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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25화 (225/530)
  • 225화. 심사관

    운현은 힐끗 객잔 이 층을 보았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떠드는 목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아까 그 청년은 어떤 사람입니까?”

    운현에게 유독 적의를 보내던 청년, 남궁준을 떠올리며 운현이 물었다.

    “그는 이번 잠룡선발 후보 중 한 명이에요.”

    남궁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잠룡으로 선발되면 저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남궁비연이 그 청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 혐오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궁준은 계속 남궁비연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절 친근하게 대하셨군요. 그가 소저를 포기하게 하려고요.”

    그건 아마도 무언의 과시였으리라.

    운현은 그녀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유난히 가까이 붙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런 것도 있지만.”

    남궁비연은 빙긋 웃었다.

    “운 학사님이 좋아서요.”

    “……네?”

    전혀 의외의 대답에 운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팔에 매달릴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아요. 아무리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해도요.”

    말하는 남궁비연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운현이 당혹해하는 사이, 남궁비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함부로 배분을 밝혀서 정말 죄송해요, 운 학사님.”

    남궁비연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덕분에 저들이 본가로 들어올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정말로 죄송하고, 그리고 감사드려요.”

    그녀가 운현의 배분을 밝힌 건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다.

    검성의 후계자이자 신승의 사제가 남궁세가를 방문하는데 일개 계파가 주목을 받을 리 만무하다.

    저들로선 더 이상 버텨 봤자 얻을 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뭐, 괜찮습니다.”

    잠시 불쾌했던 기분도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자신은 남궁세가를 도우려고 온 것이 아닌가?

    오히려 운현은 남궁비연의 정치적 감각과 순발력에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스륵.

    남궁비연이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운 학사님.”

    “저기, 그런데…….”

    뭔가 주저하던 운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혹시 근친혼이 되지 않나요?”

    무슨 말인가 의아해하던 남궁비연이 살짝 웃었다.

    “남궁세가는 역사가 깊은 가문이랍니다. 저들과 저는, 굳이 따지자면 아주 멀어요.”

    “아하.”

    운현의 표정이 가벼워졌다.

    남궁비연도 사뭇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찾아와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오늘은 이 객잔에서 묵으세요. 최고로 좋은 방을 준비할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운현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남궁비연은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그녀는 웃는 얼굴이 어울린다고,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

    다음 날, 운현과 독고랑은 남궁세가의 가주, 철검 남궁벽을 만났다.

    “찾아 주셔서 감사하오.”

    철검 남궁벽은 사뭇 초췌해 보였다.

    체격도 건장하고 연륜도 깊어 보였지만, 철검(鐵劍)이라는 호가 붙을 정도였던 강한 기백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왜소하게 보일 정도였다.

    “검성과 인연이 있다 들었소.”

    “그렇습니다.”

    철검 남궁벽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단하군. 그 나이에 검성의 인정을 받다니…….”

    철검 남궁벽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딘지 처량하게까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저녁에 연회가 있소. 세가 식구들이 모이는 자리오만, 비연의 손님이시니 함께하셔도 좋을 듯한데, 어떻소?”

    “감사합니다.”

    운현은 남궁벽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머무는 동안 편히 지내시오. 그리고 언젠가 한번…… 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소.”

    어쩌면 그건 의례적인 말이었다.

    운현은 예를 표하고 가주의 집무실을 물러났다.

    숙소로 돌아온 운현은 창밖으로 보이는 남궁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잘 가꾸어진 정원은 전통 있는 세가의 저력을 보여 주는 듯했다.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문득 독고랑이 물었다.

    “음, 새삼 대단하다 싶어서.”

    운현은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이곳 사람들의 눈빛이나 행동에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네. 봉문한 상황에 가주의 권위가 흔들려 혼란스럽다는 데도 이 정도니, 그 전엔 어땠겠나?”

    그것은 운현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솔직히 내가 이들을 도울 역량이 될까 싶네.”

    “충분합니다.”

    독고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천하에 대인을 능가할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독고 제가 그렇게 말하니 낯이 뜨거운데.”

    운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내가 아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게. 자네가 천하의 모든 사람을 아는 건 아니니까 말일세.”

    “네, 대인.”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그것을 찾아 주라니.”

    창밖으로 보이는 남궁세가를 바라보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이거 참…….”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운현의 한숨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말해 주고 있었다.

    ***

    연회는 운현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다.

    용봉지회는 물론 제갈세가에서도, 그리고 북해에서도 경험했다.

    하지만 이곳, 남궁세가의 연회는 사뭇 달랐다.

    흥겨움과 가벼운 대화 대신 긴장과 침울함이 연회장에 가득했던 것이다.

    그것은 현재 남궁세가가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스륵.

    철검 남궁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하오. 먼 곳에서 오시느라 다들 수고하셨소.”

    가주가 감사의 말을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연회장에 자리한 세가 사람들과 원로들은 물론, 중경 지부장 남궁철, 그리고 그 아들 남궁준의 표정도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은.”

    철검 남궁벽이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비연의 손님으로 오신 운 대인이시오.”

    옆에 앉은 비연이 운현을 돌아보고,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운현입니다.”

