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삼전무적 검객
다시금 목록을 훑어보던 이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말 엄청난 양이네요. 시중의 고급 약재 가격이 유난히 출렁인다 했더니…….”
“이미 건네진 물량 또한 막대하다고 하더구나. 다른 두 상단도 눈에 불을 켜고 매입하고 있을 테니 요행으로 구할 생각은 안 하는 것이 좋다. 무조건 물량 확보에 전력을 다해라.”
“하지만 그러면 가격이 엄청나게 폭등할 텐데요?”
“상관없다. 구매 가격은 우리가 정하는 대로 황금으로 지불하기로 했으니까.”
“하하, 황금 지불이라.”
이서연은 웃음이 나왔다.
“과연 천하삼대상단이 목을 걸어 볼 정도의 거래군요. 어떤 호랑이일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걸요?”
암천무제가 호랑이의 주인일까?
이서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본 암천무제는 무인이다. 이런 대규모 거래를 체결하고 막대한 황금을 움직일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아,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서연이 말했다.
“철광석과 치료를 위한 약재도 따로 더 구입해 두는 것이 좋겠어요. 가능하면 곡류도 좀 더.”
“그래.”
이호암은 미소를 지었다.
“난리가 나면 철광석과 약재, 곡식의 가격이 급등할 테니 제법 괜찮은 장사가 될 게다.”
큰 거래만 보는 사람은 하수다.
진짜 고수는 이렇게 큰 거래가 가져올 파급효과까지 생각해야 한다.
이호암도, 그리고 이서연도 이 엄청난 거래가 가져올 결과를 정확히 예상하고 있었다.
바스락.
서찰을 접으며 이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공손세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괜찮을까요?”
공손세가가 분노하면 그 여파가 호암상단까지 미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서연의 염려는 옳았지만 이호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세가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서연은 알아차렸다.
“공손세가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겠지?”
바삭.
이서연의 손에 들려있던 서찰이 작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서연은 자신의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 정도의 무력과 재력이라면 천하의 판도가 크게 변하겠군요. 상계나 무림뿐만 아니라, 천하가 말예요.”
“그래.”
이호암 역시 긴장된 목소리로 답했다.
“위험한 기회다. 그만큼 보상도 크다. 하지만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딘다면.”
“호랑이에게 목을 물어뜯기게 되겠지요. 문중상단처럼.”
이서연의 뺨이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어떠냐? 호랑이 등에 한번 타 보겠느냐?”
그것은 필요 없는 물음이었다.
“기꺼이.”
이서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기꺼이 올라타겠어요.”
이호암은 미소를 지었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반드시.”
이서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손으로 그 호랑이를 길들이고야 말 거예요.”
그건 이호암조차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서연의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
천하무림대회는 중단되었다.
각 문파 대표자들은 진허의 결정이 지나친 횡포라며 철회하라 했으나 진허는 요지부동이었다.
공손세가와 모용세가 역시 항의를 계속했다.
그날도 모용미는 대표자 회의에 나가 판정의 부당함을 항의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던 모용미는 낯익은, 그러나 전혀 교분이 없던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대제자 모용진과 비무를 치렀던 상대였기 때문이다.
“공손강 대협이 아니신지요?”
모용미가 자신을 알아보자 공손강은 멈칫했다.
모용미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 모용미라 합니다.”
“아, 네. 공손세가의 공손강입니다.”
공손강은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모용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은 어쩐 일이신지요?”
공손강은 모용세가의 숙소 앞에 서 있었다.
지나가는 길은 아닐 터, 모용세가의 사람을 기다린 것이 분명했다.
공손강은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저는 모용 대협과의 비무를 끝내고 싶습니다.”
“네?”
예기치 못한 말에 이번엔 모용미가 반문했다.
공손강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본가와 연계된 상단에서 일이 발생했습니다. 가주께서는 곧 본가로 돌아가실 것이고, 어쩌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결국 지난번 비무는 유야무야되고 말겠지요.”
모용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공손세가가 천하무림대회를 그만두고 돌아가야 할 정도라니?
무언가 큰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공손강은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온 것이 아니었다.
“가주께 강청하여 어렵게 허락을 얻었습니다. 모용진 대협께 뜻이 있으시다면 내일 오후 동편 비무대로 나와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동편 비무대는 모용미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본선에 오르지 못한, 혹은 아예 허락조차 받지 못한 이들의 장외 비무가 열리는 곳이다.
무림맹의 간섭이 없는 그곳에서 공손강은 끝맺지 못한 승부를 가리자고 하는 것이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모용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공손강은 가볍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내일 오후라…….’
모용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격 박탈로 시끄러운데 장외 비무까지 벌인다면 좋을 것이 없다.
사람들의 주목도 꽤나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먼저 뜻을 전했으니 모용진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모용진이 비무의 결과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음은 누구보다 모용미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고 해 봐야 소용없겠지.’
말려도 듣지 않을 것이다.
