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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18화 (218/530)

218화. 소림 속가제자

새벽, 무림맹.

숙소를 나온 운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무림맹은 그 어느 때보다 충격과 혼란으로 가득한 상태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깊은 산속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자박.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운현이 발걸음을 멈췄다.

저 앞에서 자신을 향해 한 손으로 합장하는 노승은 바로 소림의 현 장문인, 태허였다.

“기침하셨습니까?”

인사하는 태허에게 운현은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네. 편히 주무셨습니까?”

태허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태허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의 방문을 이미 예상했던 운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새벽의 고즈넉한 정취가 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운현은 태허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와룡헌 뒤편 공터였다.

쏴아아.

바람이 지나가며 대나무들이 소리를 냈다.

태허는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한 곳이군요. 와룡헌 뒤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의 이목을 피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운현의 말에 태허는 탄식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무림맹 십팔대 문파의 수장들이 운현을 취조하듯 한 것이 바로 며칠 전 일이다.

운현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대화에 응해 준 것만으로도 예의를 다했다 할 수 있었다.

“말씀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운현의 물음에 태허는 다시 한번 정중히 합장했다.

소림 특유의 한 손으로 하는 합장이었다.

“제대로 예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태허가 사숙께 다시 인사드립니다.”

운현은 낮은 탄식을 흘렸다. 신승이 한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된 것이다.

‘사숙이라…….’

현재 소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사람이 전대 대조사 와불이다.

운현은 그 와불의 제자이자 신승 불영의 사제이며 소림 현 장문인 태허의 사숙, 즉 삼촌뻘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다.

소림의 배분이 어찌 작은 일일까? 운현은 혹시 이것이 신승의 임기응변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현 소림 장문인이 운현 앞에서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예를 거두십시오, 대사님.”

운현이 말했다.

상대는 수염이 허연 노승이다. 게다가 이미 남 같지 않은 와불의 사손이며 신승 불영의 사질이 아니던가?

운현은 차마 그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사문의 어른께 무례한 것은 큰 과오입니다. 비록 몰랐다고는 하나 어찌 이런 인사로 족하겠습니까?”

운현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 원하시면서 말입니까?”

그건 뼈아픈 지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진실 된 행동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태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숙히 고개를 숙인 채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운현이 아무말 안 한다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서 있을 기세였다.

“허어.”

결국 운현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눈썹과 수염이 허연 노인이 새파란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어찌 감당하랴?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어리석은 소질의 사죄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노인이 자신을 어리석은 조카[小姪]라고까지 낮추는데 더 이상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래야 고개를 드시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숙.”

태허가 고개를 들었다.

운현을 사숙이라 칭하는 그의 표정은 마치 예전부터 그랬다는 듯 평온하고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에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나이 어린 사람을 윗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어찌 쉬우랴?

소림의 사승 관계가 그만큼 엄격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태허의 수양 역시 낮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저를 사숙이라 부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사님.”

태허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질에게 대사님이라 하는 사숙은 없습니다. 사숙.”

태허도 이런 쪽으로는 절대 양보를 안 할 기세다.

운현은 헛기침을 하곤 화제를 돌렸다.

“크흠,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우선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태허가 말했다.

“사숙께 대한 소림과 무림맹의 결정을 알려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결정’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씁쓸했다.

그나마 ‘처분’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태허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소림은 와불 전대 대조사님과 불영 선사님의 뜻을 받들어 사숙을 소림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합니다.”

그건 태허가 운현을 사숙이라 부를 때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사숙께서는 정식으로 출가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재가신자, 즉 속가제자의 지위를 갖게 되실 것입니다.”

“속가제자요?”

“그렇습니다.”

태허는 공손히 대답했다.

“소림의 제자이되 소림에서 공식적인 직위나 위계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출가인이 아니므로 승려의 의무를 지지 않으며, 원하지 않으신다면 법명을 받지도 않고 계인도 찍지 않습니다.”

운현은 수긍했다.

이제 와서 소림의 배분을 주장할 생각도 없었기에 어쩌면 가장 납득할 만한 결정이기도 했다.

“허나 사숙께서 전대 대조사님의 제자이자, 불영 선사님의 사제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실질적인 권한은 없다.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운현의 배분은 소림 전체를 배경으로 가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로써 무림맹은 사숙에 대한 모든 의혹을 접었습니다. 또한 무림맹의 이름으로 사숙께 사과를 전했습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태허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들을 너무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사숙께서 아시다시피 공손세가의 본가가 불에 탄 직후라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혁련 시주의 경우는 검성과 특히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으니까요.”

운현은 패검 혁련철후가 유난히 고압적으로 나왔던 이유를 깨달았다.

사실 눈앞의 태허만 해도 조심스럽게 나왔었다. 분위기가 살벌해진 것은 혁련철후의 탓이 컸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검성을 존경하는 사람도, 불영 사숙께 은혜를 입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일이 험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운현이 태허의 말을 잘랐다.

“별것 아닌 일이니 알아서 양해하라는 것입니까?”

