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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24화 (224/530)
  • 224화. 남궁세가의 사정

    남궁비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혹시 우리 세가를 찾아 주신 건가요?”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운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아하!”

    탓.

    그녀는 가볍게 발을 굴러 운현을 향해 뛰었다.

    고작 계단 몇 개였지만 그녀는 우아하게 허공을 날아 운현 옆에 내려섰다.

    “고마워요, 운 학사님.”

    남궁비연은 스스럼 없이 운현의 팔을 잡았다.

    “꼭 오실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감에 운현이 잠시 당혹해하는데, 남궁비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침 저희도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이리로 오세요. 독고 대협께서도요.”

    ‘저희’라는 말은 일행이 있다는 뜻이다.

    운현은 고개를 들어 위층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의 무복을 입은 사람들 몇이 이쪽을 보고 있는데, 그 눈빛이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저는 그냥 따로…….”

    “그럴 수는 없어요.”

    남궁비연의 운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팔은 그래도 옷 위지만 손은 맨살이다. 젊은 아가씨와 손이 닿은 적이 별로 없던 운현은 당황했다.

    “세가에 오신 손님을 그리 대접하는 법은 없답니다. 부디 함께해 주세요.”

    손을 잡힌 데다 애절한 눈빛으로 그리 말하니 운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 손부터 좀…….”

    “네.”

    남궁비연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하지만 운현의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밝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이다.

    ‘……이 아가씨가 이런 성격이었던가?’

    제갈세가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그때도 젊은 아가씨다운 발랄함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스스럼없진 않았다.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이미 초청을 승락한 다음이다.

    운현은 독고랑을 보며 말했다.

    “올라갑시다, 독고 제.”

    “네.”

    두 사람은 남궁비연과 함께 이 층으로 올랐다.

    이 층은 아래층을 내려다보는 식의 구조였는데, 장식은 물론 손님들의 차림새도 사뭇 화려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에 남궁세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언뜻 봐도 서른 명에 가까운, 제법 많은 인원이었다.

    “운 학사님.”

    곁에서 걷던 남궁비연이 문득 속삭이듯 말했다.

    “죄송해요.”

    “네?”

    운현이 의아해 하는 사이, 남궁비연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남궁세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분은 무림맹의 운현 서기님이세요.”

    그렇지 않아도 운현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들이다.

    그들이 일제히 눈살을 찌푸리는 건,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제법 볼만한 광경이었다.

    아까부터 운현을 노려보고 있던 젊은 청년의 표정엔 완연한 조소까지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분은 독고랑 대협이시고요. 우연찮게도 이 두 분께서 본가를 찾아 주셨군요.”

    남궁세가 사람들의 눈빛에 일제히 긴장이 떠오른 건 아마도 독고랑의 험악한 기세 탓이리라.

    “세가의 손님이시니, 함께 식사를 해도 괜찮겠지요?”

    “크흠.”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헛기침을 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그는 엄한 목소리로 남궁비연에게 말했다.

    “연아야. 아무리 무림맹의 사람이라고 하나 서기는…….”

    “아, 참. 그리고.”

    남궁비연이 운현을 보며 빙긋 웃었다.

    “운 서기님은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졌던 분이세요.”

    덜컹.

    남궁세가 사람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몇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계속 운현을 노려보던 젊은 청년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지만,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 역시 눈을 부릅뜬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죄송합니다만.”

    운현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 와전된 것입니다. 그저 조금 인연이 있을 뿐, 저는 그분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남궁세가 사람들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검성과 인연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음, 하지만.”

    남궁비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운현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신승의 사제신 건 분명하지요? 배분으로는 현 소림 장문인의 사숙이 되신다던가요?”

    콰당.

    “무, 무엇이라고?”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남궁비연의 말이 진실이냐는 듯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인연이 되었습니다.”

    “허어!”

    중년인은 긴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즉시 운현을 향해 예를 표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운 대인. 저는 남궁철이라 합니다.”

    그의 예는 정중했다. 옆에서 남궁비연이 말했다.

    “우리 세가의 중경 지부 지부장이세요.”

    “아, 그러셨군요.”

    운현도 그에게 예를 표했다.

    “운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궁철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냉정해 보이던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이었다.

    “이쪽은 제 아들 남궁준입니다. 준아, 인사드려라.”

    그가 소개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운현을 노려보던 그 청년이었다.

    청년, 남궁준은 자리에 앉은 채로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인사하지 않겠습니다.”

    “준아!”

    놀란 남궁철이 말했다.

    그러나 남궁준은 일어서지 않았다.

    “제가 왜 저자에게 예를 표해야 합니까? 그는 무림맹의 사람입니다. 우리를 헌신짝처럼 내친, 바로 그 무림맹 말입니다!”

    그는 사뭇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준아! 이분은 신승의 사제시다!”

    “신승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남궁세가입니다. 소림이 아니고요!”

    “준아!”

    “괜찮습니다.”

    소리치는 남궁철을 운현이 제지했다.

