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가주의 귀환
남궁세가의 가주를 만난 바로 그날 오후,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떠나시는군요.”
운현을 배웅한 사람은 남궁비연이었다.
남궁세가의 잠룡으로서 ‘총감찰’이라는 직위를 얻게 된 남궁비연이 직접 나온 것이다.
“오라버니께서 해 주신 것들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해 드린 것은 없습니다. 모두 소저께서 성취한 것이지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남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운현이 첫 번째 검식을 펼쳐냈을 때, 남궁비연은 그것이 창궁검의 첫 초식임을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운현에게 창궁검의 검보를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그 검이 창궁검임을 몰랐다면 저는 마지막까지 버텨 낼 수 없었을 거예요.”
마음가짐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특히 무인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음에는 더 강한 검세가 덮쳐 온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남궁비연은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각오가 그녀를 끝까지 버티게 만들었다.
“남궁세가의 제자라면 그 정도는 능히 알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안다고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알기 때문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남궁비연이 아니었다면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고마워요.”
남궁비연은 밝게 웃었다.
잠시 침묵하던 남궁비연이 물었다.
“……제가 남을 줄, 알고 계셨나요?”
“네.”
제갈세가에서 남궁비연을 만났을 때 운현은 그녀가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수치와 조롱을 견디며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절대 흔한 성품이 아니다.
남궁비연은 바로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운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는 소저를 처음, 아니 두 번째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요? 후후훗.”
남궁비연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별것 아닌 말이 왜 이렇게 기쁘게 들릴까?
“아, 참.”
문득 운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 품에 손을 넣었다.
“이제 돌려드리겠습니다.”
슥.
운현의 손에 들린 것은 하얀 옥패였다.
과거 남궁비연이 운현에게 주었던 것이다.
잠시 주저하던 남궁비연은 가만히 손을 내밀어 옥패를 받아 들었다.
운현의 체온으로 따뜻해진 옥패를 남궁비연은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젠.”
옥패를 돌려준 의미를 남궁비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라 부르면 안 되는 거겠지요?”
이 작은 옥패는 운현과 남궁비연의 인연의 시작이다.
구태여 돌려줄 필요가 없는 이 옥패를 돌려준 것은 한 가지 의미밖에는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의 의남매는 끝난 것이다.
“그래도 제가 소저의 후견인이라는 건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당신은 제가 선택한 잠룡이니까요.”
남궁비연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아름다웠다.
***
잠룡선발이 끝난 후, 남궁세가의 대의사청에서 회의가 열렸다.
가주가 주재하고 모든 직계가 참석하는 전체 회의였다.
남궁세가의 계파들은 물론, 잠룡선발에 나섰던 후보들 역시 그 가운데 있었다.
“잠룡선발이 끝났소.”
가주 철검 남궁벽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옆에는 총감찰로 임명된 남궁비연이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혼란은 용납하지 않겠소. 모든 혈족들은 선대 가주의 유지를 이어…….”
“잠룡선발은 끝났으나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주의 말을 끊은 사람은 바로 남궁준, 중경 지부장 남궁철의 아들이었다.
심사관이던 운현은 떠났다. 남궁비연은 여자이며, 가주의 외동딸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았다.
권력구도 자체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남궁준은 사뭇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했다.
“많은 이들이 가주의 결정에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애초에 전례에도 없는 심사관을 세운 것 자체가 가주의 전횡이라는 지적도…….”
덜컹.
철검 남궁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남궁벽을 향하고, 남궁벽은 남궁준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물었다.
“총감찰, 가주에게 불경한 자는 어찌 징계하도록 되어 있는가?”
총감찰 남궁비연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옥에 가두고 태장으로 매우 치며, 사안이 심각할 경우 목숨을 거둡니다.”
태장은 때리는 형벌에 사용하는 도구다.
“가주. 이건…….”
중경 지부장 남궁철이 무언가 말하려던 때였다.
“가문의 기강을 흐트러뜨린 죄는?”
남궁비연은 움찔했다.
하지만 가주의 물음에 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면직하며 무공을 폐하고 쫓아냅니다. 사안이 위중할 경우……, 죽음으로 그 책임을 묻습니다.”
저벅.
철검 남궁벽은 천천히 남궁준을 향해 걸었다.
“적을 앞에 두고 가문에 분란을 조장한 자는 어찌 징치하는가?”
남궁준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남궁비연도 차마 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말하라, 총감찰. 어찌 징치하는가?”
남궁벽이 다시 물었다.
남궁비연은 각오를 굳히고 답했다.
“적전분열을 야기한 자는 사형입니다.”
스릉.
남궁벽의 검, 철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준은 물론이고 남궁철이나 다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남궁벽은 남궁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궁세가의 핏줄은 그 누구도 벌할 수 없다.”
한순간 모두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빠른 판단이었다.
“오직 남궁세가 외에는.”
훅.
남궁벽의 철검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 것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남궁벽의 검에 시퍼런 검기가 서리는 것을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아악!”
남궁준이 한쪽 어깨를 쥐고 나뒹굴었다.
“준아!”
남궁철이 대경실색하여 즉시 남궁준의 혈도를 짚었다.
탁, 타닥.
피는 즉시 멈췄다.
