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그녀가 화난 이유
“감사합니다.”
모용진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는데 모용미가 잠시 주저하는 것이 보였다.
“소저께서도요.”
“……네.”
모용미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운현은 독고랑에게 말했다.
“쉬라고 했잖나. 독고 제.”
“가려던 참입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운현이 들어가 쉬라 한 건 한참 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현은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저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자네도 들어오겠나?”
“아닙니다.”
독고랑은 운현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자네도 이만 쉬게. 이렇게 밖에 서 있지 말고.”
“네.”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아마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당장 내일이라도 독고랑의 숙소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 달라고 해야겠다고 결심하며, 운현은 문을 닫았다.
탁.
운현은 돌아섰다.
모용미와 모용진은 아직도 서 있었다.
“누추하지만 앉으시지요.”
운현이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모용진이 예를 표하고는 의자에 앉으려 했다.
그때였다.
사락.
모용미가 몸을 낮추더니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분홍빛 비단옷이 바닥에 더러워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소, 소저!”
운현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그러나 한쪽 무릎을 꿇은 모용미는 고개를 숙였다.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아래로 쏟아지고,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모용미가 운현에게 극진한 예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소저!”
당황한 운현의 만류했지만 모용미는 멈추지 않았다.
“창룡검주께서는 저희 가문을 구해 주신 은인이십니다.”
고개를 숙인 채 모용미가 말했다.
“어찌 이러한 예로 족하다 하겠습니까? 가주께서 직접 감사를 표하실 것이나, 먼저 소녀가 이렇게 예를 올리니 부족하다 허물치 마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딱딱하고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운현의 기억에 남아 있는 모용미와는 사뭇 다르다.
“소저께서 제게 이런 예를 표하시는 것은.”
굳은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제가 소림의 배분을 가지게 된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용미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슥.
모용미는 고개를 들었다.
운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사뭇 날카로웠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자신의 명호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으셨으니, 저희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지 않을까요?”
운현은 피식 웃었다.
“제 명호를 밝히느냐 마느냐는 제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소저께서 상관할 일이 아니지요.”
모용미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맞아요. 타인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감정적이 되지 않으려고 모용미는 애써 노력했다.
하지만 운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드는 것을, 그녀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즐거우시던가요?”
치맛자락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학사라 숨기며 다른 사람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기쁘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모용미는 운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대로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으니까.
그때였다.
“아하!”
운현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소저께서 화가 나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군요.”
“……네?”
탁.
운현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모용진이나 모용미가 말릴 틈도 없었다.
두 손을 정중하게 모으고 운현은 모용미에게 말했다.
“감추고자 했으나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언젠가 말하려 했다고 하면 변명에 불과하겠으나, 소저를 속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놀란 모용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모용 소저는 제게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어 주신 분이니까요.”
운현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땅에 대지는 않았지만 아주 깊고 정중한 예였다.
“죄송합니다. 모용 소저.”
“우, 운 학사님.”
모용미는 당황했다.
화가 난 것은 사실이었다.
섭섭하고 서운한 것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만의 감정이라고 여겼다.
운현이 이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생각조차 못 했다.
그래서 당황스럽고, 그래서 기뻤다.
당혹한 중에도 가슴 가득 따뜻한 온기가 번져 가는 것을, 모용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 학사님, 이러지 마세요. 저는…….”
“아닙니다.”
운현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소저께서 일어나시지 않으면 저는 계속 이대로 있겠습니다.”
“그, 그런…….”
그렇다고 여기서 냉큼 일어나기도 민망하다.
모용미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크흠.”
옆에 있던 대제자 모용진이 말했다.
“이렇게 보니 어쩐지 혼례식 후에 부부가 예를 나누는 것 같습니다만.”
“네?”
“오라버니!”
모용미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운현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진이 웃었다.
“이런, 벌써 끝났습니까? 하하하.”
모용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운현 역시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감췄다.
“자, 이제 오해가 풀린 것 같으니 앉으시지요. 이러니까 제가 주인 같습니다?”
안 본 사이에 모용진은 제법 넉살이 좋아졌다.
운현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차를 준비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부드러운 차향이 오르는 찻잔을 앞에 두고 탁자에 둘러 앉았다.
“향이 괜찮군요.”
모용진이 말했다.
“네. 차로 유명한 곳인지라 싼값에 제법 좋은 차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운현이 차향을 음미하며 답했다.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아의 화를 풀다니, 역시 운 대인께선 대단하시군요. 저는 여기까지 오면서 말도 못 건넸거든요. 어찌나 찬바람이 쌩쌩 불던지…….”
“오라버니!”
당황한 모용미의 모습에 모용진이 과장되게 몸을 움찔했다.
그 모습에 운현도 웃음을 머금었다.
웃던 모용진이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 대인께서 창룡검주셨군요.”
“그렇습니다.”
운현이 답했다.
“그럼 천외비처는…….”
“그냥 명호예요.”
대답은 모용미가 대신했다.
모용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천외비처 창룡검주. 그건 문파나 소속도 아닌, 그저 운 학사님 스스로를 표현하는 문구일 뿐이에요.”