    “사람의 마음까지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본인이 싫다 하니 강요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궁철에게 예를 표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건 합석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남궁철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들의 무례함 때문이라서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럼.”

    저벅.

    운현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자박 자박.

    가벼운 발소리가 뒤를 따르는 것을 들었지만 운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일 층으로 다시 내려온 운현은, 이 층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죄송해요.”

    남궁비연이 허리를 굽혔다.

    사락.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객잔 바닥에 닿았다. 하지만 남궁비연은 개의치 않았다.

    “정말, 죄송해요.”

    운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남궁비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닙니다.”

    운현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개를 드세요. 괜찮습니다.”

    남궁비연은 그제야 몸을 세웠다.

    그녀의 표정은 사뭇 일그러져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제가 소저께 설명을 들을 차례지요?”

    조금 전 운현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동의도 없이 그녀가 운현의 배분을 밝혔지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고, 저들과 식사를 함께하려고도 했었다.

    비록 남궁철의 무례로 인해 깨어졌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남궁비연의 이유, 혹은 변명을 들을 차례인 것이다.

    “우선 앉으시지요.”

    운현의 말에 남궁비연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분위기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운현의 물음에 남궁비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분들은 본가의 잠룡선발에 참가하려 오신 분들이에요.”

    “잠룡선발요?”

    잠룡이라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인재를 지칭하는 단어다.

    “네. 세가의 젊은 인재를 발굴하자는 것이지만, 실상은…….”

    입술을 살짝 깨문 남궁비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새로운 후계자를 정하는 거예요.”

    ‘새로운 후계자?’

    운현은 의아하면서 동시에 이 문제가 사뭇 심각함을 깨달았다.

    전대 뇌검이 장강에서 죽고 철검 남궁벽이 새로 가주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후계자라니?

    “……사실 현 가주님은 바로 제 아버지세요.”

    운현은 놀랐다.

    남궁비연이 철검 남궁벽의 딸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남궁비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제가 외동딸이라는 사실이죠.”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문제지요?”

    “왜냐하면.”

    남궁비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계파의 어른들께서 그걸 문제 삼기 시작했거든요.”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남궁비연이 아직 말하지 않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가주님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단 말입니까?”

    “……네.”

    남궁비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 누구라도 선대 가주이신 뇌검께는 비견할 수가 없으니까요.”

    선대 가주, 뇌검 남궁진천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정사대전 당시에는 항상 선두에 섰고, 가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남궁세가를 천하 사대세가에 올려놓았다.

    그리도 대단한 뇌검이었으니 어찌 현 가주가 비교되지 않을 수 있을까?

    철검 남궁벽도 대단한 무인이지만, 뇌검에 비하면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위도, 영향력도, 그리고 존재감 자체도 말이다.

    “문제는.”

    남궁비연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아버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거예요.”

    남궁벽에게 뇌검은 자랑스러운 형이자 우상이었다.

    언제나 그의 앞에는 형인 뇌검이 있었고, 항상 한발 높은 곳에서 그를 이끌어 주었다.

    그런 뇌검이 암천무제에 패하고 죽었다.

    그의 죽음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철검 남궁벽이었다.

    자신이 형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이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리가 없다.

    철검 남궁벽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간 드러나지 않던 계파 간의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한 거예요.”

    계파들은 각자의 이득에 따라 사분오열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던 세가는 분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외환(外患)이 내우(內憂)를 부른 것이다.

    “모든 계파들의 공통된 적은 바로 아버지였어요. 그들은 온갖 명분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흔들고 권력을 제한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마침내는…….”

    남궁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못다 한 말을 운현이 이었다.

    “잠룡선발이라는 이름으로 다음 후계자를 정하게 했군요. 가주님의 뜻과 무관하게요.”

    “……네.”

    남궁비연의 어깨가 치욕으로 가늘게 떨렸다.

    외압에 의해 후계자를 정한다는 건 이미 가주의 권위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저도 최대한 애써 봤지만…….”

    남궁비연은 그런 아버지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세가 내 각 계파들과 협상에 나서고, 각 지부를 찾아가 상황을 파악했으며, 세가 제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 애썼다.

    조롱도 감내했고 치욕도 견뎠다.

    자존심 같은 건 예전에 내려놓았다.

    제갈세가를 찾아간 것 역시 그런 눈물겨운 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결국 철검 남궁벽은 잠룡선발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계파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은…….”

    남궁비연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들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남궁비연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에, 운현은 물었다.

    “저분들은 누구십니까?”

    “아.”

    남궁비연은 그제야 주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깨달았다.

    짧게 상황을 설명하려 한 것뿐인데 어느새 하소연을 하고 있다니.

    남궁비연은 얼른 눈물을 감추고 대답했다.

    “유력 계파 중 하나예요. 벌써 며칠 전에 이곳에 도착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들어오지 않고 있어요. 아마도 아버지께서 직접 맞으러 오길 바라는 것 같아요.”

    ‘허.’

    운현은 시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소저께서는 저 사람들을 설득하러 와 있었던 것이군요.”

    “……네.”

    대답하는 남궁비연의 표정은 사뭇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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