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신승 결별
무림맹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기존 십팔대 문파는 신흥 오대세가의 무림맹 대표자 파견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이로서 무림맹 십팔대 문파라는 이름 대신 신흥 오대세가가 가세한 이십삼대 문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봉문한 남궁세가를 제외해야겠지만 남궁세가의 이름은 아직도 무림맹에 남아 있었다.
본가가 불에 탄 공손세가가, 비록 영향력의 감소는 피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무림맹 이십삼대 문파에 드는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무림맹의 시대.
그 시대는 수많은 문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장강수로채 연합의 황천대와 암천무제, 그리고 아직 결말을 맺지 못한 천하무림대회와 신흥오대세가에 들지 못한 문파들의 불만까지.
그러나 그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공손세가의 참극에 대한 처리였다.
“불가하오!”
소림의 새로운 대표자, 진명이 말했다.
예전 대표자 진허는 대표자 자리를 사임했다. 천하무림대회 중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었다.
그 후임자 진명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공손세가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소! 최근 석 달간 문파의 모든 활동을 공개하라니! 그것이 감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진명의 목소리는 사뭇 컸다.
그만큼 공손세가의 요구는 도가 넘었다.
그러나 공손세가의 대표자, 공손창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림은 무림맹의 결의를 지키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까?”
무림맹은 공손세가의 참극을 심각한 범죄행위라 규정했고, 흉적들의 완전한 색출과 징벌을 결의했다.
바로 그 결의를 공손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진명은 말했다.
“분명 공손세가는 흑색 갑옷과 마갑으로 무장하고 창을 사용하는 자들이 흉적이라 하였소. 헌데 어째서 우리더러 결백을 증명하라는 것이오?”
“그야 물론.”
공손창 대신 흑도회 대표자 묵혈엽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손세가의 본가를 불태울 만한 전력을 가진 곳은 우리들밖에 없기 때문 아니겠소?”
묵혈엽의 말이 옳았다.
지금 강호 무림에서 공손세가를 습격하여 불태울 만한 무력 집단은, 적어도 가능성만으로 따진다면 기존 십팔대 문파뿐이었다.
“우리 소림이, 공손세가를 말이오? 무엇보다 소림에는 창을 사용하는 기마대가 없소이다!”
“드러난 것이 없다고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당문의 대표자, 당문설화 당설련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림 인근의 양가장이 전통적으로 창을 잘 썼지요, 아마?”
진명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지금 당설련은 소림이 양가장을 움직여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소림을 의심하시는 것이오?”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논점을 이탈하시는군요. 저는 그저 우리 중 누구도 의혹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뿐예요.”
진명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남궁세가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황천대에 의해 무너졌소. 그런 무력 집단이 또 없으리란 확증이 있소? 아니, 어쩌면 이 일도 황천대가…….”
“글쎄요? 모르지요. 그런 무력 집단이 있을지, 없을지.”
당설련이 조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보다는, 우리 중 누군가가 은밀히 기마대를 육성하고 있었다는 가능성이 훨씬 더 높지 않을까요?”
진명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거대 문파들은 그럴 힘도 있고 동기도 충분하다.
공손세가가 추락함으로써 얻게 될 반사이익은, 누구라도 탐을 낼 만한 것이니까.
“그럼 당문은 공손세가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씀이시오?”
공손세가는 최근 삼 개월간 문파의 모든 활동에 대한 기록을 요구했다.
진명의 말대로 사실상의 감찰이니, 그걸 받아들일 문파는 없다.
하지만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대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다니!”
공손창의 목소리가 대의사청에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소림은 공손세가의 피가 가치없다 말씀하시는 것이오?”
진명을 노려보는 공손창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 뜻이 아니외다. 나는…….”
탕.
공손창은 탁자를 내리쳤다.
“본가가 불에 타고 수많은 제자들의 피가 흘렀소! 이 핏값을 갚기 전까지 공손세가는 결단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그건 단호한 결의였다.
진명은 차마 말을 못 하고 다른 대표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허어.’
그들이 공손세가의 과도한 요구를 받아들일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림을 향한 시선이 차가운 것은, 그간 소림의 모습이 저들에게 어떻게 보여 왔는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조금 진정하시지요.”
문득 당설련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의사청에 울렸다.
“우리는 좀 더 침착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어요. 감정적이어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공손세가도 동의하시나요?”
듣고 있던 매화검 영호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당설련이 모를 리 없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동의하오.”
공손창이 고개를 끄덕이고 당설련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러면 이렇게 하지요. 모든 것은 기초가 중요하니, 흉적들이 남긴 흔적부터 다시 조사해 보도록 해요. 마침 우리 당문의 솜씨 좋은 어르신들께서 이곳에 와 계시거든요.”
한창 천하무림대회가 열리던 참이다.
당문만 아니라 주요 문파들의 수장과 주요 인물들은 모두 이곳 무림맹에 있었다.
“공손세가의 조사를 믿지 못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공손창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요. 하지만 공손세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제삼자의 확인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 아닐까요?”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 그리고.”
