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우제(愚弟) 독고랑
비무대를 내려가려던 독고랑은 발을 멈췄다.
소리친 사람은 공손강을 부축하던 공손명이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공손명은 이를 갈며 말했다.
“너 같은 사람이 한낱 낭인일 리는 없을 터! 네 사문과 소속을 밝혀라! 너는 어디의 누구냐!”
독고랑은 고개를 돌렸다.
공손명과 공손강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독고랑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문과 소속이라…….”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독고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이는 천하에 오직 한 분이며, 내가 섬기는 분 역시 단 한 뿐이다. 받은 은혜는 하늘과 같으나 갚을 길을 찾지 못하는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가 바로 이 몸이니.”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들을 똑바로 마주하며 독고랑은 말했다.
“나는 창룡검주의 어리석은 동생, 우제(愚弟) 독고랑이다.”
그것은 독고랑의 진실 된 자기 고백이었다.
또한 독고랑이 바라보는 운현의 모습이기도 했다.
검성의 후계자는 허명이다.
북해의 푸른 늑대 역시 덧씌워진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창룡검주는 운현이 말해 준 가장 솔직한 스스로의 모습이다.
천외비처 창룡검주.
그 이름이야말로 독고랑에게 운현을 뜻하는 단 하나뿐인 명호였다.
저 높은 검의 경지에서 노니는 그를 창룡이라 하지 않고 무어라 하랴?
그러나 그 고백이 가져온 결과는 바로 혼란이었다.
“뭐? 창룡검주? 그게 누구야?”
“무슨 소리지? 독고랑은 고독한 검객 아니었나?”
“우제는 또 뭐야?”
사방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에게 이 순간 중요한 것은 검기발현의 고수, 독고랑에게 스승이, 그리고 섬기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고독한 낭인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슥.
독고랑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그렇게 한순간의 소란으로 비무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공손강은 ‘창룡검주’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으득.
“창룡검주라 했더냐?”
공손강이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 흐르는 피도 닦지 않은 채, 그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독고랑을 노려보았다.
“역시 배후가 있었구나. 그자가 암천무제와 연관이 있음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암천무제!”
사방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죽이고 남궁세가를 패퇴시켰으며 장강수로채 연합을 일으킨 원인 제공자.
이곳 무림맹에서 암천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적이었다.
슥.
공손강이 손을 들었다.
차창.
공손세가의 다섯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들은 완연한 살기를 내뿜으며 독고랑을 포위하듯 진을 형성했다.
“너와 네 배후를 반드시 밝혀 주마. 그리고 무림맹에 숨어든 이유도 역시.”
공손강은 이를 갈며 말했다.
“이놈을 끌고 가라! 그리고 즉시 본청에 연락하여…….”
독고랑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추십시오.”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공손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벅, 저벅.
문사 차림의 청년이 비무대를 향해 걸어나왔다.
그는 바로 운현이었다.
“나는 창룡검주의 어리석은 동생, 우제(愚弟) 독고랑이다.”
그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운현의 마음은 크게 격동했다.
‘독고 제…….’
독고랑은 스스로 우제라 하였지만 사실은 운현 역시 어리석은 동생[愚弟]이었다.
의형 일충현의 보살핌을 받았음에도 알지 못했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걱정하던 의형의 마음도 깨닫지 못했다.
받은 은혜는 하늘과 같으나 갚을 길을 찾지 못하는,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독고랑은 스스로 말했지만 그건 오히려 운현이었다.
운현이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동생이었다.
“역시 배후가 있었구나. 그자가 암천무제와 연관이 있음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공손강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지만 운현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놈을 끌고 가라! 그리고 즉시 본청에 연락하여…….”
“멈추십시오.”
운현은 앞으로 나섰다.
저벅, 저벅.
공손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이 누구인지 공손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은 운 서기께서 나서실 때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주저함은 없었다.
비록 어리석은 동생이었을지언정 부끄러운 형이 될 수는 없었다.
자신을 위해 묵묵히 죽음을 선택했던 의형 일충현처럼, 운현은 위대해야만 했다.
“내가.”
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창룡검주입니다.”
그 눈빛에 흔들림은 조금도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운현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제가 바로 창룡검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제 의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을 똑바로 마주하며 운현은 말했다.
“저에게 물으십시오.”
사람들은 삽시간에 혼란과 의혹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온갖 목소리와 외침이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공손강이나 공손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로를 바라보는 독고랑과 운현의 눈빛은 부드럽고 온화하기만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쳐다보는 모용진과 모용미의 얼굴엔 경악이 떠올라 있었다.
***
두두두두두.
미친 듯이 질주하는 말 한 마리가 항주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말은 몇 번이고 지나는 행인을 칠 뻔하면서도 그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고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한 행인들은 말을 모는 사람에게 있는 대로 욕을 해 댔지만, 그는 그 목소리를 들을 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두두두두.
그리고 잠시 후, 무림맹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는 미친 말 한 마리가 무림맹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발견했다.
“뭐, 뭐야?”
“빨리 막아!”
기수조차 보이지 않는 말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오는 모습에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빨리 창을!”
