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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217화 (217/530)

217화. 신승의 사제

“이익…….”

패검 혁련철후가 무어라 하려는 순간 태허가 나섰다.

“만난 적이 있소?”

“있습니다.”

“어디서 만났소?”

“지난 번 무림맹의 일로 와불 선사님을 찾아뵈었을 때에 만났습니다.”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태허는 손을 들어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가라앉혔다.

“그를 만나 무슨 말을 했소?”

“검을 나누었습니다.”

“비무를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태허는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말했다.

“시주는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그러하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뭐라?”

“이런!”

소란은 제법 컸다. 태허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허나 신승께서 그대가 검성의 후계자라 하시었소. 그것이 거짓이란 말이오?”

운현은 피식 웃었다.

“소림의 분이시니 불영 선사님을 잘 아시겠군요. 그분께서 정말 ‘검성의 후계자’라는 말을 하셨습니까?”

태허의 눈빛이 흔들렸다.

운현은 이미 알고 있다. 신승은 ‘검성의 후계자’라는 말을 입 밖에도 꺼낸 적이 없다는 것을. 물론 그들의 오해를 유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으음…….”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는 태허에게 운현이 말했다.

“제가 검성께 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검성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태허는 좌우에 앉은 도사들과 무언가 상의하듯 속삭였다.

이렇게 되면 운현에 대한 기본 전제 자체가 달라진다.

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 운현이 말했다.

“암천무제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웅성거리던 이들이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암천무제의 뒤에는 일대상인(一大上人)이라는 배후가 있습니다.”

“일대상인?”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태허에게 운현은 말을 계속했다.

“그는 수로채뿐 아니라 녹림에도 손을 뻗고 있으며, 아마도 관부와 상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일대상인은 국경의 상급 무관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상계에도 손을 뻗치리라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듣는 이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허어. 이 무슨…….”

누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대체 그가 무엇을 노리고 그러한단 말이오?”

운현은 주저했다.

생각한 바는 있다. 그러나 이것까지 이야기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운현이 침묵하자 태허가 입을 열었다.

“시주. 우리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보다 시주에 대해 더욱 의구심을 가지고 있소. 괴서찰은 보냈으나 수로채와는 관련이 없으며, 검성께 검을 받았으되 후계자가 아니라는 말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소.”

“그건…….”

“또한 매우 공교롭게도.”

태허는 운현의 말을 끊었다.

“시주가 무림맹에 들어온 때와 장강수로채가 준동을 시작한 때가 정확히 일치하오.”

운현이 서기로 들어온 직후 남궁세가의 일차 토벌대가 괴멸했다. 그리고 수로채의 황천대가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태허는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시주는 당분간 이곳에 있어야 할 것 같소.”

그건 운현을 사실상 구금하겠다는 뜻이었다.

운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본청 안에 내려앉았다.

열여섯 수장들의 은은한 적의가 운현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건,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이오?”

태허가 물었다.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그저 의심만으로 무고한 사람을 억류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이놈!”

패검 혁련철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너를 무고히 핍박하고 있단 말이냐!”

소리를 친 사람은 그뿐이었지만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심정임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불쾌감과 적의가 섞인 기운에 운현의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였으니까.

수십 년의 수련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니, 이곳에 모인 이들의 무공을 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운현은, 보통 사람이라면 숨도 쉬지 못할 그들의 압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하시면 증거나 증인을 대십시오. 근거없는 억측 말고 말입니다.”

운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학자는 비록 유약해 보여도 더없이 깐깐하고 타협하지 않는 이들이기도 하다.

글자 한 자의 해석 차이에 치열하게 다투는 것을 보면, 물론 일부에 한한다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들이 ‘아니다’ 싶은 것에 얼마나 타협이 없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학자적인 고집과 비타협성이 지금 운현에게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운현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허조차 속마음은 혁련철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이 뻔히 보였으니 말이다.

“네가 신승의 위세를 믿고 심히 방자하구나!”

혁련철후가 분노했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다시 한번 내려치며 소리쳤다.

“설령 우리가 너를 핍박한들 네가 어쩌겠느냐!”

“그러면.”

운현은 혁련철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요.”

그 눈빛은 대단히 도발적이고 한 줌의 존중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무어라고!”

패검 혁련철후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혁련 시주, 잠시만.”

태허가 다시 중재에 나섰다.

그는 운현에게 말했다.

“일이 이러하니 시주께서 협력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일이 이러해요?”

운현은 조소를 흘렸다.

몇몇 사람이 눈을 찡그리는 건 상관도 하지 않았다.

“이러하건 저러하건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 말은 하나도 듣지 않으면서 무슨 협력입니까?”

그 통렬한 반박에 태허의 얼굴도 굳어졌다.

“시주가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소.”

“그렇습니까?”

운현은 웃었다. 그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공교롭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후우웅.

그 순간 운현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기 시작하는 것을 모두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이 결코 호의가 아니라는 것도, 모두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허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일파의 수장이며 장문인이다.

