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남궁세가의 잠룡
잠룡선발의 참가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끝까지 남으라고?”
“그럼 설마 난전을? 그런 하오문 따위에서나 할 짓을…….”
“말도 안 되오!”
여러 명이 한꺼번에 싸우는 난전은, 검왕가를 자처하던 명문세가에서 할 비무는 결코 아니었다.
더구나 세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잠룡선발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난전은 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비무도 없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견뎌 내기만 하면 됩니다.”
스릉.
운현이 검을 뽑았다.
북해의 검 미명이 햇빛 아래 그 아름다운 칼날을 드러냈다.
이곳저곳에서 감탄이 흘러나왔지만 운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여러분은 남궁세가의 사람으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남궁세가는 여러분의 자랑이자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울타리는 없습니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에게는 수많은 난관이 닥칠 것입니다. 그 어려움에 맞서 여러분은 남궁세가를 지켜 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개인의 명성도, 무공도, 자부심도 아니라.”
우우웅.
운현의 미명이 나지막이 울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의지입니다.”
후욱.
미명의 칼날에 푸른 기운이 일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섬뜩한 기운이 되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헉!”
“거, 검기!”
그것은 바로 검기였다.
과거 환우오천존만이 보여 줄 수 있었던, 그리고 뇌검 남궁진천이 성취했던 그 검기가 바로 지금 운현의 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후우우웅.
운현의 검기는 미명을 휘감고 더더욱 커져 갔다.
뇌검 남궁진천이 마지막으로 선보였던 검기조차 지금 운현의 검기에 비하면 부족하게 보일 정도였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뒤에서 들린 다급한 목소리는 중경 지부장 남궁철의 목소리였다.
“저들을 모두 죽일 셈이오!”
운현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후보자들을 바라보며 운현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요.”
서늘한 운현의 눈빛에 참가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쉽지 않을 테니…….”
빙긋 웃으며 운현이 말했다.
그건 후보자들이 본 그 어떤 미소보다 더 섬뜩하고 무서웠다.
“검을 뽑는 편이 좋을 겁니다.”
차차창.
누구랄 것도 없었다.
후보자들은 급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의 내력을 끌어 올리며 검을 마주 세웠다.
웅웅웅웅.
남궁세가의 잠룡 후보들답게 그들의 검에서는 하나같이 검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감히 운현의 검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면.”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자, 잠깐…….”
남궁철이 무어라 소리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후욱.
운현의 검이 허공을 가랐다.
그러자 뒤이어 일어난 엄청난 기세가 후보자들을 향해 짓쳐 들었다.
후우우우욱.
“크윽!”
후보자들은 검을 세운 채 모든 내력을 쏟아부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운현이 일으킨 검기의 여파는 지켜보던 사람들은 물론 대연무장 전체를 단번에 집어삼켜 버렸다.
“허억!”
“으아아악!”
비명이 튀어나오고 물건들이 나뒹굴었다.
말 그대로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대연무장은 단숨에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운현의 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후우욱.
운현의 검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콰과과과곽.
난폭한 검세가 후보자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짓쳐 들었다.
그 기운은 앞선 검격보다 한층 더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운현의 검기가 더욱 강해진 것이다.
“미, 미친…….”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말을 맺지는 못했다.
검기의 후폭풍이 지켜보던 이들조차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콰과곽.
그래도 남궁세가에서 나름 영향력이 있다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급히 내력을 끌어 올려 후폭풍에 저항했다.
하지만 운현의 검세는 그들의 생각보다 더욱 크고 강했다.
“으악!”
“머, 멈추시오!”
“크헉.”
사람들이 나뒹굴고 여기저기서 신음과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운현은 멈추지 않았다.
운현의 검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다음 검로를 그려 나가고 있었다.
콰아아앙.
폭음이 터져 나오고 이전보다 더욱 강렬한 충격이 대연무장을 뒤흔들었다.
검격을 거듭할수록 강해지는 그 검로는 바로 남궁세가의 검, 창궁검이 가진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 무지막지한 검세를 버텨 낸 사람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후우우.
운현이 검을 멈추자 폭풍 같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바닥에 나뒹굴던 그대로 고개를 들어 운현과 연무장을 쳐다보았다.
연무장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후보자들은 정신을 잃은 채 여기저기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사방에는 어째서인지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고, 갑자기 겨울이라도 찾아온 듯 서늘한 한기가 연무장을 뒤덮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검세였다.
놀라운 그 검세가 휩쓸고 간 연무장에, 아직도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운현의 검기를 버텨 내고 여전히 검을 쥔 채 서 있는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남궁비연이었다.
“후후.”
운현은 가볍게 웃었다.