당설련은 대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당문의 조사가 이뤄지는 동안, 여러분들은 이곳 무림맹에 그대로 머물러 주시기 바라요. 각 문파의 수장과 주요 인사들, 모두 말예요.”
소림의 대표자 진명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건 진명만이 아니었다.
“어째서요?”
흑도회 대표자 묵혈엽이 물었다.
당설련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여러분이 돌아가 버리시면 공손세가는 이렇게 생각할 테니까요. 무언가 증거가 될 만한, 혹은 연결 고리가 될 것들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 급히 돌아가야만 했다라고요.”
“그런……!”
진명이 항의하려는데 묵혈엽이 먼저 말했다.
“우리를 의심하는 것인가?”
“의심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설련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서로의 신뢰를 위해 잠시간의 불편을 참아 달라고 말하는 것뿐이지요. 그렇게 못 하시겠다면 거부하시면 돼요.”
“음.”
묵혈엽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공손세가와 같이 사파계에 속하는 그는 당설련의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오?”
진명이 물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대략…….”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당설련은 하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한 달.”
당설련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한 달이면 족하겠군요. 다행히 남창은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중단된 천하무림대회라도 계속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남창이 있는 강서성은 항주가 있는 절강성 바로 옆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처럼 가깝지는 않다. 이동과 조사를 생각하면 한 달은 대단히 빠듯한 시간이다.
“한 달로 괜찮겠소?”
진명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했지만 당설련은 오히려 방긋 웃었다.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당문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답니다.”
당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그녀의 자신감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진명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그의 고민에 결론을 내려 주듯 당설련이 말했다.
“지금 결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아니, 하실 수 없겠지요. 이건 어르신들의 동의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저 이 제안을 전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해요.”
반론은 없었다.
그녀의 제안은 합리적이었고, 아무것도 당장 결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이 지루한 논의가 빨리 끝나기를 대다수의 대표자들은 바라고 있었다.
회의를 진행하던 제갈연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당문의 제안에 대해 숙의하신 후에, 내일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제갈연은 대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한 가지.”
화산의 대표자, 매화검 영호준이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은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당문에서 공손세가의 흉적들을 조사한다는 것인데, 당문 혼자 하는 조사에 객관적인 신뢰성이 있겠습니까?”
“혼자가 아니라 공손세가와 함께지요.”
당설련이 말했지만 영호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직접 확인하길 원하신다면, 언제든 함께하셔도 좋아요. 영호준 대협.”
그건 결코 호의를 담은 초청이 아니었다. 당설련의 날 선 시선은 오히려 적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함께하겠소이다. 당설련 소저.”
당설련이 나지막이 코웃음을 흘리고, 영호준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연은 다시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아, 한 가지.”
이번엔 제갈연도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당설련이었다.
“저도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무엇이오?”
제갈연이 물었다.
사락.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림맹과 신승의 결별을 정식으로 건의하는 바예요.”
쿵.
충격이 대의사청에 내려앉았다.
대표자들은 눈을 부릅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당설련은 옆머리를 쓸어넘기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신승은 이미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했어요. 그리고 무림맹은 그분과 전혀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지요. 그러니 현판을 바꿀 필요도, 누군가를 내쫓을 필요도 없어요. 이제는 무림맹이 그분과 상관이 없다는 것만 결의하면 돼요. 마치 서류에 도장을 찍듯이, 아주 요식적인 행위지요.”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이 내용이 결의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 세가들의 영향력은 여전할 것이고, 무림맹은 유일한 협의체다.
신승은 여전히 와룡헌에 칩거하고 있을 것이고 무림맹은 현판은커녕 서류의 글자 하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강호 무림을 장악한 무림맹의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신승 불영에서, 거대 문파들로 말이다.
“이유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대표자들을 돌아보며 당설련이 말했다.
경악은 사라지고 대신 침묵이 내려앉았다.
신흥 오대세가의 대표자들을 제외하면, 기존 십팔대 문파의 대표자들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우리가 신승을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아득.
당설련이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그가 우리를 버린 거지요.”
대표자들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결국 신흥 오대세가 중 한 곳인 단목세가의 대표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신승께서 우리를 버리다니요?”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신승의 사제가 나타난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건…….”
“그리고 그가 본래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졌다는 것도요.”
놀라는 단목세가 대표자의 모습은 그가 알지 못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애초부터 염려는 있었어요. 검성의 후계자가 혹시 신승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예요. 신승의 후계자가 된다는 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무림맹의 다음 주인이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단목세가의 대표자는 한순간 숨을 멈출 정도로 놀랐다.
급히 다른 대표자들을 돌아보았지만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다.
당설련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적자의 자리를 빼앗긴 데다 나중에 빈손으로 쫓겨나게 된다면 너무나 억울하니까요.”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반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 무림맹은 각 문파 수장들의 승인 아래 압도적인 찬성으로 두 가지 안건을 모두 통과시켰다.
무림맹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