모용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편 비무대로 나가고야 말 것이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쉬며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는 가끔 어린애처럼 보인다. 아니, 그건 어쩌면 모든 남자들이 다 비슷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용미는 공손강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공손세가와 연계된 상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공손세가가 대회를 포기할 정도의 큰일이 알려지지 않을 리는 없으니까.
어쩐지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모용미는 모용세가의 숙소로 돌아갔다.
***
무림맹 동편 비무대, 장외 비무가 열리는 그곳은 오늘따라 유난히 북적거렸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운현이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어제도 왔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많았다.
무엇보다 어제는 없던, 제법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평소라면 이런 장외 비무에는 관심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말이다.
“저들도 운 대인께서 오시는 것을 아는 모양입니다.”
독고랑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현은 피식 웃었다.
이것이 독고랑이 농담이랍시고 하는 말이다.
“글쎄? 나보다는 삼전무적 검객을 보러 온 게 아닌가 싶은데?”
독고랑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운현은 놓치지 않았다.
삼전무적 검객, 독고랑.
그것이 독고랑이 이곳에서 얻은 새로운 명호였다.
독고랑은 하루에 단 세 번만 싸웠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이겼다.
그것도 내력을 전혀 쓰지 않은 채로.
첫 번째 상대는 독고랑이 정한다. 상대가 쓰러지면 다른 강자들이 독고랑에게 도전한다.
때문에 무인들 중에는 독고랑이 자신의 차례에 비무대에 오르기를 기대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크흠.”
독고랑이 헛기침을 했다.
운현은 싱글벙글 웃었다.
독고랑이 이렇게 딴청을 피우는 것도 신선했지만 의제가 명성을 얻고 있으니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내력을 전혀 쓰지 않고 상대를 이긴다는 것은, 오로지 강함을 추구하던 독고랑이 새로운 검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운현으로선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와아아아!”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운현과 독고랑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도를 든 강렬한 인상의 사내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는 이미 검을 놓친 채 쓰러진 후였다.
“흠, 어떤가?”
운현이 말했다.
“……나가야겠습니다.”
잠시 사내를 노려보던 독고랑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저벅.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비무대 위에 있던 사내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삼전무적 검객, 독고랑이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삼전무적! 삼전무적!”
사람들은 독고랑의 새로운 명호를 연달아 외쳤다.
걸어 나가는 독고랑의 뒤에서 운현이 두 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힘내게! 삼전무적 검객!”
어쩐지 독고랑이 쓴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등은 운현에게 더없이 듬직하게만 보였다.
***
공손세가의 대제자 공손강은 사제들과 함께 동편 비무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청년을 발견했다.
바로 모용세가의 대제자이자 끝맺지 못한 비무의 상대, 모용진이었다.
저벅.
모용진은 공손강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공손강 역시 정중하게 답례했다.
“나와 주셔서 고맙소.”
“아니오. 오히려 이런 제의를 해 주셔서 감사하오.”
두 사람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후면 서로 칼을 맞댈 사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소저께서도 오셨군요. 외당 당주라 하셨지요?”
공손강이 모용미를 발견하고 예를 표했다.
모용미 역시 답례했다.
“네. 다시 뵙게 되어 반가워요. 아, 이쪽은…….”
작은 손을 흔드는 모용상아를 가리키며 모용미가 말했다.
“제 동생 모용상아예요.”
“안녕하세요.”
모용상아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반가워, 꼬마 아가씨.”
공손강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모용진에게 말했다.
“이쪽은 제 사제인 공손명입니다.”
옆에 서 있던 젊은 청년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눈빛이 강렬하고 행동에 절도가 엿보이는 공손명은 명문 세가의 제자다운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그 외에도 다섯 명의 제자들이 더 있었지만 공손강이 소개한 사람은 공손명뿐이었다.
“그럼 가시지요.”
공손강이 말했다.
모용진과 모용미, 모용상아는 동편 비무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비무대로 들어서자마자 놀라운 사실을 알아차렸다.
첫 번째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비무대 주위를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와아아아!”
“삼전무적! 삼전무적!”
그리도 두 번째는 비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독고 대협?”
모용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삼전무적이라 불리고 있는 그는 분명 독고랑이었다.
철정산에서 검기발현을 했고 창룡검주에게 서찰을 받았으며, 운현을 따라 소림으로 떠난 바로 그 고독객 독고랑 말이다.
“독고 대협이잖아?”
“아! 그 아프던 오빠다.”
모용진도, 모용상아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모용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고 대협이 있다는 건.’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모용미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문사 차림의 한 청년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삼전무적’을 연호하고 있는 그는 바로 운현이었다.
‘운 학사님!’
순간 모용미는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스스로의 그 반응이 또한 너무나 놀라워서, 모용미는 당황에 빠졌다.
‘……내, 내가 왜.’
어쩌면 계속 그를 찾아다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는 운현의 매정함이 서러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건, 모용미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무대에 선객이 있군.”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공손강과 사제 공손명의 대화에 모용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가슴에 넘치던 뜨거운 무엇인가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아, 저 사람은…….”
모용미가 무어라 하려했지만 모용진이 더 빨랐다.
“그건 쉽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