림맹과 다른 문파 소속의 무인들 백팔십여 기가 뒤따랐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평야를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던 기마는 이윽고 분명한 모습을 이뤘다.

    회주 흑월도 진무량을 선두로 한 빈틈없는 쐐기꼴의 밀집 대형.

    바로 흑도회가 자랑하는 추형돌파진이었다.

    두두두두.

    기마와 사람이 만들어 낸 거대한 검은 쐐기는 무엇이라도 부숴 버릴 듯했다.

    그 추형돌파진이,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시시각각 천이백여 녹림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그러나 녹림은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병장기를 쥐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녹림은 마치 땅에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음?’

    회주 옆에서 말을 달리던 묵혈엽은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진형도, 조직도 없이 그저 모여 있을 뿐인 녹림이다.

    흑도회가 돌진을 시작하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슥.

    묵혈엽은 앞서 달리는 회주, 흑월도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느낌은 그도 마찬가지인 듯,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하아!”

    흑월도 진무량이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가자! 형제들이여!”

    두두두두두.

    그 외침과 함께 기마대는 더욱 속력을 더했다.

    불안을 떨쳐 버릴 방법은 단 하나, 한시라도 빨리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다.

    흑도회와 무림맹의 기마대는 미친 듯이 질주했다.

    바로 그때였다.

    녹림의 진형에 변화가 생겼다.

    병장기를 들고 있던 적의 전열이 갑자기 아래로 주저앉은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길한 울림이 평야에 울려 퍼졌다.

    피피핑.

    그 섬뜩한 소리는 바로 활 시위 소리였다.

    회주 진무량이 즉시 외쳤다.

    “화살이다!”

    슈르르르르.

    녹림의 진형 위로 솟아오르는 검은 화살의 비를 묵혈엽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하아! 돌격하라! 돌격!”

    화살을 피하는 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최대한 빨리 사정 거리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흑도회와 무림맹 기마대는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하지만 상대편 역시 그것을 예상하고 날린 화살이었다.

    파바바바박.

    검은 화살의 비가 흑도회와 무림맹 기마대를 덮쳤다.

    흑월도 진무량의 흑도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서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후우우웅.

    진무량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검푸른 도기를 두른 그의 대도를 휘둘렀다.

    “하아아!”

    카가가가강.

    그의 대도는 검은 화살을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놀랍게도 그때마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검은 화살이 그저 평범한 화살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열혈도 묵혈엽 역시 자신의 도를 꺼내 미친 듯 화살을 베어 나갔다.

    “으아아아!”

    카가강.

    비록 회주인 진무량만큼은 아니었으나 묵혈협의 도에도 분명한 도기가 서려 있었다.

    흑도회의 무사들은 일제히 도를 빼어들고 화살을 쳐냈다.

    그들의 도에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내력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검은 화살은 너무 많았다.

    퍽, 퍼버벅.

    “으악!”

    “크헉!”

    쏟아져 내리는 검은 화살은 말과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날아가 박혔다.

    검은 화살은 매우 단단하고 대단히 짧은 데다, 담긴 내력 역시 절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히히힝.

    말들이 나뒹굴고 사람들이 비명을 흘리며 고꾸라졌다.

    평야는 순식간에 말과 사람의 신음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 이놈들…….”

    무너지는 기마대를 보며 회주 진무량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제대로 진형도 갖추지 않은 듯 보인 것은 속임수였다.

    저들은 검은 화살이라는 독니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두두두두.

    그러나 그 와중에도 녹림과의 거리는 착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화살은 더 이상 못 쓴다.

    “하아! 하아!”

    진무량은 대도를 휘두르며 말을 더욱 빠르게 몰았다.

    드디어 적을 유린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분노를 실은 말발굽과 대도로 살을 찢고 뼈를 부술 시간이 말이다.

    두두두두두.

    아니나 다를까?

    거리가 가까워지자 검은 화살비가 뜸해지기 시작했다.

    진무량과 묵혈엽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사사삭.

    상대의 전열이 또 한번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예 양옆으로 빠르게 비켜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서 무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푸르르.

    그것은 몸을 낮추고 있던 말과 기마대였다.

    기마대는 온몸을 두르고 있던 황갈색 피풍의를 벗어 던졌다.

    펄럭.

    “저건!”

    진무량과 묵혈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의 무복과 검은 마갑을 두른 말들, 그리고 하나같이 들고 있는 시커먼 장창들.

    그들은 바로 완전 무장한 삼백 기의 흑창기마대였다.

    으득.

    진무량은 이를 갈았다.

    무질서한 모습으로 방심을 유도하고 검은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그리고 몸을 숨기고 있던 흑창기마대가 나타났다.

    처음부터 이것은 함정이었던 것이다.

    두두두두.

    삼백여 기의 흑창기마대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이 흘러내리듯 중앙부터 전진해 오는 흑창기마대가 이루는 진형은, 바로 흑도회가 자랑하던 추형돌파진이었다.

    “감히이이!”

    회주 흑월도 진무량의 분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이미 때가 늦었다.

    자신들의 이백오십여 기마대는 이미 반도 남지 않았다.

    선두를 달리던 흑도회는 특히 그 피해가 컸다.

    그런 그들을 향해 마갑으로 완전 무장한 삼백여 기의 흑창기마대가 돌격해 오고 있는 것이다.

    승패는 누가 보더라도 뻔했다.

    “물러나지 마라!”

    열혈도 묵혈엽이 외쳤다.

    “우리에겐 회주님이 계시다!”

    그 목소리는 흑도회와 무림맹 기마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회주인 진무량 역시 그 말뜻을 즉시 깨달았다.

    진무량은 자신의 애도, 흑월을 높이 쳐들었다.

    후우우욱.

    흑색 대도, 흑월에 서린 도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것은 거대한 도의 형상을 이루며 섬뜩한 도기를 줄기줄기 흘려 내고 있었다.

    “오오오오!”

    흑도회와 무림맹 기마대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흑월도 진무량이 있는 한 패배는 없다.

    그 확고한 믿음이 지금 이 순간 살아남은 흑도회와 무림맹 무사들을 하나로 만들고 있었다.

    두두두두.

    양측의 말발굽 소리는 이제 지축을 울릴 듯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놈들.’

    묵혈엽은 이를 악물었다.

    누가 저들을 그저 도적 떼들이라 하겠는가?

    일사불란한 행동과 연계, 그리고 조직적인 전술은 이미 군에 버금가지 않는가?

    그 순간 묵혈엽의 가슴에 한가닥 불안이 싹텄다.

    ‘혹시…….’

    이토록 조직적인 저들이 과연 회주인 흑월도 진무량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두두두두.

    그러나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눈앞으로 짓쳐 드는 흑창기마대를 보며 묵혈엽은 도를 그러쥐었다.

    회주의 등을 지킬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으득.

    묵혈엽은 이를 악물며 충격을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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