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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26화 (226/530)
  • 226화. 대답과 변명

    남궁비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 운 학사님…….”

    “의형이라 부르십시오, 의매.”

    운현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상황은 어쨌거나 그녀에 대한 운현의 감정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인간적으로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네, 의형.”

    남궁비연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눈가가 촉촉한 것은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이제 운 대인께서 외인이 아니게 되었소. 어떻소, 운 대인? 심사관의 직을 받아 주시겠소?”

    그건 물을 필요조차 없는 말이었다.

    “부족하오나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운현이 답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중경 지부장 남궁철이 소리쳤다.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이런 식의 전횡이 어찌 용납될 수 있단 말입니까! 마땅히 가문의 원로들께 먼저 허락을 구하여…….”

    “흘흘.”

    말없이 앉아 있던 깡마른 노인이 웃음을 흘렸다.

    “괜찮군.”

    메마른 목소리였지만 남궁철은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원로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왜소한 체격에 굽은 등을 가진 그 노인은 앙상한 손을 들어 운현을 가리켰다.

    “그깟 심사관 자리 하나 던져 주고 신승의 사제를 손아랫사람으로 둘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거래 아니냐?”

    운현이 남궁비연과 의남매가 되었다 해서 남궁세가의 다른 이들과도 관계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의형제, 의남매는 무림의 배분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승의 사제인 운현이 남궁세가의 아가씨와 의남매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손아랫사람’이라는 말은 옳지 않지만 남궁세가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허, 허나…….”

    “됐다.”

    중경 지부장 남궁철의 항의를 노인은 막아 버렸다.

    “성화에 못 이겨 나왔더니 오랫만에 재미있는 꼴을 보는구나. 흘흘흘.”

    노인은 철검 남궁벽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어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봐라.”

    철검 남궁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의 연회는 끝났다.

    ***

    다음 날, 운현은 철검 남궁벽의 집무실에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괜찮을 것도, 괜찮지 않을 것도 없소.”

    남궁벽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 대인께서 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하시오. 나는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겠소.”

    그건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은 어조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하시오.”

    “그렇다면.”

    운현은 대답했다.

    생각은 이미 어젯밤에 충분히 했다.

    “남궁가의 검보를 볼 수 있겠습니까?”

    “검보 말이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룡선발은 남궁가를 이끌 인재를 뽑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궁가의 검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겠지요. 그러니 제게 남궁가의 검보를 보여 주십시오.”

    그 말은 이치에 맞았다.

    남궁세가의 검도 모르면서 남궁세가의 잠룡을 어찌 뽑으랴?

    “……어떤 검보를 원하시오?”

    남궁세가의 절기는 창궁무애검법이다.

    오늘날의 남궁세가를 검왕가로 만들었으며, 산과 바다까지 가른다고 일컬어지는, 오직 가주 외에는 허락되지 않는 독보적인 검법이다.

    철검 남궁벽은 운현이 그것을 원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운현의 대답은 달랐다.

    “아무 것이든 좋습니다.”

    운현은 말했다.

    “그저 이것이 남궁가의 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것 하나면 족합니다.”

    “흐음.”

    철검 남궁벽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창궁검보를 주겠소.”

    “창궁검보요?”

    “그렇소.”

    남궁벽은 말을 이었다.

    “창궁검은 남궁세가에 들어온 이들이 배우는 첫 번째 검법이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남궁세가다운 검법이기도 하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창궁무애검법의 시작은 바로 이 창궁검이라 하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궁검은.”

    철검 남궁벽이 나지막이 말했다.

    “형님께서 가장 아끼시던 검이기도 하오.”

    그의 눈동자에 스치는 회한을 운현은 놓치지 않았다.

    “……이것으로 되겠소?”

    “충분합니다.”

    운현은 예를 표하고 가주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때까지 철검 남궁벽은 자리에 앉은 채 그저 회한만을 곱씹고 있었다.

    ***

    “오라버니.”

    숙소에서 책을 읽던 운현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십시오.”

    그녀가 오는 건 알고 있었다.

    독고랑이 기척을 느끼고 조금 전 운현에게 말해 주었으니까.

    사락.

    문이 열리고 남궁비연이 들어섰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녀는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머리에는 반짝이는 장신구까지 하고 있었다.

    ‘오.’

    내색하지 않았지만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옷차림과 단장만으로 그녀의 인상이 확 바뀌어 버린 것이다.

    생기발랄한 아가씨 같던 그녀가 지금은 우아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마음껏 풍겨 내고 있었다.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오라버니?”

    “네, 의매.”

    운현은 남궁비연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리한 청을 받아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오라버니.”

    “아닙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싫어하는 사람과 의남매를 맺지는 않으니까요.”

    남궁비연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아, 참.”

    달칵.

    남궁비연은 작은 목함을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좋은 나무에 정교하게 세공을 한,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함이었다.

    “아버지께서 전하라 하셨어요.”

    사락.

    남궁비연은 목함을 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 된, 얄팍한 서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서(古書)?’

    운현의 눈빛이 단번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창궁검보예요.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전해지는 것 중에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지요. 그리고…….”

    검보를 내려다보며 남궁비연은 쓸쓸한 눈빛으로 말했다.

