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네가 미숙할 뿐이다
갑작스러운 모용진의 말에 공손강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모용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일 당신이 저 사람을 꺾는다면, 저는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지요.”
모용진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저 비무대 위의 사내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공손강은 고개를 들어 비무대 위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 역시 공손강을 내려다보았다.
‘흐음.’
공손강은 찌푸린 눈살을 펴지 않았다.
비무대 위에 선 사내의 기세는 과연 비범했다.
그러나 고수 특유의 기운이나 날카로운 살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는 누구입니까?”
결국 공손강이 물었다.
“그는 독고랑이라 하는 검객입니다.”
모용진이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그리고 제가 아직까지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는 상대이기도 합니다.”
운현을 따라 소림으로 떠나기 전까지 모용진과 독고랑은 비무를 계속했다.
그리고 모용진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독고랑은 이미 검기발현의 고수였지만 모용진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승자승(勝者勝)이라 하니, 공손 대협께서 저 사람을 이기면 당연히 제가 패배한 셈이 되겠군요.”
공손강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모용진이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다.
슥.
공손강은 다시 비무대 위의 사내, 독고랑을 바라보았다.
독고랑은 여전히 그곳에 서서 다음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도 숨을 죽인 채 공손강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공손강은 마음을 정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자신의 본래 의도와는 달라졌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다.
저 검객을 치우고 모용진을 불러내면 된다.
“허나 저와 비무할 준비는 해 두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공손강은 비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아아!”
“공손세가의 대제자가 삼전무적에게 도전한다!”
“삼전무적!”
“공손강! 공손강!”
조용히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치기 시작했다.
환호성이 사방을 떠나갈 듯 터져 나오는 가운데, 독고랑의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저벅.
공손강은 비무대에 올랐다.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지고 독고랑과 공손강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나는 공손세가의 대제자 공손강이다.”
“나는 독고랑이다.”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고 공손강은 생각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비무대를 내려가면…….”
“검기는 쓰지 않겠다.”
공손강의 말을 독고랑이 끊었다.
‘뭐?’
당황한 공손강의 눈빛은 상관없이 독고랑의 말이 이어졌다.
“내력도 사용하지 않겠다. 그저 본신의 힘과 이 검 한 자루만으로 나는 비무에 임하겠다.”
“오오.”
사방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사람도, 이미 들은 사람도 모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래도 두려운가?”
공손강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고독객 독고랑.’
철정산에서 검기발현을 했다는, 강호 무림에 새롭게 떠오른 고수다.
그러나 공손강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불쾌해졌다.
‘……낭인 따위가.’
검기발현의 경지에 오른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고독객 독고랑은, 공손강의 입장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낭인이다.
사문도 없고 문파에 속하지도 않은 채 이리저리 떠돌며 칼을 팔아 먹고사는, 부평초 같은 떠돌이 낭인.
그러니 공손강에게 독고랑은 오히려 불쾌한 상대에 불과했다.
칼솜씨 하나만으로 명문세가의 대제자인 자신과 맞먹으려는 매우 불쾌하고 건방진 상대 말이다.
“기회는.”
스릉.
검을 뽑으며 공손강이 말했다.
“이미 주었다.”
상대가 검기나 내력을 쓰지 않겠다고 한 말은 이미 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그런 헛소리에 현혹될 정도로 그의 수양은 낮지 않았다.
공손강의 검이 번뜩이자 사방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독고랑은 역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공손강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와라.”
공손강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얼굴을 굳히며 검을 세웠다.
웅.
그의 검이 나지막이 우는 것과 동시에 희미한 기운이 칼날에 어렸다.
“오오.”
나지막한 탄성이 번져 갔다.
처음부터 공손강이 검기를 선보인 것이다.
비록 초입이라 하지만 그의 칼날에 일렁이는 기운은 섬뜩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슥.
반면 독고랑은 오히려 검을 비스듬이 내렸다.
그의 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의 그 오만을.”
나지막이 공손강이 말했다.
“지옥에서 후회하도록 해라.”
탓.
후욱.
공손강의 검이 독고랑을 향해 짓쳐 들었다.
순간 모두가 놓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지만 독고랑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스륵.
독고랑의 검이 물 흐르듯 가볍게 움직였다.
아무 기운도 실리지 않은 그 칼날은, 짓쳐들어오는 공손강의 검을 향해 정확히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두 칼이 마주치는 순간.
치이이잉.
쇠를 가는 듯한 소리가 비무대에 울려 퍼졌다.
독고랑의 칼날이 공손강의 검을 어루만지듯 긁으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헉!’
공손강은 대경실색했다.
이대로라면 독고랑의 검이 자신의 손까지 갈라 버릴 것이 분명했다.
“하아!”
공손강은 즉시 내력을 끌어 올려 검로를 뒤틀었다.
캉.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두 검이 튕겨났다.
탁.
공손강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보았다.
독고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 기운도 실리지 않은 검 한 자루와 함께.
으득.
공손강은 이를 갈았다.
“……어찌 한 것이냐?”
검기를 두른 검을 평범한 철검으로 막아 내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술이냐?”
공손강의 의심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아니.”
독고랑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저 네 검이 미숙할 뿐이다.”
꿈틀.
공손강의 눈썹이 다시금 경련했다.
하지만 독고랑의 말은 아직 끝난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아직 부족할 뿐이고.”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는 독고랑의 눈빛은 사뭇 불만스러웠다.