최고라던 남궁진휘도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른 후보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겪은 건 그저 후폭풍일 뿐이었지만, 후보자들은 운현의 검이 일으킨 결과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남궁비연은, 비록 옷차림이며 머리카락은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후욱, 후욱.”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때마다 하얀 김이 허공에 맺혔다.
긴 머리와 옷자락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를 흐리게 하지는 못했다.
한 자루 검은 여전히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꺾이지 않은 전의가 분명히 빛나고 있었다.
스릉.
미명의 칼날에서 검기가 사라졌다.
운현은 검을 거두었다.
“주, 준아!”
중경 지부장 남궁철이 외쳤다.
당장이라도 쓰러진 아들에게 달려가려던 남궁철은 순간 멈칫했다.
스륵.
운현은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운현은 목소리가 대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남궁세가의 잠룡입니다.”
대연무장이 침묵했다.
이의를 말하는 사람도, 항의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 전 그들을 휩쓸었던 그 검세를 떠올리며, 사람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도 말이 없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위임받은 권한에 따라 잠룡을 선발했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가주 철검 남궁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뒹굴지 않은 몇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승인하네.”
철검 남궁벽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가주께서 승인하셨으니 이제 이 사람이 남궁세가의 잠룡입니다. 만일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이는 저와 가주님을 향한 심각한 모독이니.”
후우욱.
운현의 전신에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결단코 묵과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직접 마주한 운현의 기세는 섬뜩함을 넘어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이 기세를 맞서야 했던 후보자들이 오히려 대단하다고 느껴질만큼 말이다.
“클클클.”
늙은 노원로가 마른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역시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비연의 의형이 아니라 철검, 네놈의 의형으로 삼았어야 할걸 그랬구나?”
철검 남궁벽을 보며 웃던 노원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좋은 걸 봤군. 클클클클.”
노원로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떴다.
운현은 사람들을 향해 예를 표한 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독고랑과 함께 대연무장을 떠났다.
“이, 이게 대체…….”
누군가 중얼거렸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운현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남궁세가의 잠룡선발이 끝난 것이다.
***
남궁세가 가주의 집무실.
운현은 철검 남궁벽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떠나시려오?”
철검 남궁벽이 물었다.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맡은 일이 끝났으니 더 이상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남궁벽은 웃음을 흘렸다.
“운 대인이라면 계속 머무른다 해도 누가 무어라 하겠소?”
“아닙니다.”
운현이 말했다.
“제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남궁벽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고맙소.”
집무실에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구려.”
남궁벽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오.”
운현은 남궁벽의 사의에 예를 표했다.
잠시 후, 운현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저를 심사관으로 세우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철검 남궁벽이 운현을 본 것은 단 한 번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운명을 운현에게 맡겼다.
잠룡이 갖게 될 권한을 생각하면 운명이란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과연 신승의 사제라는 배분이나, 검성이 인정한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남궁벽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창룡검주이기 때문이오.”
운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납득했다.
운현은 이미 무림맹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남궁세가가, 신승이 인정하고 이미 운현의 배분까지 알고 있던 남궁세가라면 그 사실을 놓칠 리 없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 못 할 것은 있었다.
“허나 그렇다 해도…….”
자신이 창룡검주라는 것과 가주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걸까?
“나는 당신에 대해 알고 있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궁벽은 회한이 담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 당신에 대하여 한 말을 기억하고 있소.”
철검 남궁벽의 형님은 바로 선대 가주인 뇌검 남궁진천이다.
잠시 침묵하던 남궁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서찰은 일대 사건이었소. 비록 서찰을 받은 이들이 철저히 함구하는 통에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남궁세가의 이목을 피하지는 못했지.”
남궁벽의 시선은 먼 예전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처음부터 형님은 당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소. 비록 당신에게 서찰을 받은 적은 없지만, 어쩌면 형님은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인가를 당신에게서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소.”
뇌검 남궁진천은 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러나 세가의 가주이자, 무림맹의 거대 문파들 사이에서 가문을 지켜야 하는 책무는 그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놀라게 한 것이 바로 천외비처 창룡검주의 서찰이었다.
그 서찰을 받은 이들이 하나같이 창룡검주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호의를 보인다는 점도 남궁진천을 놀라게 했다.
―벽아. 창룡검주라는 사람을 한번 만나 보고 싶지 않으냐?
남궁진천의 말에 남궁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는 자를 만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형님.
―녀석, 심통 부리기는. 그래도 어쩐지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 아니냐? 네 수련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고.
―그런 자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습니다.
남궁벽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게는 형님이 최고입니다.
―허허, 그러냐?
남궁진천은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중년을 넘겼지만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웃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구나.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진천은 말했다.
―강호 무림이 그저 모략과 힘만이라면, 너무나 슬픈 일일테니 말이다.
“역시.”
남궁벽은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의 말씀이 옳았던 것 같소.”
운현은 남궁진천이 기대한 그대로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