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세상에 오직 한 사람
지긋이 운현을 쳐다보던 남궁벽이 문득 물었다.
“검보는 보았소?”
“네.”
운현은 품에서 나무 함을 꺼내 서탁 위에 놓았다.
남궁비연을 통해 전해받았던, 창궁검법의 검보가 들어 있는 함이었다.
달칵.
목함이 열리고 낡은 창궁검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궁벽은 검보가 아니라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무언가 발견한 것은 없소?”
“없습니다.”
“내게 보여 주고 싶은 것도?”
남궁벽의 눈빛은 완연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네. 없습니다.”
남궁벽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군.”
슥.
남궁벽은 함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물끄러미 오래된 검보를 내려다보았다.
“후후.”
자조적인 웃음이 남궁벽에게서 흘러나왔다.
“나는 당신이 이 창궁검보에서 형님을 찾아 주지 않을까 생각했소. 창궁검을 펼치는 당신의 검에서 어쩌면 내 형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생각해 보면 정말로 어리석은…….”
“그건 당신입니다.”
운현이 남궁벽의 말을 끊었다.
남궁벽은 고개를 들었다.
운현은 남궁벽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건 제가 아니고 바로 당신이라는 말입니다.”
남궁벽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무슨, 뜻이오?”
묻는 그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제게는 단 한 분뿐인 의형이 계셨습니다. 제게 검을, 그리고 인생을 가르쳐 주신 그분을, 그러나 저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잃어야만 했습니다.”
운현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남궁벽은 입을 굳게 다물고 운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책을 보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리고 검을 잡는 것조차도요.”
운현은 잠시 이를 악물었다.
그날의 슬픔이 어제 일처럼 가슴속에서 치솟아 올라왔다.
“그런데 어느 날 누가 그러더군요.”
남궁벽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다른 이들이 웃는다고 말입니다.”
철검 남궁벽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내가 형님을 만난 마지막 사람이라는 것도, 그분의 유품을 수습한 사람이라는 것도 모두가 다 아는데, 그분이 뒤를 맡긴 사람이 누구인지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운현의 눈시울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겨우 이 정도의 사람이었냐고 말입니다.”
남궁벽은 으스러질 듯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감았지만 이미 그의 눈은 젖어 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운현의 목소리에 남궁벽은 눈을 떴다.
“그들에게 형님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형님을 보여 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말하는 운현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당신의 형님을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뇌검님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당신뿐입니다.”
남궁벽의 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소?”
떨리는 남궁벽의 목소리에 운현은 답했다.
“네.”
고개를 끄덕이며 운현은 말했다.
“그렇습니다.”
남궁벽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운현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찾아 헤매는 뇌검 남궁진천은 오직 남궁벽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천하에 그 누가 자신만큼 형님을 알며,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자신만큼 형님을 그리워하랴?
그러니 자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뇌검 남궁진천을 보여 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형님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이제껏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만 있었다.
“……그랬구려.”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남궁벽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러나 철검 남궁벽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
감추지도 않았다.
“고인의 함자가 어찌 되오?”
운현이 나지막이 답했다.
“일씨 성에 충 자, 현 자를 쓰셨습니다.”
“형님은 남궁씨 성에 진 자, 천 자를 쓰셨소.”
남궁벽은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잊지 말아 주시오.”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겠습니다.”
남궁벽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후회도, 회한도, 슬픔조차도 없었다.
푸른 하늘처럼 청명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는 철검 남궁벽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아.’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어딘가 쇠약해 보이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강렬한 눈빛에 거구의 장대한 무인.
철검이라는 명호가 더없이 어울리는 사내이자 신승마저 부족함이 없다고 인정한 남궁세가의 새로운 가주.
철검 남궁벽이 운현의 눈앞에 있었다.
“고맙소, 운 대인.”
남궁벽이 빛나는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 세가에 원하는 것이 있지 않소?”
“있습니다.”
운현은 말을 돌리지 않았다.
지금의 남궁벽 앞에서는 숨기는 것이 쓸데없다.
“현재 무림의 정세에 대해, 정확하게는 수로채 연합과 녹림의 움직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남궁벽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허어.”
남궁벽은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운 대인의 통찰이 참으로 대단하오.”
진지한 눈빛으로 남궁벽은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장강수로채 연합이 개파대전을 열었소.”
개파대전은 새로운 문파가 그 출발을 천하에 널리 알리는 행사다.
하지만 장강수로채 연합 같은, 문파라기보다는 수적 떼에 가까운 집단이 개파대전을 연다는 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수로채 연합이 개파대전을요?”
“그렇소.”
남궁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채주인 철면무심 이무심은 개파대전에서 두 가지를 선언했소. 첫째는 공손세가의 본가를 불태운 것이 바로 녹림의 흑창기마대라는 것이오.”
운현은 입을 악다물었다.
녹림에 대한 자신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녹림과 함께 무림맹을 치겠다는 선언이었소.”
“무림맹을요?”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수로채 연합과 녹림이, 정확히는 일대상인이 무언가 하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무림맹이었다니?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오.”
남궁벽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강수로채 연합은 날로 그 세를 더하고 있소. 이미 확인된 규모만 해도 오천 이상이며, 녹림을 더하면 그 수가 일만에 육박하오.”
‘일만!’
