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222화 (222/530)

222화. 그런 게 도(道)다

무림맹 서고.

탁.

“흐음.”

막 보고서 한 권을 덮으며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 다 무림대회에 대한 것뿐이군.”

운현은 다른 보고서로 손을 뻗었다.

“이건 섬서 지부라……, 화산이 있는 곳이던가?”

보고서 첫장을 넘기며 운현은 빠르게 내용을 살폈다.

역시나 천하무림대회에 참가하는 화산파의 동향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무림맹 지부 보고로서는 한계가 있나?”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운현은 중얼거렸다.

암천무제의 배후, 일대상인은 분명 장강수로채와 녹림을 장악했다.

그가 그 두 집단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 흔적이 반드시 남았을 것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아무 데나 굴러다닐 리는 없다.

그래서 고민 끝에 떠올린 것이 바로 무림맹 서고였다.

천하에 산재한 무림맹 지부의 정기적인 보고서는 이곳 서고에 모여든다.

그 보고서를 살피면 일대상인에 대한, 정확히는 장강수로채와 녹림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림맹 지부가 갓 생겨난 초기 단계라는 점에 있었다.

독자적인 정보 수집은커녕 제대로 된 조직도 구성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일을 협력 문파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보고서가 올라올 리 만무했던 것이다.

“역시 전문성을 가지고 작성된 고급 문헌은 어디서든 귀할 수밖에 없군.”

과거 문연각의 잡서를 뒤지던 기억을 떠올리며 운현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톡톡.

운현은 서탁을 두드렸다.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상단 쪽을 알아볼까?’

북해에서 돌아올 때 함께했던 상단이 제법 소식이 빨랐다는 것을 운현은 떠올렸다.

하지만 과연 상단이 운현에게 그런 정보를 말해 줄까?

이서연의 호암상단이 떠올랐지만 운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쪽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가능한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 두고 싶을 정도로.

“후우.”

운현은 서가에 쌓인 수많은 보고서들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많은 서책들이 대부분 천하무림대회 얘기뿐이라니.”

참으로 쓸데없는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암천무제와 남궁세가에 대한 이야기지.”

천하무림대회를 제외하면 그 다음은 단연 암천무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남궁세가의 봉문이 가져온 영향과 장강 이권의 변동에 대한 보고는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에는 반드시 암천무제가 언급되었다.

“이번에는 공손세가에 일어난 사건 보고로 채워지겠군.”

그럴 것이다.

공손세가의 본가가 불탄 것은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니까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덜컥.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도저히 내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저벅, 저벅.

“용무는 모두 마치셨습니까?”

운현이 서고 입구로 나오자 서고 관리장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제의 퉁명스러운 응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서고 관리장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은 후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독고랑과 함께 운현이 향한 곳은 바로 무림맹의 금지 아닌 금지(禁地), 와룡헌이었다.

***

“그래서 나보고 해결해 달라고?”

“아닙니다.”

퉁명스러운 신승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사형은 사제의 고민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요.”

“헐헐, 그놈 참.”

신승은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내가 사제라고 할 때는 인상만 쓰고 있더니, 이제는 나더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너 좋을 때만 사제냐?”

후룩.

신승은 차를 들이켰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냥 차 한 잔 대접받은 대가라고…….”

“늙은 중 차 한잔 공양해 놓고 무슨 대가!”

신승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런 건 그냥 줘도 안 마신다. 이놈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신승은 찻잔을 놓지 않았다.

후루룩, 탁.

뺏어갈까 싶었는지 얼른 차를 다 마셔 버린 신승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왜?”

“네?”

“세상 돌아가는 거하곤 담쌓고 살 것 같던 녀석이 갑자기 무슨 바람으로 강호 무림의 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느냔 말이다.”

운현은 도리어 신승의 물음이 더 이상했다.

신승은 이미 북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암천무제의 배후인 일대상인이 무언가 심각한 일을 꾸미고 있음을 모를 리 없지 않는가?

“그야, 일대상인이 뭘 하려는지 알아야 대처를 하지 않겠습니까?”

“푸핫!”

신승이 웃고 운현은 인상을 썼다.

갑자기 신승이 웃는 바람에 찻물이 튀었기 때문이다.

“그걸 왜 네가 걱정하냐?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지건 너와 무슨 상관이더냐?”

“아니, 그래도…….”

운현은 얼굴에 튄 찻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걱정이 되는 게 상식 아닙니까?”

힘없는 필부에게도 천하의 흥망에 대한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

그러나 그런 철학이나 윤리를 논하기 이전에 세상에 큰일이, 그것도 매우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임을 아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으랴?

걱정을 하고 대책을 궁리해 보는 건 운현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흘.”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흘린 신승은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놈 참…….”

강호 무림은 비정하다.

얻을 것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며, 냉철하게 이해득실을 따지고서야 움직이는 것이 소위 거대 문파다.

그런데 운현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데도 당연한 듯 움직이려 한다.

아니, 무언가를 얻을 생각조차 아예 없다.

운현을 바라보던 신승은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 강호 무림의 정세를 왜 내게 묻느냐? 난 이곳에서 꼼짝도 못하는 늙은 중에 불과한데 말이다.”

“지혜는 지혜로운 자에게서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뭐?”

운현은 신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많은 것을 움켜잡아도 모래를 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하나를 들어도 꽃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하는 운현의 목소리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비록 이곳 와룡헌에만 계신다 하셨지만, 지금의 정세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가진 분은 제가 아는 한 대사님뿐입니다.”