운현은 놀랐다.
“바로 그렇습니다. 헌데 그걸 어떻게…….”
독고랑 말고는 이야기해 준 적이 없다.
운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용미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운 학사님께서 창룡검주이실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해 본 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알겠더군요. 운 학사님은 그 어떤 숨은 저의나 의도도 없는, 그저 보이는 그대로의 분이라고 말예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모용미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걸 말씀해 주시지 않는 건, 조금 서운했지만요.”
예전에 운현은 자신이 창룡검주의 제자도, 지인도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비록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모용미는 그 짧은 말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추론해 낸 것이다.
“그런 걸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모용진이 물었다.
“변할 것이 없으니까요.”
모용미는 담담하게 답했다.
“우리가 운 학사님을 믿기로 한 결정은 말예요.”
운현은 조금 놀랐다.
자신에 대한 모용세가의, 모용미와 모용진의 신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아 참.”
운현은 그제야 모용세가의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이 닿았다.
“가주께서는…….”
“오지 못하셨어요. 아니, 오지 않으셨다는 말이 옳겠네요.”
모용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운 학사님께서 무림맹 본청에 소환된 이야기는 이미 알고 계셔요. 이 시점에서 모용세가의 가주가 개인적으로 찾아뵙는 것이 운 학사님께 혹여 해가 되지나 않을까, 그것을 염려하셨어요.”
“사실은 운 대인을 제일 뵙고 싶어하는 분이 바로 가주셨습니다.”
모용진이 말을 받았다.
“허나 대인의 의향을 확실히 알지 못하니 자칫 쓸데없는 오해를 부를까 싶어 저희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듣고 있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대인.”
문밖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모용미와 모용진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가주님!”
덜컹.
문이 열리고 짙은 눈썹과 긴 수염, 강렬한 눈빛을 지닌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이었다.
모용미와 모용진이 급히 예를 취하려 했지만 모용단천은 커다란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강렬한 눈빛에서 넘치는 것은 바로 경의와 신뢰였다.
슥.
모용단천은 두 손을 모았다.
“드디어 대인을 뵙소이다.”
운현은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네, 대협.”
“허허.”
모용단천이 웃었다.
“대협이라니, 부끄럽소이다. 가문의 검조차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어리석은 무인이니…….”
“그렇지 않습니다.”
운현이 말했다.
“대협께서 모용세가 검식의 진수를 보여 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어찌 그다음을 더듬어 짐작할 수 있었겠습니까? 빠르든 늦든 결국 다다르셨을 것이니, 저는 그저 작은 계기가 되었을 따름입니다.”
“허허허.”
모용단천의 웃음은 한 점의 그늘조차 없었다.
“과연 대인이시오.”
지긋이 운현을 보며 모용단천이 말했다.
“마침 오늘 달이 밝던데, 서호를 보며 한잔 나누지 않으시겠소?”
운현은 거절하지 않았다.
“대협의 초청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좋소, 아주 좋소! 자 갑시다.”
모용단천은 마치 오랜 지기라도 만난 듯 호탕하게 말했다.
당황한 사람은 모용미였다.
“하, 할아버지…….”
“괜찮다.”
모용단천이 말했다.
“무림맹이 오해한다면 하라 해라. 우리가 아니면 그만이니까.”
운현을 돌아보며 모용단천이 물었다.
“그렇지 않소?”
“옳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만이지요.”
“하하하하.”
모용단천은 크게 웃었다.
모용미조차 할아버지가 이처럼 밝게 웃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대인이시오. 자, 갑시다.”
모용단천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밖으로 나섰다.
운현 역시 기꺼운 표정으로 그를 따라 나갔다.
모용미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께서 결국 참지 못하신 모양이로구나.”
모용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운대인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상관없겠지. 우리도 가자.”
모용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 남자들은, 할아버지나 오라버니 그리고 운현까지 포함해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조금만 참으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는데 왜 그걸 못할까?
“먼저 가세요.”
모용미는 모용진에게 말했다.
“저는 상아를 데리고 갈게요.”
“상아를?”
밤이 늦은 데다 술을 나누는 자리에 데려가도 되나 모용진이 의아해하는 데 모용미가 짧게 말했다.
“자기만 빼놨다고 토라지면 오라버니가 책임 지실 건가요?”
모용세가에서 상아를 이길 사람은 없다.
모용진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알았다. 그럼 우선 삼담인월로 와라. 다른 곳으로 가면 내가 그곳에 전언을 남겨 놓으마.”
“네. 그러세요.”
모용진이 방을 나갔다.
운현과 모용단천, 그리고 독고랑과 모용진의 뒷모습을 보며 모용미는 한숨을 쉬었다.
“상아가 좋아하겠네.”
그렇지 않아도 밤늦게 놀고 싶어서 칭얼거리던 동생이다.
가자고 하면 득달같이 뛰어나오리라.
그 모습을 생각하며 모용미는 발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건 기뻐할 여동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늘은 유난히 달이 밝고 가슴이 벅차오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