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객잔에서 만난 그녀
후룩.
신승이 차를 마셨다.
운현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뭐, 그깟 것 가지고…….”
“절 위해서 사형제라고 해 주신 것 말입니다.”
신승이 움찔했다.
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
“늙은 땡중의 사제가 뭐 그리 대단하더냐? 네가 나 때문에 고생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듣는 운현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그래서 더욱 염려스러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신승이 말했다.
하지만 운현은 알고 있었다.
신승의 이름은 천하를 울린다.
어떤 면에서는 검성보다 더욱 큰 존재, 그가 바로 신승 불영이다.
그런 신승이 자신의 사제라 공언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일까?
당장 무림맹 사람들이 ‘후계자 수업’ 운운하는 것은 신승의 이름이 가진 무게감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신승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후폭풍은, 비록 운현은 무림맹 내의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운현을 위해서 신승은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것이다.
“뭐하고 섰냐? 안 가?”
신승의 말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신승이 쑥쓰러워하는 것 같았다.
천하의 모든 사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롱하는 그가 말이다.
“가야지요.”
“그래, 얼른 가라.”
후루룩.
차를 마시며 신승은 지나가는 듯 말했다.
“그리고 이젠 여기 오지 마라. 뒷일은 네가 알아서 하고.”
“네?”
그건 생각도 못 하던 말이었다. 이제 찾아오지도 말라니?
“그게 무슨…….”
신승은 인상을 썼다.
“그럼 언제까지 내 옷자락을 붙들고 따라다닐 셈이냐? 나도 네 일에 휘말리는 건 이제 사양이다.”
따져 보면 휘말린 사람은 운현이다.
억울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신승이 웃었다.
“헐헐, 그놈 표정 하고는.”
유쾌한 듯 웃던 신승이 찻잔을 매만졌다.
“……여기 와 봤자 내가 없을 거라서 그런 거다. 곧 떠날 거니까.”
운현은 더욱 놀랐다.
“떠나신다고요?”
신승이 와룡헌을 떠나다니? 하지만 신승은 피식 웃었다.
“그럼 수도(修道)하는 중이 이딴 집구석에서 천년만년 살 줄 알았더냐? 이만큼 오래 살았으면 그만 떠날 때도 됐지.”
“아니, 하지만…….”
“하지만이고 자시고.”
신승은 운현의 말을 끊었다.
“어서 가. 노인네 피곤하다.”
손까지 내저으며 신승은 운현을 몰아냈다.
“아니, 그래도 어디로 가시는지 정도는…….”
“나도 모르는데 뭘 말해 줘? 본래 중의 발걸음은 정처가 없는 법이다. 그만 묻고 어여 가!”
“어, 하지만…….”
운현이 무어라 했지만 신승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더 이상은 말도 하지 않을 기세라, 운현은 어쩔 수 없이 와룡헌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를 표할 때조차 신승은 운현을 바라보지 않았다.
‘왜 그러시지?’
의아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벅.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신승을 돌아보았지만 신승은 여전히 찻잔을 쥔 채 딴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운현은 와룡헌을 떠났다.
그리고 운현의 그 불안한 심정은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무림맹과 신승의 결별이 알려진 것이다.
***
운현은 서기부에 휴가원을 제출했다.
남궁세가에 가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기부는 두말없이 운현의 휴가를 허락해 주었고 작은 마차까지 한 대 내어 주었다.
아마도 신승의 사제라는 것 때문이겠지만 운현은 군말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운 대인.”
모용진이 운현에게 말했다.
무림맹 정문에 나와 선 그는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무림맹의 결의가 없었다면 제가 직접 대인을 모셨을 것을…….”
모용진은 이번에야말로 운현과 동행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무림맹의 결의, 즉, 아무도 무림맹을 떠나지 않기로 한 결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결의는 지켜야 하는 것이고, 제 일은 사적인 것이니까요.”
“……죄송해요.”
모용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로선, 역부족이었어요.”
그것은 무림맹의 또 다른 결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림맹은 신승과 결별했다.
운현은 그 결의를 모용미에게 전해 듣고서야 신승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와룡헌을 비우라는 말은 없었지만 무림맹의 결정은 나가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신승이 ‘나는 여기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운현은 결심했다.
‘어디 계시든 꼭 찾아뵈어야겠구나.’
이 결과가 자신의 탓만은 아니겠지만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반드시 신승을 찾아뵙고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는 것이 도리다.
“아, 혹시 공손세가의 일에 녹림이 관계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셨습니까?”
운현은 이미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암천무제와 일대상인, 그리고 수로채와 녹림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해서 말이다.
모용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공손세가의 대표자에게 물어봤어요. 그들도 소문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공손세가의 본가가 불탄 후, 이번 일이 녹림이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공손세가로서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천하의 공손세가가 녹림의 도적 떼들에게 불탔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헛소문이라는 것만 확인했다고 해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산채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비어요?”