“흘흘.”

신승의 주름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거, 아부냐?”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절반 정도는요.”

“푸헐헐헐!”

신승은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신승은 말했다.

“오랜만에 노인네를 웃게 해 주었으니 내 특별히 말해 주마.”

신승은 눈을 반짝였다.

“남궁세가로 가라.”

“남궁세가요?”

운현의 반문은 당연했다.

갑자기 남궁세가, 그것도 봉문한 것이나 다름없는 곳을 가라니?

하지만 신승의 대답은 진지했다.

“강호 무림에서 가장 많은 귀를 가지고 있는 곳은 소림이나 무당 같은 불가나 도가 문파들이다. 신도들이 워낙 많은 데다가 속가제자나 도관, 사찰도 천하에 산재하니 자연히 듣는 것도 많지.”

운현은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불가나 도가 문파들은 세가들에 비해 그 세력이 작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세가들이 재력과 무력,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나 도가 문파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소림이나 무당으로…….”

“가면, 말해 줄 거 같냐?”

“……안 해 주겠죠?”

답은 금방 나왔다.

일단 운현이 찾는 것이 너무 막연한 데다가, 비밀스러운 정보들을 순순히 말해 줄 리가 없다.

소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운현이 신승의 사제라지만 알고보면 책임도 의무도 없는 이름에 불과하다.

“그다음이라면 당문이다. 당문은 독과 암기에 능한 데다 여러 음험한 일들을 가까이 하는지라 남의 이목에 자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제발 저린 도둑놈처럼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게지.”

물론 세간의 평판을 파악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당문의 정보력은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당문의 적을 찌른다.

“그럼 당문으로…….”

운현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신승의 시선에 얼른 말을 바꿨다.

“……가도 안 되겠군요.”

소림은 신승의 사제라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당문은 그야말로 아무런 인연도 없다.

게다가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곳 아닌가?

“그래. 그래서 남궁세가로 가라는 것이다.”

신승은 말을 이었다.

“지금은 봉문이니 뭐니 하지만 남궁세가의 위세는 사대세가 중 최고였다. 그 똑똑하다는 제갈세가도 남궁세가에는 당하지 못했고, 당문도 남궁세가만큼은 껄끄러워했다. 봐라, 남궁세가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당문이 미친년처럼 날뛰는 꼴을.”

그건 다분히 감정이 섞인 말이었다.

운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당문에 무슨 서운한 일이라도…….”

“당연히 있지!”

신승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 고집불통 늙은이가 영약 하나 달라니까, 엉? 그걸 안 주고 튀어 버려? 그깟 만년삼 얼마나 한다고 혼자 먹으려고……. 에잉.”

운현은 문득 짚이는 곳이 있었다.

“……혹시 독선 어르신 말씀인가요?”

“독선은 무슨! 독에 미친 빌어먹을 노인네지! 에잇!”

그제야 운현은 신승이 당문에 감정을 가진 이유를 알았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남궁세가군요. 하지만 남궁세가라고 순순히 알려 줄 것 같지 않은데요? 그리고 지금 남궁세가는…….”

“봉문 말이냐? 흥, 그까짓 봉문. 남궁세가의 저력은 네 걱정만큼 약하지 않다.”

신승은 단언했다.

“물론 네가 간다고 순순히 알려 줄 이유야 없지만.”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마찬가지잖습니까?”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 남궁세가는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거든.”

신승은 운현을 보며 말했다.

“그걸 네가 찾아 주면 뭐든 말해 주지 않겠느냐?”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저더러 죽은 사람을 살리라고요?”

남궁세가가 잃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선대 가주 뇌검 남궁진천이다.

암천무제에게 그를 잃은 후 남궁세가는 사실상 봉문해버렸다.

그런데 그를 다시 찾아 주라니?

“클클클.”

신승이 웃음을 흘렸다.

“너는 남궁세가가 잃은 것이 가주라고 생각하느냐?”

또르륵.

빈 찻잔에 차를 채운 신승은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가주라면야 지금도 있지. 철검 남궁벽은 남궁세가의 가주로 부족함이 없다. 남궁진천이 그를 다음 가주로 지명한 건 아주 잘한 일이야.”

철검 남궁벽은 뇌검 남궁진천의 동생이자 현 가주다.

남궁진천은 죽기 전 유언으로 그를 다음 가주로 선언했다.

“그럼 남궁세가가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신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게 바로 네놈이 풀어야 할 숙제다.”

운현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이놈아, 사람들이 찾아도 찾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진실로 잃은 것은, 잃어버린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바로 그것을 잃은 것이지.”

신승의 말은 복잡하고 알쏭달쏭했다.

하지만 운현은 본래 난해한 문장에 익숙했다.

“그러니까 남궁세가는 스스로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지금 남궁세가가 찾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고요.”

“……그래.”

신승은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운현이 머리 싸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했다.

하지만 신승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건 처음부터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이다. 바로 너처럼 말이다.”

운현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

“네가 알고 싶은 건, 네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운현은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럼 남궁세가에 안 가도 됩니까?”

“그건 아니지. 네가 남궁세가에 가지 않으면, 너는 네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영영 모를 테니까.”

“그럼 저는 제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걸 알아보러 남궁세가에 가는 거로군요?”

“그래. 남궁세가가 무엇을 잃었는지 그걸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쩐지 좀……, 궤변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게 도(道)다! 이놈아.”

가사를 걸친 승려가 불법은 제쳐 두고 툭하면 도를 운운한다고, 운현은 어디까지나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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