그들은 즉시 창을 쥐고 무림맹 정문 앞을 막아섰다.
대기하던 다른 무사들도 일제히 달려나와 이 변고에 대처했다.
두두두두.
돌진해 오는 말을 보며 무림맹 무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차하면 몸을 던져서라도 저 미친 말을 막을 작정이었다.
따가닥, 따가닥.
그런 무사들의 각오가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다행히 말은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다.
달려오던 기세를 이기지 못한 말은 무사들 바로 앞에서 앞다리를 거칠게 들어 올리며 울었다.
히히히힝.
“워, 워.”
안도한 무사들은 말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제서야 말 등에 엎드려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그 중년인은 이미 온몸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이다!”
“빨리 의원을 불러!”
무사들이 떠드는 그 소리에 중년인이 의식을 차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손세가가……. 가주께, 연락을…….”
그가 공손세가의 내당 당주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무사는 없었다.
그것은 천하무림대회 본선이 중단된 지 사흘, 그리고 독고랑과 공손강의 비무가 벌어진 그날 저녁에 일어난 일이었다.
***
무림맹은 갑자기 날아든 소식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바로 공손세가의 본가가 습격을 받아 불탔다는 비보였다.
아무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비록 가주와 핵심 인물들이 무림맹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천하사대세가 중 한 곳이자 무림맹 십팔대 문파인 공손세가의 본가가 무너지다니?
그러나 피에 젖어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공손세가의 내당 당주였다.
무림맹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공손세가의 가주 공손월과 제자들은 즉시 본가를 향해 출발했고, 무림맹에서는 대책 회의가 열렸다.
십팔대 문파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던 터라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무림맹은 이 사태를 심각한 범죄행위로 인식하고 공손세가를 습격한 ‘흉적’들의 완전한 색출과 징벌을 결의했다.
그러나 정작 그 ‘흉적’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할 수 없었다.
강호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
저벅.
운현은 무림맹 본청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림맹의 본청은 의사청과 달리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이야말로 무림맹의 중심이다.
소위 십팔대 문파의 수장들만이 이곳에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시지요.”
관지부가 나지막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그 무림맹 본청에 지금 운현이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호의나, 혹은 선의조차도 아니었다.
“관지부입니다.”
관지부가 문 앞에서 공손하게 말했다.
끼익.
대답도 없이 문이 열렸다.
운현의 눈앞에 본청 내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크고 붉은 기둥과 높은 천장을 가진 본청의 모습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입구 쪽을 제외한 삼면에 화려한 의자가 여섯씩 놓여 있었는데, 앉아 있는 이들마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복장은 승복, 도복, 무복에 고관대작 같은 비단옷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 나이가 많고 연륜이 깊어 보였다.
“앉으시지요.”
허연 눈썹에 흰 수염을 가진 노승이 말했다.
본청 한가운데는 의자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다.
본래는 그 의자조차 없다는 것을 운현은 알지 못했지만, 그 배치가 한 사람을 둘러싸듯 되어 있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가볍게 예를 표하고 의자에 앉았다.
뒤에서 관지부가 말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러시게.”
승복을 입은 노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밖에 서 있던 관지부가 예를 표하고, 그 앞에서 문이 닫혔다.
탁.
운현은 다시 한번 본청에 있는 이들을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운현이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좌측과 우측의 한 자리씩이 비어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궁세가와 공손세가의 자리였다.
“와 주셔서 감사하오.”
운현에게 자리를 권한 노승이 말했다.
“빈승은 소림의 장문인 태허라 하오.”
소림사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장문인이 운현 앞에 앉아 있었다.
“운현입니다.”
운현 역시 앉은 채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태허가 말을 이었다.
“이곳까지 시주를 오시라 한 것은 몇 가지 의혹에 대해 직접 해명을 듣고자 함이오.”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혹이라 하셨는데, 어떤 의혹입니까?”
자신을 향한 열 여섯 사람의 시선을 차분하게 마주하며 운현이 말했다.
태허는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시주가 장강수로채의 배후와 내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소.”
운현의 눈매가 꿈틀했다.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탁.
비단옷을 입은 노년의 사내가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감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가! 묻는 것은 우리다!”
사뭇 엄한 눈빛과 목소리였지만 운현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경솔한 사람이 일파를 이끌고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하시게, 혁련 시주.”
그는 바로 혁련세가의 가주, 패검 혁련철후였다.
태허가 혁련철후를 말린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이런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운현과 신승의 관계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곤란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허는 다시 운현에게 물었다.
“시주는 자신이 창룡검주라 했소. 그러하오?”
“네.”
“그렇다면 수년 전부터 강호의 여러 문파에 정체불명의 서찰을 보낸 사람임을 인정한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하지만 장강의 수로채에는 물론, 녹림의 산채에도 서찰을 보낸 적은 없습니다.”
몇 사람이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태허는 다시 물었다.
“수로채에 서찰을 보낸 이가 당신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저는 보내지 않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혁련세가의 가주가 물었다.
“암천무제라 하는 도적을 만난 적이 있느냐?”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예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