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후계자 수업 같은 거?
공손세가의 본가는 강서성 남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포양호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풍부한 물산과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공손세가가 대대로 힘을 키워 온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공손세가의 본가는 불에 탄 채 그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으음.”
공손세가의 가주, 비검 공손월은 참담한 심정으로 탄식을 흘렸다.
드높이 솟아 있던 공손세가의 예전 모습은 그 어디에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뒤처리가 이미 이루어져 참혹한 모습이 덜했음에도 그날 밤의 비극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느냐?”
“그자들과 맞선 이들 중에서는 내당 당주뿐입니다.”
내당 당주는 피에 젖은 채 말을 달려 공손세가의 참극을 무림맹에 전한 사람이다.
그마저도 목숨을 도외시하고 말을 달린 탓에 매우 위독했으니, 사실상 생존자가 전무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을 피한 사람들, 주로 무공을 하지 못하는 이들은 생명을 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세가에 남아 저항했던 이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참으로…….”
뿌득.
비검 공손월이 이를 갈았다.
“악독한 것들이구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공손월은 본가의 폐허를 바라보았다.
검은 잿더미와 말라붙은 핏자국이 그날의 참상을 전하는 듯했다.
“시신은 모두 수습했느냐?”
“우선 가까운 지부에 모셨습니다.”
뒤를 따르던 지부장이 대답했다.
“지금 의원들이 사인을 조사하는 중입니다.”
“상흔을 면밀히 조사하여 흉수를 찾아내라.”
공손월의 악다문 잇사이로 신음처럼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반드시 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시신의 몸에 난 검흔을 살피면 흉수의 무공을 대강 특정할 수 있다.
공손세가의 본가를 불태울 정도의 세력은 현재 강호에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무공이 특정되면 흉수를 찾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공손월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저, 그것이.”
지부장의 목소리에 공손월은 발을 멈췄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
공손월의 시선은 차가웠다. 지부장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일차 조사의 결과, 대부분 신체 부위를 관통당한 것이 직접적인 사인이라 합니다.”
“관통이라고?”
눈썹을 찌푸리는 공손월에게 지부장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네. 관통흔의 경우 대개 가슴이나 머리같이 치명적 부위이며 그 크기는 대략…….”
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대략 어른의 머리 정도 크기입니다. 때문에 목 윗부분이 없는 시신도 다수…….”
“그게 무슨 소리냐!”
공손월의 분노한 목소리가 불에 탄 본가의 폐허 위에 울려 퍼졌다.
“관통상이라니! 대체 무엇이 그런 흔적을 남긴단 말이냐?”
가장 흔히 쓰이는 무기는 일반적으로 검이나 도, 혹은 그에 준하는 도검류다.
각종 기괴한 병기나 암기를 사용하는 자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에 한한다.
이처럼 상식에 벗어나는 상흔을 남기는 무기를, 그것도 집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차, 창입니다.”
“창?”
공손월의 커다란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내당 당주의 증언에 따르면 검은 갑옷을 입고 창을 든 기마대가 본가를 습격했다고 합니다.”
비검 공손월은 생각에 잠겼다.
창이라면 관통이 가능한 무기다. 게다가 말을 탄 상태라면 높은 위치에서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상식을 넘는 관통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당 당주의 소견에 따르면.”
외당 당주는 가주와 함께 무림맹에 갔었기에 화를 면했다.
지부장은 말을 이었다.
“강력한 내력을 지닌 자가 폭발적인 회전력으로 찌른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으음.”
공손월은 신음을 흘렸다.
명확한 특징을 지닌 무공, 그리고 잘 훈련된 집단전의 흔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한순간 공손월의 뇌리에 암천무제와 황천대가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라면 굳이 기마대로 위장할 이유는 없었다.
공손월이 생각에 빠진 사이, 지부장은 보고를 계속했다.
“그 외에 시신에서 발견된 자상의 경우, 주로 도흔이나 검흔이며 파괴력에 비해 그 형태가 일정치 않은 것으로 보아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자의 소행은 아닌 듯합니다. 어쩌면 소문대로…….”
지부장이 미처 잇지 못한 말을 비검 공손월이 받았다.
“녹림의 소행이란 말이냐?”
“송구스럽습니다.”
지부장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명문 세가인 공손세가를 감히 산적들이 건드리다니?