소리가 나는 것은 자신의 검이 아직 원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운현이 북해에서 보여 준 그 검은 아주 작은 충격음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하!”
공손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곧 공손강은 이를 갈았다.
아득.
“허튼소리로 나를 현혹할 생각은 마라.”
검기는 절대적인 힘이다.
평범한 검은 절대 검기에 맞설 수 없고, 검기 앞에서는 모든 검법이 그 의미를 잃는다.
그렇게 스승께 배웠고 그렇게 사제들에게 가르쳤으며 스스로도 그렇다고 확신했다.
그러므로 지금 독고랑의 말은 자신을 현혹하고 속이려는 간계이자 속임수가 분명했다.
우우우웅.
공손강의 애검 비월이 울음을 흘렸다.
그리고 더욱 짙은 기운이 그의 검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검기다!”
“검기발현!”
사방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공손강의 검에서 보란 듯 일렁이는 기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검기였다.
이제껏 희미한 기운이 어리던, 그래서 과연 검기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완연한 검기였다.
“저, 저 정도면 이미 초입을 넘어선 거 아냐?”
“아니, 아직 그래도…….”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누구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과거 환우오천존만이 선보인 검기는 마치 불타오르듯 선명하고 압도적인 형상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공손세가의 대제자는 자신의 검에 검기를 구현해 냈다.
정도의 차이도 있고 모습도 다르지만 그건 분명 검기였다.
그 순간 사람들이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제자가 검기를 발현한다면…….”
공손강은 대제자다. 그렇다면 그보다 고수라는 외당 당주는, 그리고 공손세가의 가주는 대체 어떤 경지에 이른 것일까?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거대 세가들의 진정한 힘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을 알았다.
사실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남궁세가의 선대 가주는 장강에서 엄청난 검기를 선보인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졌고 죽었다. 그리고 그의 검기에 대한 이야기는 묻혀 버렸다.
무림맹 대표자들은 고의로 그 사실을 은폐했고 남궁세가 제자들은 패배하고 죽은 가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검기가 더 이상 환우오천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공손세가의 대제자 공손강이 똑똑히 보여 준 것이다.
탄성과 말소리가 천천히 잦아들고 침묵이 사방에 내려앉았다.
우우우웅.
들리는 것은 오직 공손강의 검이 우는 소리뿐, 그 검에 일렁이는 검기의 형상에서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네 사술을.”
웅웅웅.
검기가 완연한 자신의 검을 들고 공손강이 말했다.
“내가 깨뜨려 주마.”
그 눈빛은 일렁이는 검기만큼이나 섬뜩했다.
그러나 독고랑의 눈빛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슥.
“와라.”
독고랑은 싸늘한 시선으로 말했다.
“거기 서서 짖지 말고.”
그의 검에는 여전히 아무런 기운도, 내력조차도 담겨 있지 않았다.
“놈!”
공손강은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를 즉시 검으로 표현했다.
후우욱.
공손강의 검이, 아니 검기가 독고랑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리고 독고랑의 검이 움직였다.
순간 모용진은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눈앞에 펼쳐지는 독고랑의 검로는 더없이 우아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지금까지의 독고랑이 아닌 것처럼.
모용진은 알지 못했지만 그건 운현이 북해에서 보여 주었던 바로 그 검로였다.
사락.
독고랑의 검이 공손강의 검 끝에 마치 나비처럼 날아 앉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훅.
독고랑이 공손강을 스쳐 지나는가 싶더니 바람 소리 같은 파열음이 비무대 위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공손강의 애검, 비월은 공중으로 허망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일렁이던 섬뜩한 검기는 이미 흔적조차 없었다.
캉, 카강.
공손강의 검이 비무대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독고랑은 하늘 높이 쳐들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검을 갈무리했다.
스릉, 탁.
공손강은 창백한 안색으로 손을 뻗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찢어진 손바닥에서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공손강은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울컥.
“욱.”
입에서 후드득 피가 쏟아졌다.
역류한 스스로의 내력이 공손강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대, 대사형!”
지켜보던 그의 사제 공손명이 급히 비무대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공손강은 부축을 거부하며 독고랑을 노려보았다.
“대, 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
“검은.”
스륵.
몸을 돌리며 독고랑이 말했다.
“내공이나 초식이 전부가 아니다. 검기는, 더더욱 아니지.”
공손강의 마지막 검격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그의 검기는 대단히 위협적이었지만 그만큼이나 공손강의 검로는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검기의 위력에 스스로 취해 버린 것이다.
저벅.
독고랑은 무심한 표정으로 공손강에게 다가왔다.
“네 검을 찾아라. 그러지 못하면 너는 절대 나를 넘어설 수 없다.”
저벅.
독고랑은 그대로 공손강을 지나쳤다.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를 터트렸다.
“와아아아!”
“삼전무적 검객이 이겼다!”
“삼전무적! 삼전무적!”
사람들은 미친 듯 열광했다.
본선은커녕 예선에도 참가하지 못했던 독고랑이 공손세가의 대제자를, 그것도 검기를 일렁이던 그를 꺾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내력조차 사용하지 않고 말이다.
천하무림대회에서 소외되어 있던 자들의 설움이었을까?
사람들은 독고랑의 승리에 환호했다.
특히나 그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더더욱 그랬다.
저벅, 저벅.
독고랑이 그대로 비무대를 내려가려던 순간이었다.
“멈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