그 말에 태허가 움찔했다.

“조금 전에는 제게 무례를 행했다 사과하시더니 이제는 알아서 양해하라고 하시는군요. 어느 쪽이 본심입니까?”

운현은 태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를 사숙이라 부르시겠다면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십시오. 만일 저들이 불영 대사께 그리했어도 지금처럼 말씀하시겠습니까?”

태허는 당황했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옳았다.

조금 전 태허는 분명 무림맹의 편에 서서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압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은 채로 말이다.

“허어.”

태허는 한숨을 쉬며 불호를 외웠다.

“사숙께서 소질을 부끄럽게 하시는군요.”

고개를 숙이며 태허가 말했다.

“어리석은 소질이 사숙께 또 다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사과는 이미 받았습니다.”

운현의 싸늘한 대답에 태허는 급히 말했다.

“혁련 시주의 무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사숙의 판단에 따르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소림은 그의 공식적인 사과를…….”

“그의 사과는 필요없습니다. 대사께서 누구의 편인지, 그것을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소질은…….”

운현은 태허의 말을 끊었다.

“소림과 무림맹의 결정은 분명히 전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용건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벅.

운현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사, 사숙!”

태허가 불렀지만 운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후우.’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예민한 반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애매한 태허에게 화풀이를 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태허는 한 번도 운현의 의향을 묻지 않았다. 그저 통고하듯 말을 전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태허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림의 장문인이지만 그만큼 고려해야 할 것도, 얽매인 것도 많을 테니까.

바로 그것이 운현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태허가 싫은 것이 아니라, 온갖 계산과 저의를 깔고 만나야 하는 이런 만남 자체가 말이다.

“독고 제.”

“네, 대인.”

몸을 숨기고 있던 독고랑이 모습을 나타냈다.

운현의 새벽 수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그가 늘 옆에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네.”

독고랑이 대답했다.

하소연도, 대화조차도 없었지만 그저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독고랑이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

“창룡검주라고?”

문왕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렸다.

“그렇습니다.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진 자와 동일 인물임이 밝혀졌으며 현재 신승의 사제 자격으로 무림맹에 머물고 있습니다.”

문사 옷을 입은 수하가 대답했다.

문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북해에 갔다던 그자로군.”

“그렇습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롭군. 혹시 그가 내 계획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

수하는 미소를 머금었다.

“문왕 전하의 지략을 꿰뚫어 볼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습니다.”

“호오.”

문왕의 입꼬리가 웃음을 흘렸다.

“근거는?”

“네?”

“방금 말했지 않느냐? 천하에 아무도 없다고.”

당황한 수하에게 문왕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천하의 모든 사람을 다 알고 다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

수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저, 저는 그저…….”

“꺼져라.”

문왕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아첨을 싫어한다. 그리고 근거도 없이 떠들어 대는 쓰레기들은 더더욱 싫어하지.”

문왕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문사 옷을 입은 수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천천히 물러났다. 그의 눈은 곧 자신에게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문왕은 옆에 서 있는 검은 무복의 사내에게 물었다.

“저는 다만 명하시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그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문왕은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절한 자신의 판단 따위가 아니라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수하뿐이다. 스스로 생각해서 움직이려는 말은 필요 없어.”

탁.

가만히 흔들리던 작은 손부채가 소리를 내며 접혔다.

“하늘을 덮는 그물이라 해도 구멍이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 창룡검주에 대해서 대비를 해 두는 것이 좋겠군. 그가 설령 문서의 주인이 아니라 해도 말이야.”

문왕은 가늘고 흰 손가락을 뻗어 작은 포도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철갑기마단의 상태는?”

검은 무복의 사내가 답했다.

“안정적입니다. 다만 황천대에서 문제가 조금 발생했습니다.”

“문제라니?”

입안에서 포도알을 음미하듯 굴리며 문왕이 물었다.

“기혼단을 오래 복용한 자들의 상태가 예상보다 일찍 악화되었습니다.”

“그래?”

픽.

문왕의 입에서 포도알이 터졌다.

“실혼대의 전력이 늘어나겠군. 수로채의 개파대전이 열흘 후였지?”

“그렇습니다.”

검은 무복의 사내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황천대에 조치를 취할까요?”

“필요 없다.”

문왕은 가볍게 말했다.

“어차피 사람은 많으니까. 그보다 기혼단 제조를 위한 약재 조달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 필요하다면 상단에 압력을 더 가해도 좋다.”

검은 무복의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톡.

잘 익은 포도알이 다시금 문왕의 붉은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

늦은 밤, 무림맹.

자신의 숙소에서 책을 읽고 있던 운현은 문득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대인.”

밖에서 독고랑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용세가의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아, 그래요?”

운현은 책을 치우고 서탁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덜컹.

밖에는 독고랑과 모용세가의 대제자 모용진, 그리고 모용미가 서 있었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운 대인.”

모용진이 정중하게 말했다.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닙니다. 괜찮으니 들어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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