그런 추측이나 언급 자체가 공손세가에 대한 불경이다.
그러나 남창에 이미 파다하게 떠도는 소문은 바로 녹림이 공손세가를 불태웠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손세가의 그 누구도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건 진정한 흉수가 정체를 감추고자 흘린 헛소문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녹림이라. 왜 하필…….’
어째서 녹림일까?
녹림은 이미 그 명맥조차 희미하다. 장강수로채 연합이 암천무제와 황천대로 새삼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녹림은 그런 것조차 없다.
“주변의 산채에 척후를 보내라.”
공손월은 그래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진짜 흉수들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충돌을 피하고 동태를 살피되, 그 규모와 최근 행적을 빠짐없이 조사하도록 하라. 필요한 인원과 지원은 각 지부로부터 차출하도록.”
“네. 가주님.”
지부장은 예를 표하며 명을 받들었다.
비록 본가가 불에 탔다고 하지만 아직도 강서성 전역에는 공손세가의 지부가 건재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지부장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각 지부의 지부장들은?”
“이미 남창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본가가 불에 탄 것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그 상대가 누구이건, 공손세가는 가문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문중상단에서 온 사신도 가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음.”
공손월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본래 공손세가가 급히 돌아오려 한 것은 문중상단의 참변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그들이 채 출발하기도 전에 내당 당주가 피에 젖은 채 달려와 새로운 비보를 전한 것이다.
“문중상단이라…….”
문중상단은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습격을 받아 상단 전체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재산상의 손해는 물론이고 인명의 손실도 크다.
무엇보다 죽은 문중상단의 장남은 공손세가의 사위다. 그의 부인이 공손세가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문중상단이 괴멸하고 그 직후 공손세가의 본가가 습격을 받아 불탔다.
만일 누군가의 계략이라면 성공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 일로 인해 공손세가는 무력과 재력의 절반을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추된 명예는 그 무엇으로도 회복하지 못한다.
‘으음.’
문득 남궁세가가 떠올랐다.
남궁세가는 뇌검 남궁진천의 죽음으로 봉문 상태에 이르렀다. 그것은 힘을 기르기 전까지 움직이지 말라는 유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주의 죽음이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니, 우리는 다르다.’
공손세가는 다르다.
자신, 가주 비검 공손월과 서른명의 핵심 전력이 건재하다.
또한 공손세가가 뿌리내린 강서성은 사람과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예전의 위세를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무림맹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는 것이다.
그것만은 피할 수가 없다.
“후우.”
공손월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당문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나.’
그가 무림맹을 떠나기 직전, 당문은 그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다.
우선은 그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에겐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그것도 시급한 사안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펄럭.
“가자.”
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비검 공손월이 몸을 돌렸다.
폐허로 남은 공손세가의 본가는 이미 과거다.
비검 공손월의, 아니 공손세가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항주는 오늘도 그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도시에 위치한 무림맹은 긴장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천하무림대회가 중단된 이후 공식적인 첫 무림맹 대표자 회의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잠시 일을 멈춘 채 회의를 기다렸다.
무림맹 서고와 문서수발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늘 서기들로 북적이던 곳이 오늘은 한산하기만 했다.
“실례합니다.”
그 고요함을 깨고 한 문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서고 관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에 익숙한 문사복은 그가 무림맹 서기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슨 용무인가?”
서고 관리장이 물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건, 이런 날 찾아온 낯선 서기가 왠지 귀찮은 일을 가져왔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잠시 기록을 열람하고 싶습니다.”
서기는 정중하게 말했다.
“소속이 어디지?”
“지객당입니다.”
“지객당?”
서고 관리장은 눈살을 더욱 일그러졌다. 지객당이라면 업무 연관성이 별로 없다.
“공문을 줘 보게.”
툭 던지듯 서고 관리장이 물었다.
지객당 소속 서기는 당황했다.
“아, 공문이 필요합니까?”
서고 관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자네…….”
“잠시만요.”
무어라 한마디 해 주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류를 정리하던 서고 소속 서기였다.
그는 하던 일도 멈추고 얼른 서고 관리장을 향해 다가왔다.
탁탁탁.
“혹시 지객당의 운 서기십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아하, 그러셨군요.”
서고 소속 서기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운 서기님.”
