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
“허어.”
귀빈석에서 나지막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모용세가의 검이 사뭇 대단하군.”
그는 바로 무당파의 장문인이었다.
옆에 있던 화산의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세가도 검으로 일가를 이룬 가문이외다. 그 검이 허술할 리는 없겠지요.”
“그렇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무당의 장문인이 연신 감탄했다.
그 모습에 무당의 대표자, 청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모용세가만 언급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제게는 두 사람의 무위가 엇비슷해 보입니다만.”
비무대의 공방은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청진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그렇지 않네.”
무당 장문인이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저 청년의 검에는 기교나 내력에 치우치지 않는 도도한 흐름이 있네. 저것은 그저 내력이 크다고, 검을 오래 쥐었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화산의 장문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에게선 보기 힘든 것이기도 하지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산의 장문인이 말했다.
“모용세가는 앞날이 밝겠소이다.”
“그렇습니다. 허허허.”
화산과 무당의 장문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청진은 그 웃음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모용세가는 무당과 화산의 호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모용세가의 무림맹 입성을 뜻한다.
‘흐름이라.’
청진은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검은 치열하게 얽히고 있었다. 자신의 말대로 두 사람의 무위는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비무의 승패는 점차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모용진이, 연신 화려한 절초를 펼쳐 내는 공손강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웅.
내력을 담은 검이 부딪히고 묵직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두 자루의 검을 사이에 두고 모용진과 공손강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우우웅.
“과연 명불허전이시오.”
모용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인상을 쓰고 있던 공손강이 가늘게 웃었다.
“당신 역시 대단하오. 내 검을 막아 내다니.”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은 이미 없었다.
전력을 다해 부딪힌 두 사람은 서로의 검을,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캉.
두 사람이 떨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탁, 휘릭.
공손강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모용진을 향해 검을 들며 말했다.
“이것으로, 끝날 것이오.”
그 말의 의미를 공손세가의 제자들은 분명히 알아차렸다.
지금 공손강이 펼치려는 것이 공손세가의 절초 중 하나인 비조추월인 것이다.
모용진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렇소? 그렇다면.”
슥.
모용진 역시 자세를 잡았다.
모용세가의 제자들 역시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일검관천!’
모용진은 지금 모용세가의 절기 일검관천을 펼치려는 것이다.
우우웅.
두 자루의 검이 나지막이 울기 시작했다.
그것에 담긴 것은 내력만이 아니었다.
세가의 자존심과 두 젊은 무인의 모든 것을 건 대결이, 지금 이루어지려는 것이다.
탓.
“하아!”
먼저 움직인 사람은 공손강이었다.
그는 모용진을 향해 똑바로 짓쳐 들었다.
이후의 경우를 전혀 생각지 않는, 무모하기까지 한 검격이었다.
팟.
“타아!”
모용진 역시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멈추시게!”
한 줄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격돌을 멈출 수는 없었다.
모용진과 공손강은 서로를 향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짓쳐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일갈을 터트린 사람 역시,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부웅, 퍼펑.
누군가 비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모용진과 공손강을 향해 장력을 쏘아 냈다.
비록 살기를 담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를 향해 전력을 내던지던 두 사람에겐 충분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퍼벅, 펑.
“크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신음이 새어 나왔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손에 땀을 쥐며 비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일에 어리둥절해 했다.
상황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탁.
비무대 위에 승복을 입은 사람이 내려섰다.
그는 바로 대회의 총진행을 맡은 소림의 대표자, 진허였다.
진허는 싸늘한 눈으로 모용진과 공손강을 쳐다보았다.
모용진은 검을 든 채 진허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몸을 틀어 진허의 장력을 피해 낸 것이다.
반면 공손강은 검을 든 손을 늘어뜨린 채 다른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진허의 장력이 그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이게 무슨…….”
모용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비무대회의 총 책임자로서!”
진허가 크게 소리를 높였다.
“공손세가와 모용세가의 자격을 박탈하오!”
“뭐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사방에서 고함과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모용세가와 공손세가 제자들의 분노는 더 컸다.
그러나 진허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살수를 엄히 금지한다고 이미 말하였소. 이것은 무림맹 십팔대문파의 합의인 바, 그 누구도 예외는 없소.”
비조추월도, 일검관천도 절기이자 절초다.
위험한 것은 당연했다. 자칫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비무를 중지시켜야 할 정도인가?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조치였다. 지금처럼 비무의 열기가 달아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진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모용진과 공손강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진허는 말했다.
“두 사람은 탈락이오.”
우우우우.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이런.”
지켜보던 매화검 영호준이 혀를 찼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던 거요? 진허 대사.”
본래 이 무림대회는 소림과 무당, 화산과 같은 정파계에서 발의한 것이다.
다들 잊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정파의 위상을 높이고 장강수로채 연합을 견제하는 것이 이 비무의 목적이었다.
비록 그들 외에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진허는 대회 내내 깐깐하게 예와 법을 강요했다. 무림맹이 정파의 것임을, 정파가 아니면 무림맹에 들어올 수 없음을 보여 주려는 듯 말이다.