    “선대 가주께서 가장 아끼시던 검보이기도 하고요.”

    운현은 조금 놀랐다.

    선대 가주, 뇌검 남궁진천이 가장 아끼던 검법이 창궁검이라는 것은 이미 들었다.

    그런데 설마 사본도 아니고 그 검보를 그대로 내줄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까? 이런 것을…….”

    이 정도면 충분히 가보다. 이런 것을 받아도 되는지, 운현으로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요.”

    남궁비연은 입술을 깨물고 덧붙였다.

    “……아마, 괜찮을 거예요.”

    운현은 남궁비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래된 검보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룡선발은 누가 참가합니까?”

    문득 운현이 물었다.

    남궁비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떤 사람들이 나오게 되지요?”

    “아, 그러니까…… 세가에서 영향력을 가진 모든 계파에서 나온다고 보시면 돼요.”

    “그래도 유력한 사람이 있겠지요?”

    “네. 우선 남궁진휘가 있고, 객잔에서 보신 남궁준 역시 유력한 후보예요. 그리고…….”

    “남궁진휘요?”

    생소한 이름에 운현이 물었다.

    “네. 실력으로는 그가 최고예요. 하지만 그가 잠룡이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째서요?”

    “방계니까요.”

    방계는 직계에서 갈라져 나온 혈족이다.

    혈연 중심의 세가에서 방계는 언제나 직계에 밀리기 마련이었다.

    “심사관은 저입니다만…….”

    하지만 운현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방계나 직계가 무슨 상관이랴?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남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예 나오지 않을 거예요. 직계와 연줄이 닿지 못한 방계는 외인이나 다름 없거든요.”

    그러니까 실력은 뛰어나지만 소외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를 잘 아시는군요.”

    운현의 말에 남궁비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려서부터 가까웠어요. 만일 제가 힘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를 발탁했겠지만…….”

    아직 젊은 아가씨인 남궁비연에게 힘이 있을리가 없다.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께서는요?”

    “저요?”

    “네.”

    남궁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여자이고, 제가 나서면 아버지가 곤란해지실 거예요.”

    아무리 무림 세가라 해도 여성이 가주가 된 전례는 없다.

    게다가 그녀는 철검 남궁벽의 외동딸이다.

    잠룡선발이 이루어진 이유도 그녀가 여자라는 것 때문이니 결코 고운 시선을 받지는 못하리라.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운현은 남궁비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남궁비연은 의아했다.

    “무슨…….”

    “저는 소저께 물었습니다. 하지만 소저는 지금 제게 변명을 했습니다. 대답이 아니라, 변명을요.”

    말하는 운현의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결정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다른 사람들이 정해 준 건 아닙니까? 환경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문제에서 도피해 버린 건 아닌가요?”

    그건 남궁비연의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다.

    “무조건 반항하라는 것도, 남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상황을 고려하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운현은 남궁비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을 속이지는 마십시오.”

    남궁비연은 입술을 깨물고 손을 움켜쥐었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은 금방 나왔다.

    다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용기가 없었다.

    이제까지는 말이다.

    “저는.”

    남궁비연은 고개를 들었다.

    “잠룡선발에 나가고 싶어요.”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죄송해요. 오라버니께도 폐가 될지도 모르지만…….”

    “제게요? 왜요?”

    “그야 오라버니께서 심사관이시니…….”

    남궁비연은 운현의 의매다.

    그녀가 잠룡선발에 나간다면 당연히 심사관인 운현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시험은 철저하게 공정해야 합니다. 그런 말은 결코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과거시험은 공정해야 한다.

    그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는 운현에게 남궁비연의 걱정은 불필요했다.

    “자, 그럼.”

    운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잠룡선발까지는 못 보겠군요.”

    남궁비연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밀회로 의심되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의매가 말한 공정성을 위해서요.”

    밀회는 남 몰래 은밀히 만나는 것이다.

    운현과 자신의 밀회라니, 어쩐지 야릇한 느낌이 들어서 남궁비연은 뺨을 붉혔다.

    “그럼 잠룡선발에서 뵙겠습니다, 의매.”

    그것은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남궁비연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목소리가 어딘지 달콤하기까지 하다고, 남궁비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

    “이봐, 나 떨고 있냐?”

    무심파 부채주 장삼채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똑같은 질문을 몇 번씩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짜증 낼 수는 없었다.

    상대가 바로 총채주 이무심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늠름하십니다.”

    환한 미소까지 지어 가며 장삼채가 대답했다.

    그러나 이무심은 못미더운 표정이었다.

    “늠름하다는 표현은 어딘가 걸맞지 않구나.”

    장삼채의 얼굴이 구겨졌다.

    채주 이무심의 고질적인 병이 또 도졌다.

    자신도 모르는 문자를 써 대는 그 버릇 말이다.

    “그럼 무어라고…….”

    “예컨대 휘황찬란하다든가, 혹은 장엄 무쌍하다든가. 아, 도무지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없구나. 이 의미심장하고 전무후무한 역사적 순간을 과연 무엇이라 해야 하는가?”

    역사적 순간이라는 말은 옳았다.

    수십 년간 명맥만 남았던 장강수로채 연합이 정식으로 개파대전을 선언하는 순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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