그러나 이미 잘려 나간 한쪽 팔을 다시 붙일 수는 없었다.
“이익!”
남궁철은 분노했다.
눈앞에서 아들의 팔이 잘렸으니,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철검 남궁벽과 시선이 맞닿은 순간, 남궁철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남궁벽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웅.
검기가 일렁이는 남궁벽의 검 역시 여전히 섬뜩한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중경 지부장 남궁철은 그 직무의 태만함을 물어 면직한다.”
그 눈빛만큼이나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근신하고 처분을 기다리라.”
처분을 기다리라는 말은 정치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남궁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입을 여는 순간, 남궁벽의 검이 목을 벨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혈족 집단에서 가주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무력을 가진 무가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제군주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가 바로 세가의 가주인 것이다.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은 오직 너희가 남궁가의 피를 가졌기 때문이다.”
철검 남궁벽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골쇄신하여 보은하라.”
남궁철의 입장에서 그것은 이가 갈릴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남궁철은 감히 분노를 표출하지 못했다.
절대복종.
그것이 바로 남궁세가의 법이자 규율이었기 때문이다.
“……으, 은혜에.”
남궁철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결국 그는 예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드립니다.”
쿵.
남궁철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고개 숙인 남궁철을 철검 남궁벽은 여전히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슥.
남궁벽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의사청에 가득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똑바로 마주했다.
“남궁세가는 검왕가다.”
그 목소리는 낮았지만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산이 가로막는다면 산을 베고, 바다가 앞길을 막는다면 바다를 가르는 것이 바로 남궁세가의 검이다.”
철검 남궁벽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이를 훼방하는 자는 설령 남궁가의 직계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라.”
그 목소리에 담긴 의지를 모든 사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철검 남궁벽은 계파 하나를 날려 버렸다.
지금도 검명을 흘리고 있는 저 서슬 퍼런 검기로 말이다.
“대답은?”
철검 남궁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남궁비연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가주의 뜻을 받듭니다!”
그녀가 두 손을 모으고 예를 표하자 다른 이들도 급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가주의 뜻을 받듭니다!”
“가주의 뜻을 받듭니다.”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가주의 뜻을 받듭니다!”
대의사청이 떠나갈 듯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검 남궁벽은 대의사청에 가득한 이들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선대 가주 뇌검 남궁진천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드디어.’
계파와 지위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가주께서 돌아오셨다.’
혼란의 때는 끝났다.
절대의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드디어 남궁세가에 돌아온 것이다.
그는 바로 남궁세가의 가주, 철검 남궁벽이었다.
***
따각, 따각.
독고랑이 모는 마차는 대도시 합비를 벗어난 후 관도 변에 멈춰 섰다.
왜 멈췄는지 운현은 묻지 않았다.
독고랑 역시 설명하지 않았다.
마차가 길 옆에 서고, 말조차 의아한 듯 투레질을 하던 때였다.
푸르르.
“소림으로 가십시오.”
문득 독고랑이 말했다.
“비록 속가제자라 하나 소림 장문인의 사숙입니다. 소림은 결코 대인을 홀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럴 수 없네.”
운현이 나지막이 답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전하지 않으면 어찌 스스로 책무를 다했다 하겠는가?”
“이미 서찰을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무림맹이 사지가 될 것이라는 남궁벽의 말을 들은 운현은 즉시 무림맹으로 서찰을 보냈다.
“그러니 무림맹은 버려 두십시오. 대신 소림과 남궁세가를 발판으로 세력을 모으십시오. 무림맹이 무너지고 나면 대의명분은 바로 대인께 있습니다.”
독고랑의 담담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대인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많습니다. 대인을 돕고자 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무림맹이 무너지고 대인께서 뜻을 세우신다면 그들은 반드시 대인께 모여들 것입니다.”
단호한 어조로 독고랑은 말했다.
“강호 무림은 힘의 세계입니다. 세력이 없다면 그 어떠한 뜻도 관철할 수 없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제 오지 말라고, 신승께서 말씀하시더군.”
퉁명스러운 신승 불영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운현은 말했다.
“그 말씀이 이런 뜻이었나 보네.”
어쩌면 신승은 이 모든 일들을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운현에게 오지 말라고 한 말은, 와룡헌이 아니라 무림맹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러면…….”
“하지만 나는 돌아가야 하네.”
독고랑은 얼굴을 굳혔다.
“……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돌아가야지. 내가 살릴 수 있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니까.”
전서를 보냈지만 무림맹이 그것을 믿어 줄까?
모용세가라면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림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맹에서 일하는 평범한 이들과 서기들은, 지객당의 관지부와 변기량은 과연 어떻게 될까?
운현은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적어도 듣는 척이라도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현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아직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다네.”
독고랑의 굳은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현이 뜻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독고랑은 말했다.
“그 어디라도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 무뚝뚝한 말이 운현은 너무나 고마웠다.
“고맙네.
운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것은 독고랑이 자신의 말을 따라 줘서가 아니라, 옆에 있어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이랴!”
히히힝.
말은 크게 한번 운 후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운현과 독고랑이 탄 마차는 거침없이 관도를 질주했다.
이제 곧 죽음의 땅이 될, 무림맹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