운현의 기운에 물러서는 이들은 없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감히…….”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와 함께 본청 안에 팽팽한 긴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 관지부입니다.”

태허가 허연 눈썹을 찌푸리고 혁련철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 했거늘!”

“허, 허나…….”

문 밖에서 관지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시, 신승께서…….”

덜컥.

관지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신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헐헐, 다들 모여서 뭐 하는 게냐?”

“불영 선사님.”

태허가 즉시 일어서고 다른 이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이들 중 신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는 까닭이다.

“흥, 코빼기도 보이지 않길래 다 죽었나 했더니 아주 잘들 살아 있구나.”

그건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하지만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사람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고, 몇 사람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태허가 공손하게 물었다.

와룡헌을 벗어나지 않던 신승이 이곳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신승은 퉁명스레 답했다.

“사제를 찾으러 왔지. 차 심부름 좀 시키려 했더니 너희가 데려갔다던데?”

“사제요?”

태허가 의아한 표정을 되물었다.

신승 불영에게 사제라니?

“헐헐, 그럼 같은 스승께 배웠으니 사제가 아니고 무어겠느냐?”

다른 장문인이나 가주들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태허가 결국 다시 물었다.

“같은 스승께 배우셨다니, 그게 무슨…….”

“넌 내 스승이 누군지도 모르냐?”

신승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태허는 움찔했다.

소림의 사승 관계는 엄격하다. 아무리 자신이 소림의 장문인이라도 신승은 그의 사숙이다.

태허는 감히 더 이상 신승에게 묻지 못하고 운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호, 혹시 시주께서 전대 대조사님의 가르침을 이었소?”

신승 불영의 스승은 와불 전대 대조사다. 그리고 신승이 아까부터 말하는 ‘사제’는 운현이 분명했다.

하지만 운현 역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가르침을 받기는 했으나…….”

잠시 주저한 건 뭔가 또 신승에게 당하는 듯한 느낌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숨길 것도 없었다.

“무엇을 배우셨소?”

태허가 재차 물었다.

“심상 수련입니다.”

그 말에 태허의 표정에 살짝 낭패가 떠올랐다.

태허는 또다시 물었다.

“혹시 무언가를 따로 받으시진 않았소? 예컨대 무슨 증표라거나…….”

“……대환단이라는 것을 받기는 했으나.”

“대환단!”

다른 가주들과 장문인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운현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잡다한 약초를 섞어 만든 평범한…….”

그제야 다른 가주들과 장문인들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그러나 태허는 여전히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것뿐이오?”

“어, 그리고 쪽지 하나를 받았습니다.”

운현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평생의 심득을 전한다 하시면서 남의 말은 절대…….”

그러나 운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맙소사.”

태허가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불호를 외는 것조차 잊은 채 운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연 눈썹에 수염까지 긴 노인의 그런 모습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와불 특유의 농담이다. 운현 속 터지라고 하는 특유의 짓궂은 말.

게다가 그건 딱히 무슨 비밀이나 격언도 아닌, 평소 와불이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옆에 있던 신승은 웃음을 흘렸다.

“이놈아, 사물의 가치가 어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있다더냐?”

운현을 바라보며 신승이 말했다.

“네놈이 받은 것은 대환단보다 더 귀한 것이다. 소림 전대 대조사 와불의 평생 심득을 직접 전수받는 것을 어찌 작은 일이라 할까?”

음흉한 미소를 떠올린 신승은 태허에게 고개를 돌렸다.

“태허야.”

“……네.”

소림의 장문인 태허가 신음처럼 답했다.

신승은 씩 웃었다.

“내가 네 사숙이니, 이제 이놈도 네 사숙뻘이 되겠구나. 안 그러냐?”

태허의 안색은 아예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 허나!”

혁련철후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말했다.

“지금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자는…….”

“클, 내 사제이자 소림 방장의 사숙뻘에게 ‘이자’라고?”

혁련철후는 움찔했다.

소림의 배분은 단지 소림만의 문제가 아니다. 강호 무림은 수많은 관계로 얽혀 있기에 한 문파의 배분은 자연스레 다른 문파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파의 어른이 소림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되어 있기에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을 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뭐가 그런 문제가 아니냐? 의심스러운 자의 말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믿을 수 없고, 신뢰하는 사람의 말은 그 무엇이라도 항상 무겁게 받아야 하는 법.”

열여섯 명의 가주와 장문인 들을 보며 신승이 말했다.

“너희가 감히 내 사제를 믿을 수 없다고, 지금 그리 말하려는 것이냐? 응?”

대놓고 윽박지르듯 신승이 말했다.

천하에 누가 십팔대 문파의 가주와 장문인 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말에 반박하거나 항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운현 역시,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드는 것은, ‘또 당했다’는 생각뿐이었다.

“헐헐헐.”

무림맹 본청에 신승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그것은 마치 승자의 선언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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