“네. 공손세가에서는 저들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헛소문이라지만, 공손세가의 분노가 산채들을 향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 말이다.
“음,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나 운현은 어딘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산채들이 텅 빈 것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운 오빠!”
낭랑한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자그마한 모용상아가 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잘 다녀와! 밥도 꼭꼭 챙겨 먹고. 알았지?”
모용진의 한 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는 언제나처럼 작고 귀여웠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상아도 잘 지내고 있으렴. 와서 맛있는 거 사 줄게.”
“와!”
활짝 웃는 모용상아를 흐뭇하게 마라보고, 운현은 모용진과 모용미에게 예를 표했다.
“그럼, 나중에 뵙지요.”
두 사람도 정중하게 답례하고, 운현은 마차에 올랐다.
말고삐를 잡은 사람은 언제나처럼 독고랑이었다.
따각, 따각.
“다녀오십시오, 운 대인!”
“다녀와, 오빠!”
마차가 움직이자 모용진과 모용상아가 소리치고, 모용미는 가만히 한 손을 흔들었다.
운현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세 사람의 배웅 속에 운현과 독고랑이 탄 마차는 무림맹을 떠났다.
따각, 따각.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죄송합니다.”
문득 들린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독고랑의 것이었다.
“제 탓에 대인께서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운현은 피식 웃었다.
“어려움은 무슨……. 별것 아니네. 어차피 한 번은 밝혀야 했던 일이니까.”
“아닙니다.”
독고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공개적으로, 그것도 무림맹에서 창룡검주라는 이름을 언급한 것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운현의 생각은 달랐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야. 독고 제가 자책할 필요는 없네.”
사실 독고랑의 선언은 그저 잠깐의 혼란으로 넘어갈 일이었다.
공손세가의 대제자 공손강이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독고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그래도 멋지더군.”
“……네?”
독고랑이 고개까지 돌리며 반문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자네의 새로운 명호 말일세. 어리석은 동생, 우제 독고랑. 제법 멋있지 않나?”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대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명필가가 스스로 졸필이라 하듯 말이다.
“독고 제가 검을 잘 쓰는 건 알았지만 문학적 감각도 있는 줄은 몰랐어. 정말 좋은 표현이야. 하하하.”
그때 운현이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독고랑의 말에 운현은 쑥스러움과 동시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누가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랴?
그러니 자신이 나선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독고랑에게 부끄러운 의형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명호를 바꿔야 하는거 아닌가?”
혼잣말처럼 운현은 말했다.
“어리석은 동생을 둔 어리석은 형, 우형이라고 말일세.”
운현은 슬쩍 독고랑의 반응을 살폈다.
따각, 따각.
그러나 독고랑은 묵묵히 말고삐를 쥐고 있을 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뒷모습이, 어딘가 쑥스러워 한다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참, 남궁세가로 가는 길은 알고 있나?”
예전 자신이 헤매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이 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고맙네. 이렇게 마차까지 몰게 해서…….”
검기발현의 고수가 모는 마차를 타는 사람은 아마 운현뿐일 것이다.
아무리 독고랑이 원해서 하는 것이라지만, 운현으로선 미안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로 독고랑이 말했다.
“그 어느 곳이든, 대인은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고맙네. 독고 제.”
독고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운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날씨는 참 좋군.”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보며 운현은 감탄처럼 말했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번잡한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환한 햇살이 그저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마차는 남궁세가가 자리한 대도시, 합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무림맹이 위치한 항주에서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까지는 그리 가까운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항주에서 남경까지는 관도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남경에서 합비까지는 장강을 오가는 큰 상선이 많았다.
운현과 독고랑이 탄 마차는 별 어려움 없이 합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인, 합비입니다.”
마차를 몰던 독고랑이 말했다.
반쯤 졸고 있던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아, 벌써 도착했나?”
따각 따각.
어느새 밤이 되었는지, 마차는 번화한 밤거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오.”
사뭇 화려한 합비의 야경에 운현이 눈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마차는 커다란 객잔 앞에 멈춰 섰다.
“이미 해가 졌으니 여기서 묵도록 하지요. 남궁세가는 내일 방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독고랑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세.”
마차를 객잔의 마부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하하하.”
“호호.”
문에 달린 종이 작은 소리를 내고,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밀려왔다.
객잔은 크고 번잡했다.
대도시답게 사람들도 매우 다양했고, 저녁때여서인지 점소이들도 매우 바빠 보였다.
“저쪽으로 가시지요.”
“그러세.”
운현은 독고랑을 따라 그나마 조용할 것 같은 자리로 움직였다.
바로 그때였다.
탁탁탁.
“운 학사님!”
다급한 발소리가 나나 싶더니 곧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운현을 불렀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 남궁 소저?”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 있는 여인은 바로 남궁비연이었다.
처음 용봉지회에서 보았고, 이후 제갈세가에서 만났던 남궁세가의 아가씨 말이다.
“정말 운 학사님이셨군요.”
그녀는 운현을 여전히 학사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