    “손님?”

    “하필이면 이런 때에?”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운 대인은 무림맹의 서기시오. 그리고…….”

    가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본래라면 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궁벽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한때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졌던 분이며 지금은 신승의 사제시기도 하오.”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운현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남궁세가를 찾아 주셔서 감사하오. 운 대인.”

    남궁벽의 인사에 운현은 고개를 숙여 감사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뒤에 선 독고랑에게도 향했지만 남궁벽은 독고랑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럼, 편히들 즐기시기 바라오.”

    가주가 자리에 앉고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음악은 곧 멈춰야 했다.

    달칵.

    중경 지부장 남궁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남궁철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허나 지금은 마음 편히 연회를 즐길 상황이 아닌 듯싶습니다. 잠룡선발이 언제 시작되는지, 그것을 먼저 밝혀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뭇 도발적인 언사였지만 철검 남궁벽은 분노하지 않았다.

    “잠룡선발은 사흘 후에 시작하겠소.”

    그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이미 약속한 대로, 잠룡으로 선발된 자에게는 대내외 활동의 감찰 권한을 부여하며, 직속 무력 집단을 창설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오.”

    감찰 권한은 본래 부정이나 부패를 적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의도로 사용될 수도 있다.

    바로 가주의 명대로 진행되던 일을, 그것이 무엇이든 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화된 가주의 영향력은 빠르게 축소될 것이고 잠룡은 명실공히 남궁세가의 실세로 떠오르게 된다.

    잠룡선발이 ‘새로운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라던 남궁비연의 말은 과언이 아닌 것이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중경 지부장 남궁철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운현은 남궁비연이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정작 가주인 철검 남궁벽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잠룡선발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청년, 남궁준이 외쳤다.

    무례한 일이었지만 불쾌해하는 사람은, 적어도 남궁비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룡선발은 심사관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

    철검 남궁벽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잠룡선발의 방법과 진행 그리고 판정을 포함한 모든 것은 심사관의 권한이다.”

    “심사관?”

    생소한 호칭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중경 지부장 남궁철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심사관이라 하시면…….”

    “본래 인사는 가주의 고유 권한일세. 허나 내가 잠룡선발을 주재하면 여러 사람이 납득하지 못할 테니, 심사관을 두어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경 지부장 남궁철의 얼굴도 환해졌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허면 심사관은 가문의 원로들께…….”

    “아니.”

    철검 남궁벽의 목소리가 남궁철의 말을 잘랐다.

    “나는 여기 계신 운 대인께 심사관을 부탁하겠네.”

    그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언이었다.

    사람들은 당혹해하고 운현도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비연조차도 놀란 듯 아버지 남궁벽을 돌아보았다.

    “아, 아버지!”

    남궁비연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누군가 소리쳤다.

    “그는 외부인입니다!”

    “그러니 더욱 공정하겠지.”

    남궁벽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전례에 없는 일이오!”

    “잠룡선발은 전례에 있는 일이던가?”

    반론이 쏟아졌지만 철검 남궁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주의 결정에 반론이 제기되고 그것을 일일이 반박하는 상황은, 이미 가주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배분이 높은 사람에게 판결을 맡기는 것은 강호 무림에서 흔한 일. 운 대인은 신승의 사제이자 현 소림 장문인의 사숙이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비견할 사람이 없지.”

    철검 남궁벽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또한 운 대인은 검성의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가 심사관으로 부족하다 하겠는가?”

    중경 지부장 남궁철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철검 남궁벽의 말은 조금도 틀린 곳이 없었다.

    하지만 남궁철도 이대로 물러나진 않았다.

    “허나 이것은 가문 내의 일입니다.”

    남궁철은 원로들과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남궁세가가 내부의 일조차 스스로 정하지 못해 외부인에게 의지한다면 이는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그의 주장도 옳았다.

    그러나 철검 남궁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치욕이라면 이미 당하고 있다.

    “그러니 가주께서는…….”

    “외부인이 아니라면 되겠지.”

    남궁철이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철검 남궁벽은 운현에게 말했다.

    “갑작스럽소만, 비연의 의형이 되어 주시겠소?”

    그건 대단히 갑작스럽고 또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남궁비연의 의형이 되어 달라는 건 그녀와 의남매를 맺어달라는 뜻이다.

    달칵.

    운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남궁비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현 앞으로 걸어왔다.

    사락.

    “소, 소저.”

    운현은 깜짝 놀랐다.

    남궁비연이 한쪽 무릎을 꿇고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깨끗한 옷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대인.”

    고개를 든 남궁비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의 의형이 되어 주시겠어요?”

    그녀의 눈동자는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마, 말도 안 되오! 그런 억지가 어디…….”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중경 지부장 남궁철이 소리쳤다.

    하지만 남궁철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운현은 남궁비연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 이름을 걸고,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의매.”

    생각은 많았지만 결정은 간단했다.

    도우러 온 사람이 돕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더구나 철검 남궁벽은 신승이 인정한 사람이다.

    운현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

    남궁비연조차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부친의 말이 억지임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미 한 번 운현에게 폐를 끼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이토록 흔쾌히 받아들여 주리라곤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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