그리고 그 외골수인 성격이 드디어 이 자리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사파계에 속하는 공손세가와 신흥오대세가인 모용세가의 비무를 중지하고 두 사람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으로 말이다.
“지금 뭐하는 거냐?”
“빨리 비무를 재개해라!”
“우우우우.”
사람들의 항의가 쏟아지고 귀빈석에서조차 동요가 일었다.
그러나 나지막이 불호를 외는 진허의 표정은 결연하기 그지없었다.
***
스륵.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호암상단의 영애 이서연은 이호암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부르셨어요?”
이호암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다.”
인사나 앉으라는 권유 같은 건 없었다.
이서연 역시 그런 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일이 발생한 순서대로 말씀해 주세요.”
이호암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천하삼대상단의 하나로 꼽히던 문중상단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재산상의 손해는 물론이고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중에는 문중의 장남이 포함되어 있다는구나.”
이서연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상단의 신용도 크게 추락하겠지. 좀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이번 손해를 복구하려면 삼 년에서 오 년은 허비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죽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호암은 짧게 답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가 그 호랑이에게 물렸다.”
“네?”
이서연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데 이호암의 말이 이어졌다.
“천하삼대상단은 어느 단체와 비밀리에 거래를 하고 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규모의 거래였지. 그런데 문중상단이 그 거래의 일자를 맞추는 데 실패한 것이다. 대를 이을 장남이 죽었으니 말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뜯긴 셈이지.”
듣고 있던 이서연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문중상단에는 공손세가의 호위가 있었을 텐데요?”
호암상단이 남궁세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문중상단은 공손세가와 매우 가깝다.
당연히 공손세가에서 파견한 만만치 않은 무사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가문은 사업상의 협력뿐 아니라 혈연관계까지 있다. 문중상단을 건드리는 건 사실상 공손세가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했지 않느냐?”
사락.
서류를 내려놓으며 이호암이 말했다.
“호랑이라고.”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공손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가진 단체가 과연 어디일까?
결론은 금방 나왔다.
“암천무제의 세력인가요?”
그녀는 장강수로채 연합 대신 ‘암천무제의 세력’이라고 말했다.
이호암은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묵묵히 이서연을 쳐다보았다.
“지금 공손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무력이라면 당연히 암천무제와 황천대지요. 하지만 천하삼대상단과 거래할 정도의 역량은 장강수로채 연합에는 없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암천무제의 세력이 따로 존재한다고 봐야겠지요.”
이서연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천하삼대상단이 날짜를 맞추지 못할 정도의 대규모 거래를 제안할 수 있는, 엄청난 세력이 말예요.”
“맞았다.”
이호암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좋은 일은 뭐죠?”
이호암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상계의 거목이 쓰러졌는데 그걸 좋은 일이라고 하시진 않을 테니까요.”
그 말은 이호암을 흡족하게 했다.
하지만 이서연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가 그 호랑이 등에 탈 기회가 왔다 해도 말예요.”
이번에는 이호암도 놀랐다.
“……그걸 어찌 알았느냐?”
이서연은 웃었다.
“놀라실 것 없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게 이런 말을 하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호암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답을 들으면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 결론에 도달하는 것과, 그것을 서슴없이 단언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다.
“그래, 네 말대로다.”
이호암은 말했다.
“본래 천하삼대상단은 암천무제의 세력에 반발하려 했다. 무력이라면 그들도 여느 문파 못지않게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중상단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협력을 제안해 왔다.”
이호암은 서탁에 놓인 서찰에 손을 얹었다.
“그들의 거래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일정 지분을 약속하더구나.”
이서연은 그들의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공손세가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상단이 망한 다음에 복수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같이 호랑이 등에 타자는 뜻이군요.”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이서연은 물었다.
“거래 내용은요?”
바스락.
이호암은 서찰을 건넸다.
이서연은 재빠르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귀한 영약과 약재다. 먼 외지에서만 나는 것도 다수 있지.”
서찰을 보던 이서연이 감탄을 내뱉었다.
“세상에!”
“그래.”
이호암은 고개를 끄덕였따.
“한 해 소비량의 몇 배에 달하는 큰 거래다. 더구나 모든 품목이 고가의 약재라 일부만으로도 우리 상단의 작년 총 거래액을 가볍게 넘어서지.”
이서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정도의 거래라면 목숨을 걸 만도 했다.
게다가 이 일이 성공하면 천하삼대상단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약재는 재고가 있지만 많지는 않아요. 이건 얼마 전에 구매한 것이 남아 있고, 이건 지난번에 출하한 것인데…….”
목록을 살펴본 이서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모든 지점의 물량까지 남김없이 모은다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군요. 하지만 영약과 약재는 갑자기 그 생산을 늘일 수도 없어요. 결국 날짜를 맞추자면.”
이서연은 고개를 들고 이호암을 바라보았다.
“기존에 풀린 물량을 전부 수거하고 원산지로 직접 상단을 보내야겠군요.”
“그래 맞다.”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북해를 오가는 상단 하나와 얼마 전 거래를 열었거든요.”
그 상단은 운현의 소개장을 들고 왔다.
이서연 자신이 아닌 일아영에게 전하는 안부까지 따로 적혀 있는 아주 정성스러운 서찰이었다.