서고 관리장만큼이나 당황한 운현 역시 얼른 인사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서고 소속 서기는 웃으며 말했다.
“운 서기시라면 서고 열람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듣고 있던 서고 관리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도 눈치 정도는 있는 사람이라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 특별히 찾으시는 것이 있습니까?”
“어, 요 몇 달간 각 지부에서 올라온 정기 보고 같은 것이 있으면 보고 싶습니다만…….”
“뭐? 정기 보고는…….”
참다 못한 서고 관리장이 한마디 하려 했지만 서고 소속 서기의 대답이 더 빨랐다.
“그것이라면 오른쪽으로 가셔서 세 번째 서가 부근을 보시면 금방 찾으실 수 있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그의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서고 관리장에게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운현은 오른쪽 서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서고 관리장은 서고 소속 서기를 돌아보았다.
“지부의 정기 보고는 대외비에 속하는 걸 알고 있을 테지?”
눈살을 찌푸리며 서고 관리장이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게. 여차하면 문책을 각오해야…….”
“저분이.”
운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서고 소속 서기가 말했다.
“바로 신승의 사제십니다.”
“뭐라고?”
와락 인상을 쓰는 서고 관리장을 돌아보며 서기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현 소림사 장문인의 사숙이 되지요.”
하지만 서고 관리장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말을 이으려던 서고 관리장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의 기억 속에 분명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 탓이다.
천하무림대회의 중단과 공손세가의 충격적인 소식에 묻혀 제대로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분명 신승의 사제에 대한 소문이었다.
소림에서 엄청난 배분을 지닌 사람이 바로 이곳 무림맹에 있다는 소문 말이다.
“서, 설마?”
“바로 그 설마입니다.”
서고 소속 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하지만 정말이었군요. 신승의 사제가 서기라니…….”
서고 관리장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새삼 운현이 사라져 간 서가들 사이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운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신승의 사제라고? 현 소림 장문인의 사숙이고?”
“뭐, 서기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합니다.”
서고 소속 서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표자분들도 함부로 못 대하는 서기가 있다고요. 다른 사람이면 진작 짤렸을 텐데, 유독 저 서기는 그런 것이 없었거든요.”
서고 관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승의 사제라면 대표자들도 아무 말 못 했으리라.
“그렇군. 그래서…….”
그제야 서고 관리장은 알 수 있었다.
책임자의 협조 공문도 없이 서기가 휘적휘적 서고에 찾아와, 대외비인 지부 정기 보고를 보겠다고 한 배경을 말이다.
“그런데.”
눈살을 찌푸리며 서고 관리장이 말했다.
“그런 사람이 왜 서기를 하고 있지?”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글쎄요?”
서고 소속 서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후계자 수업 같은 거 아닐까요?”
그건 제법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서고 관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실수할 뻔한 자신을 막아 준 서고 소속 서기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자네, 오늘 업무는 다 중지하고 저 서기, 아니 저분 나가실 때까지 잘 보살펴 드리게. 불편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써 드리고. 알겠나?”
서고 소속 서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밀린 일은 결국 자신이 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제가 왜…….”
인상을 쓰며 서고 관리장이 말했다.
“그럼 나더러 하란 말인가?”
서고 소속 서기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부풀어오른 뺨은 그의 불만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서고 관리장은 상급자로서 하급자의 불만을 세심하게 잘 다독여 주었다.
“대신 내일은 정시에 퇴근해도 되니까, 저분 가시는 거 잘 확인하고 내일 아침에 내게 보고하게. 알겠지?”
서고 소속 서기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일을 미루고 어떻게 내일 정시 퇴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급자의 불량스러운 태도를 서고 관리장은 관대한 마음으로 못 본 척해 주었다.
“그럼 난 먼저 가 보겠네. 바쁜 일이 있어서. 크흠.”
신승의 사제가 있는 서고에 계속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었다. 무슨 불똥이 튈지 모르니 말이다.
어차피 오늘은 일도 없는지라 서고 관리장은 얼른 짐을 챙겨 일어섰다.
서고 저편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운현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후계자 수업이라니.’
어이없는 이야기다.
운현은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 버리고 서가 가득한 보고서에 손을 뻗었다.
일찍 퇴근하던 서고 관리장이, 입구에 기척도 없이 서 있던 독고랑을 보고 화들짝 놀란 건 또 다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