아무리 수적과 산적이라 해도 일만이라는 숫자는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반면 현재 무림맹에 있는 무인들의 수는 천이백이 채 되지 못하오.”
무림맹에 상주하는 무인은 그리 많지 않다.
천하무림대회의 진행이 지지부진해지자 대부분의 문파가 돌아갔으며, 결의에 따라 남아 있는 이들은 예전 십팔대 문파, 정확히는 남궁세가와 공손세가, 당문을 제외한 열다섯 문파와 신흥오대세가뿐이다.
“허나 그 무위는…….”
“물론 그렇소.”
한낱 수적, 산적들과 거대 문파의 무인이 어찌 비교가 되랴?
현재 무림맹에는 각 문파의 수장들은 물론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고수들이 총집결해 있다.
가히 무림의 태산북두가 모두 모여 있는 셈이니 열 배에 달하는 상대의 수적 우위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허나 단기적으로는 분명 무림맹은 곤란에 처할 것이오. 일단 우리 남궁세가나 공손세가가 즉각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데다가…….”
안휘성의 남궁세가는 암천무제에 의해 사실상 봉문했다.
강서성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손세가는 흑창기마대에게 본가가 불타 버렸다.
무림맹에서 가장 가까운 두 성, 강서성과 안휘성이 텅 비어 버린 셈이다.
“장강의 물길 역시 수로채 연합 때문에 막혀 있으니 말이오.”
두 성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면 남은 것은 장강을 통해 문파의 전력을 증원하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장강수로채 연합을 뚫어야 한다.
“사실상 무림맹은 완벽하게 고립되어 버린 셈이오.”
‘아!’
운현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무림맹 서고에서 중얼거린 말이었다.
―이렇게 많은 서책들이 대부분 천하무림대회 얘기뿐이라니.
―그리고 암천무제와 남궁세가에 대한 이야기지.
―이번에는 공손세가에 일어난 사건 보고로 채워지겠군.
그리고 뒤이은 것은 바로 신승의 목소리였다.
―네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무림맹에 문파들이 모였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가장 가까운 두 성이 비어 버렸다.
그렇다면 수로채와 녹림이 노리는 바는 분명하다.
바로 고립된 무림맹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림맹이 무너지거나 하진 않소.”
남궁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강의 물길을 막았다지만 거대 문파들의 본가에 남아 있는 전력이 투입되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자칫 잘못하면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는 형국이 될 테니까.”
수로채 연합과 녹림의 숫자가 일만이라 해도 거대 문파들이 작정하고 나서면 그 우위는 순식간에 뒤집힌다.
“무엇보다 그런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관부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수로채 연합이든, 무림맹이든 결코 오래 끌려 하지는 않을 게요. 결국 무림맹이 곤란을 겪는 것은 일시적인 일이 될 것이오.”
상황이 크게 번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관부의 존재였다.
무장한 수천의 사람이 움직이는 일을 관부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관부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모든 사태는 종결이다.
수로채와 녹림의 연합은 단번에 와해될 것이며 무림맹 역시 발을 빼기에 급급할 것이다.
그러니 수로채든 녹림이든 무림맹이든, 관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사태는 끝난다.
그것이 남궁세가의 결론이었다.
“그렇다 해도 무림맹이 입을 타격은 크오. 잠시나마 무림맹이 곤란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한 데다가, 수로채나 녹림 따위의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치욕적인 일이니까.”
남궁벽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결국 이후 무림맹 체제는 안팎으로 흔들릴 수밖에…….”
“만일.”
운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수로채와 녹림에게 또 다른 힘이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또 다른 힘이라 하셨소?”
“저들의 배후에는 일대상인이라 하는 자가 있습니다.”
운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암천무제조차 그가 가진 힘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에게는 분명 또 다른 무력 집단이 존재합니다. 적어도 황천대나 암천무제에 필적하는 무력 집단이요.”
남궁벽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저들이 관부에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대상인이 수로채와 녹림뿐 아니라 관부와 상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으리란 추측은 운현이 이미 무림맹의 가주와 장문인들에게 말한 바다.
그들은 운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철검 남궁벽은 달랐다.
“관부에?”
굳은 표정으로 반문하는 남궁벽에게 운현은 말했다.
“네. 국지적인 혼란을 중앙에, 비록 단기간일지라도 철저하게 숨길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운현은 문왕이 상급 무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았다.
국경 수비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운현은 일대상인이 가진 영향력이 작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으음.”
철검 남궁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의 결론을 지탱하던 대전제 중 두 개, 무림맹의 전력 우위와 관부의 개입이 무너졌다.
운현의 말대로 황천대나 암천무제에 준하는 또 다른 무력 집단의 존재와 관부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결과는 명백했다.
“그렇다면.”
남궁벽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무림맹은 사지(死地)가 되겠군.”
철검 남궁벽의 표정이 굳은 것도 당연했다.
천하의 무림맹이 죽음의 땅이 되리라는 말을 그 누가 믿을 것인가?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운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에겐 아직도 물어야 할 것이, 아니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운현은 심각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들이 무림맹을 무너뜨린 이후에는 과연 무엇을 노리게 될까요? 무엇이 그들의 원하는 바가 되겠습니까?”
남궁벽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무림맹을 무너뜨린 이후라니?
하지만 그는 곧 운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설마!”
남궁벽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그러나 운현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